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10)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린지…?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거절을 입에 담으려 했다.
“어, 그거 괜찮은데?”
그런데 엉뚱하게도 긍정적인 대답이 내가 아니라 뒤쪽에서 나왔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내놓은 이혜인을 경악하며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배신에 충격을 받았다. 역시 사람은 믿을 놈 하나 없는 건가…! 남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아, 아니, 생각해 봐. 이나야. 어차피 지금이랑 별다를 바가 없잖아.”
“……응?”
“그러니까~ 너 어차피 학교에선 거의 찬영이나 우리랑 다니기도 하고, 찬영이 없을 땐 다른 애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하교도 혼자 하는 것도 아니잖아.”
이혜인이 하교 부분에서 힐끗 반휘혈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말에 벼락 맞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큰 깨달음을 얻었다.
“어, 그, 으, 러네…?”
확실히 이혜인의 말대로였다. 반휘혈과 화해한 것은 이번 주 수요일. 그 이후로 그는 매일같이 나와 하교하려고 작정한 건지 학교 건물 입구에서 나와의 하교를 기다렸다. 나는 이것이 그냥 내 정체를 지키기 위해 했던 애들 협박의 연장선이라 생각해서 조금 부담스러울지언정 큰 불편을 없었기에 짚고 넘어가질 않았었다.
“맞아. 그런 거지.”
“그치? 그냥 평소랑 비슷하지 않아?”
고찬영과 이혜인이 내 말에 연이어 수긍해 왔다. 생각해 보니 요즘 내 삶에 이 녀석들이 안 끼인 적이 없었다. 등교 시간만 제외하면 거의 이놈들이랑 같이 다니고 있지 않았던가. 사실 등교 시간도 가끔 서이수와 같이 가기도 해서 내 개인적인 시간을 보장해 주는 건 방에 있을 때뿐이었다. …어라? 뭔가 이상한데?
“잠깐, 잠깐만! 그럼 내 사생활은 어디에…??”
불쑥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리자 돌연 침묵이 찾아왔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길 몇 초.
“…자, 이제 결정됐으니 노래방이나 갈까!”
고찬영이 환한 미소를 팟, 하고 지은 후, 몸을 돌렸다. 누가 봐도 내 대답을 회피한 모양새였다.
“그, 그럴까??”
“어, 응…!”
눈치를 보던 이혜인과 안경희과 후다닥 그 뒤를 쫓았다. 게다가 반휘혈마저 나를 외면하고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가는 걸 보곤 나는 당겨 오는 뒷목을 붙잡았다.
“야! 내 말 무시하지 마!!”
“하하, 친구님.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마.”
“이게 왜 사소한 일인데…! 이익!!”
나는 거세게 발을 굴리며 항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능청스레 나를 외면하며 노래방이라는 목적지로 향했다. 혼자서 ‘이건 너무한다’,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등등 툴툴거렸지만 아무도 상대를 해 주질 않았다. 결국 제 풀에 지쳐 버린 난 입을 세모꼴로 삐죽이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흠.”
그렇게 심통이 잔뜩 나 있던 중, 내 곁으로 반휘혈이 다가왔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난, 좋아.”
“…어엉?”
뜬금없는 말에 목소리가 튀었다. 나는 이게 뭔 소린가 싶어 반휘혈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반휘혈은 내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살짝 입매를 가리더니 다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랑… 더 같이 있을 수 있잖아.”
나는 그 말에 저절로 걷던 발이 멈췄다. 훅 들어오는 낯 뜨거운 말에 추위를 잊고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거니? 아니, 그리고 왜 쟤 주위에 샤랄라한 후광이 비추는 것 같지…? 아니, 진짜 꽃이 보였던 것 같기도…?!
평소였다면 당장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말했겠지만, 오늘따라 저 녀석이 번듯하게 차려입어서 그 말의 여파가 더 강해 쉽사리 말이 튀어나오질 못했다. 게다가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나는 황급히 눈을 비빈 후,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래. 이번엔 정말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방금 정말 날 좋아하는 줄 착각할 뻔했다고! 비록 경멸의 시선을 받을지라도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나는 다시 심호흡을 한 후, 눈에 힘을 줬다.
“휘혈…!”
지이잉- 지이잉-.
그때, 내 품에서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반휘혈이 내가 부른 소리에 응답했다. 하지만, 나는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도 한순간에 기가 팍 꺾이고 말았다. 나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가로저으며 슬프게 핸드폰을 꺼냈다.
‘대체 누가 이 타이밍에 전화를 하고 지랄…, 응?’
[한도훈]
신경질적으로 발신자를 확인하던 난 뜬금없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지? 분명 오늘 중요한 일 있다고 체육관도 못 온다고 연락을 받았던 기억이 있던 탓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 곧장 전화를 받았다.
“어, 도훈아. 무슨 일이야?”
[아, 누나! 반휘혈 그 새끼 혹시 누나한테 갔어요?!]
받자마자 성질이 잔뜩 난 목소리가 들려와 한쪽 귀를 틀어막은 채 반사적으로 핸드폰과의 거리를 벌렸다. 아니, 그건 그렇고 갑자기 휘혈이는 왜….
‘아, 잠깐만.’
