119.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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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찾아왔다. 나는 수요일에 약속했던 대로 친구들과의 만남을 위해 아침 일찍 체육관에 방문한 후,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약속 장소에 가기까지 대충 1시간 정도 남았기에 나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며 적당히 괜찮은 옷을 골라 입어 밖을 나섰다.
“어우, 추워.”
아직 3월이라 그런지 추위가 덜 풀렸다. 전보단 차림새가 가벼워진 건 좋았지만, 역시 코트는 일렀을까? 나는 두른 목도리에 목을 더 움츠리며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어디 보오자아~, 어?”
덜덜덜 떨며 장소에 도착하니 딱 약속 시간까지 10분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어디서 기다릴까 둘러보다가 안경희를 발견했다.
“경희야~!”
“아, 안녕…!”
반갑게 그녀를 부르자 안경희가 깜짝 놀랐는지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곧 부른 이가 나란 걸 눈치채고 안심했는지 경직됐던 어깨가 내려가며 수줍게 인사를 마주해 왔다.
“빨리 왔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 나 방금 도착했어!”
안경희가 내 질문에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나는 추위로 얼어 빨간 뺨과 콧등을 발견했지만 더 캐물으면 그녀가 곤란해할까 봐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대신 애들이 도착하자마자 어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정하고 있던 중, 누군가가 내 어깨를 덮쳤다.
“왁-!!”
“으와아악!!!!”
그 정체는 이혜인이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라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이혜인은 장난에 성공했단 뿌듯함에 실실 웃음을 흘리며 기쁜 마음을 나타냈다.
“아자! 놀래기 성공!”
“그냥 평범하게 와 줘….”
아닌 듯 보이지만 장난을 좋아하는 이혜인은 가끔씩 이렇게 나를 놀라게 하는 걸 즐거워했다. 그때마다 나가려는 손을 겨우 막고 있는 내 입장도 헤아려 줬으면 좋겠다. 그동안은 운동을 하는 걸 알리지 않았기에 말도 못 하고 내버려 두긴 했으나… 이젠 슬슬 말해 줘야겠지?
나중에 타이밍을 봐 말해 주기로 결심하며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찬영이만 오면 되겠는데… 어디쯤인지 연락해 볼까?”
“…어,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핸드폰의 전화번호부를 뒤지던 중, 안경희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안경희는 어쩐지 기가 질린 것처럼 낯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안경희가 바라보는 쪽을 보자, 나는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와….”
“대박….”
“…모델인가?”
…나는 왜 이제야 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걸까. 어느샌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나도 한순간 기가 죽을 만큼 잘난 인간 한 명이 조금 먼발치에서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다들 빨리 도착했네?”
장신이라 원래부터 주목받기 쉬운 편이었으나, 그의 얼굴은 연예인을 열백 번은 넘게 때릴 정도로 미남이었다. 그 정도로만 해도 충분했을 터지만,
“……너, 오늘 너무 힘준 거 아냐?”
“응? 평범한데?”
그 말을 듣고 바로 진심이냐고 되묻고 싶은 충동이 찾아왔다. 그도 그럴 게, 그동안 교복만 입고 있어서 몰랐던 건지, 아니면 꾸몄는데 안 꾸민 척하는 건지 몰라도 오늘따라 그의 모습은 유명한 패션모델 잡지에 나올 것처럼 화려한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왜? 별로야? 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돌아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너무 잘 어울려서 그래.”
빈말도 아니고 진심이었다. 공작 수새는 화려하지만 과하다는 인상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처럼 눈앞에 있는 이놈이 딱 그 짝이었다. 머리 세팅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내 입장에선 화려했으나, 너무 잘 어울려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스타일리시하단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누가 보면 정말 애인이랑 데이트라도 하러 가는 게 아닌가 싶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도방중 출신 애들도 잘생기고 각자 화려하다면 화려한 아이들이었지만, 교복을 비롯한 사복을 입었을 때 이 녀석만큼은 아니었다. 고찬영은 그 화려함이 독보적인 강점을 지닌 아이였다. 그래서 학교 내에서 별명도 있다. 취향 파괴자.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이상형을 다 파괴하고 홀리게 만드는 마성의 미모란 의미였다.
“그치? 후훗.”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찬영은 우선 내 칭찬이 기쁜 기색으로 가슴을 당당히 펴며 뿌듯해했다.
“그럼 우리 점심부터 먹는 거지? 나 배고파. 빨리 밥 먹자.”
그러다 그는 꽤나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주린 배를 붙잡으며 내 어깨에 엉겨 오며 칭얼거렸다.
“아, 마, 맞아. 이 근처에 맛있는 떡볶이집 있어! 거, 거긴 어때…?”
그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이혜인이 말을 더듬으며 제안했다. 아무래도 이혜인 역시 고찬영의 이런 차림새가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인지 이상하게 삐걱거렸다. 안경희는 내 등 뒤로 숨은 지 오래였다.
“떡볶이? 좋지~.”
하지만 고찬영은 낯설어하고 경직되어 있는 우리들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태평하게 대답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자니, 결국 내가 알던 놈이랑 같다는 걸 새삼 깨닫곤 피식, 웃었다.