갑자기 반휘혈의 옷차림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중요한 자리에 참석한 것 같은 멋들어진 차림새. 설마…?
이 자식 설마, 중요한 자리 참석했는데 내팽개치고 이쪽으로 온 건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으나, 너무나도 믿을 수가 없어서 자꾸만 부정을 외치고 싶게 만들었다. 아니, 무엇보다 내가 있는 곳은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그러고 보니, 등장 타이밍도 너무 기가 막혔던 게 이상했다. 나는 자꾸만 기이한 놈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슬쩍 눈을 돌리며 한도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휘혈이 내 옆에 있는데, 무슨 일이야?”
거의 무슨 일이 있을 거란 확언 같은 물음이었다. 나는 긴장된 심장을 단단히 챙기며 침을 꼴깍 삼킨 채 한도훈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한도훈의 답은 곧장 튀어나왔다.
[악…! 내 이럴 줄 알았어!! 아니, 누나 들어 봐요. 내가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자식이 자기 형 지사 개업식인데 튀었어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네? 제가 중간에 껴서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요? 갑자기 사라져서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었는데 1시간이 돼도 이 새끼가 안 돌아와요. 와, 진짜 이 새끼를 어쩜 좋죠? 네?]
“…….”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한도훈의 빡침도 같이 느껴졌다. 말투는 차분해지고 목소리의 고저도 없어지는 게 느낌이 심상치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한도훈은 정말 화가 나면 꽤나 정적인 분위기가 된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
정말 이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 측은함이 저절로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짧게나마 이어지는 그의 불평을 들어 주는 것뿐. 나는 이어지는 반휘혈의 욕을 고개를 끄덕여 주며 듣다가 전화 너머 그의 주위에서 누군가가 한도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훈아.]
낯선 목소리였다. 하지만, 전화 너머에서도 착 감길 정도로 미성이었다. 목소리에서도 느껴지는 이 범상치 않은 기운이라니, 왠지 신경이 쏠렸으나, 이어지는 한도훈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 잠시만요. 금방 갈게요. 형. …누나 걔 한 대만 때려 주면 안 돼요? 나 진짜 평생의 소원이에요.]
“평생의 소원까지 갈 필요도 없으니까 걱정 말렴.”
이를 갈며 분노하고 있는 한도훈을 달래며 나는 전화를 껐다. 그리고 태평스레 옆에서 걸어가던 반휘혈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쳤다.
퍽-!!
“……!”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휘혈은 자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 반응에 나는 싸늘하게 녀석을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반휘혈, 너 앞으로 나한테 솔직하게 구는 거 금지야.”
“…뭐?”
“너 진짜 오해받기 싫으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 이 멍청아.”
“무슨 소리야…?”
아직도 상황 판단이 안 된 것 같은 그의 반응에 나는 질린 낯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나 좋다고 그렇게 돌직구로 굴지 말라고. 그 행동이 바로 나 좋아한다고 착각될 요소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너 지금도 형 지사 개업식인가 박차고 나한테 온 거라며. 아니, 그보다 나 있는 곳은 어떻게 안 거야?”
“…….”
내 말에 황당히 벌어져 있던 반휘혈의 입이 닫혔다. 그리고 앞서 걸어가던 고찬영이 휙, 하고 이쪽으로 몸을 돌리며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어? 잠깐만. 걔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 이 자식 우리 얘기 듣고 있었나? 방금까지 내가 말 거는 건 다 무시해 놓고? 그 선택적인 반응에 부아가 치밀었으나 성질을 부리기엔 타이밍이 적절치 못해 결국 천연덕스러운 그를 노려본 채 뚱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내 대답에 이혜인과 안경희도 놀란 듯 토끼 눈을 뜨며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어… 지, 진짜?”
믿을 수 없다는 세 쌍의 눈이 반휘혈을 향했다. 나는 그 당연한 반응에 한숨을 푹 내쉬며 반휘혈에게 다시 경고했다.
“봤지?”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절제를 좀 배워.”
사실 이 말을 꺼내는 것도 늦은 감이 있었다. 그동안 이런 직설적인 호의가 익숙하지 않아서 대응이 서툴렀다. 인기가 있어 봐야 알지…. 아무튼 그러다 보니 자꾸만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 같았다.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 어리숙하게 방치한 내 잘못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끈거려 오는 머리를 붙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 그러니까, 얘가 너 안 좋아한다고? 진짜?”
고찬영은 내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나 보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우리를 번갈아 짚으며 묻는 모습에 나는 피로한 눈을 문지르며 대답해 줬다.
“좋아하긴 좋아하지. 누. 나. 로. 서.”
“아, 하….”
정확히 강조까지 하며 설명해 주자, 떨떠름한 듯하지만 납득한 것 같은 반응이 고찬영에게 튀어나왔다. 그는 무언가 복잡한 얼굴을 짓더니 턱을 쓸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곤 반휘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이런 말 해서 기분 나쁠 수 있겠는데, 정말 친구님을 누나로서만 좋아하는 거면… 선 좀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아.”
진지한 충고였다. 반휘혈은 그 말에 반박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고찬영의 말에 벌어졌던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둘 중 한 명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둘 다 난처해질걸. 넌…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누나를, 그렇게 만들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