“가자. 거기 가게 어디야? 나도 배고파.”
“어? 아, 저기 골목으로 들어가서 금방이야!”
내가 이혜인의 어깨를 툭, 건들며 묻자 그녀는 어느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 가까워서 좋네. …아, 잠깐만.”
지잉, 지잉 요란하게 울려 대는 진동 소리에 고찬영이 잠시 물러서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는 나를 슬쩍 보더니, 살짝 거리를 벌리며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것처럼 빠르게 키패드를 놀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이혜인이 내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와… 나 방금 진짜 놀랐어. 쟤 잘생긴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저 정도로 잘생긴 줄 몰랐어….”
응. 나도 그래. 나는 동조의 마음을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녀석이 학교에서 얼마나 대충 꾸미고 다녔는지도 확인이 될 정도였다. 사실 학교에서도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남학생들에 비해 꾸미는 느낌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나도 모르게 막 긴장이랄까…. 아무튼 그런 게 막….”
“무서워….”
“맞아! 그거야!”
이혜인이 고찬영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스스로도 느낀 감각에 아리송해할 때, 안경희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이 곧 자신의 마음이기도 했는지 이혜인은 안경희에게 격한 공감을 나타냈다.
“뭐가 그거야?”
“끄앗!!”
그때, 연락이 끝났는지 고찬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혜인이 기겁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노, 놀랐잖아!”
“뭘 그리 수군거리고 있는 거야? 혹시 나만 따돌리는 거야?”
“아, 아니거든…?”
이혜인이 놀란 심장을 붙잡고 항의했으나, 고찬영은 그보단 자신만 놓고 수다를 떠는 게 불만이었는지 부루퉁한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 그리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찔린 이혜인은 그의 눈을 슬쩍 피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 덕에 고찬영의 눈에 의심의 눈초리가 박차를 가했다.
“애들아,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난 이제 시선이 따갑다.”
나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중재에 나섰다. 무엇보다 사방에서 우리를 향한 시선이 엄청났다. 대놓고 보는 사람, 아닌 척 힐끔 보는 사람 등등. 우리는 꽤나 많은 사람에게서 주목받고 있었다.
도방중 출신인 아이들 덕에 시선을 받는 건 이젠 익숙해졌다. 하지만, 미남들 무리에 공기 같은 여자애 한 명 끼어 있는 것과 평범한 여자애들 사이에 미남 한 명이 끼어있는 것과는 그 시선의 차이가 좀 있었다. 전자는 나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해 아이들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경우라면, 이번엔 인지 부조화가 온 것처럼 의아해하고 신기한 조합이라는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버티곤 있었지만, 더 여기 있다가는 집에 돌아가고픈 충동을 못 이길 것 같았다.
그래서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방금 이혜인이 가리킨 골목 쪽으로 먼저 방향을 틀며 걸어가자 곧 세 사람이 내 뒤를 따라왔다.
“근데 너 안 추워?”
문득 이혜인이 고찬영의 차림새가 기온에 비해 얇다고 느꼈나 보다. 그 말에 나도 다시 고찬영을 돌아봐 확인해 보자,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그의 옷은 조금 얇은 것 같았다.
“원래 패션이란 건 추위를 극복해야 하는 법이지.”
하지만 고찬영은 개의치 않고 당당히 말했다.
“와….”
“그러다 얼어 죽는다.”
그 말에 안경희는 감탄했고, 나는 표정을 썩히며 충고했다. 고찬영이 내게 패션을 너무 모른다며 투덜거렸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패션 따위 알 바인가. 내가 편하고 말고가 중요하지. 나는 시큰둥히 그를 무시하고 있자, 어느새 이혜인이 말한 떡볶이집이 눈앞에 당도했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밝은 종업원의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오, 인사성 좋네. 힘찬 음성이 마음에 들어 자동적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마주친 얼굴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엥.”
나와 종업원은 서로를 동시에 가리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식당 종업원은 바로 여자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서로 아는 사이?”
그때, 뒤를 따라 들어오던 고찬영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잠시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고민했다.
“어? 그때 그 애네? 반휘혈 모른다는 그….”
“어….”
그리고 여자 주인공을 발견한 이혜인과 안경희도 그녀를 알아봤다. …아니, 근데 너희들 기억력 좋다? 아니면, 반휘혈 모르던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니…? 행동의 갈피를 잡질 못해 멀거니 서 있는 상태로 오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여자 주인공이 파앗, 하고 놀라워하던 안색이 한순간에 밝게 뒤바뀌었다.
“언니…! 와, 진짜 너무 반가워요!!!”
그녀는 내게 곧장 다가와 내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별이 빛나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어라, 왜 주변에 빛이 나는 것 같지?’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주변의 분위기가 굉장히 화사해진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분위기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걸 조금 수정해야 될 것만 같았다. 기분에 따라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걸 보면 역시 얘도 범상치가 않은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별 같은 게 내 얼굴 쪽으로 팅팅 튕겨 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쓴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