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25화 (125/306)

125.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11)

고찬영의 말에 반휘혈이 눈을 크게 뜨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심각해…?”

“응.”

헛. 나는 말해 놓고 아차, 했다. 순간 너무 맞는 말에 나도 모르게 동조하고 말았다. 반휘혈은 나를 잠시 흘끗 가늘게 보더니, 곧 자신의 이마를 살짝 붙잡으며 말했다.

“…알았어.”

“엉?”

아니, 이렇게 빨리 수긍한다고? 나는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대답에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반휘혈의 눈이 가늘어지며 나를 작게 쏘아보다가 눈을 피하며 작게 투덜거렸다.

“…이렇게까지 들으면 내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건 나도 알아.”

아니, 세상에. 나는 그 말을 듣고 진심으로 충격받았다. 멍하니 입을 벌리며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네가 사람 눈치를 보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너 안 본 사이에 철이라도, 억!”

그러다 갑자기 무릎 뒤쪽이 훅 꺾였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몸을 잠시 휘청이고 있자,

“기껏 생각해서 결정했더니… 쯧.”

그 반휘혈은 짜증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혀를 차며 휙, 하고 먼저 앞서 걸어가 버렸다.

“야, 이…! 장난도 못 치냐아아…!”

잠깐 놀렸다고 한 대 때리고 가다니! 그렇게 아프진 않았지만, 억울함이 들어 동그란 뒤통수에 항의하듯 소리쳤다.

“융통성이 생긴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 왜 그렇게 쳐다봐?”

투덜거리며 그 뒤를 뒤쫓으려 하자,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게 참으로 기묘해 나도 모르게 흠칫거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자, 고찬영이 앞서가는 반휘혈을 한번 흘끗 보곤 나를 슬쩍 보더니 능청스레 어깨를 크게 으쓱이며 한숨을 들으란 것처럼 크게 내쉬었다.

“아니, 둘이 참 재밌게 논다 싶어서?”

“…그거 욕이야?”

“글쎄?”

고찬영은 내 미심쩍은 질문에 대충 대답하며 휙, 하고 나를 무시하듯 걸어가 버렸다.

“뭐야??”

그 알 수 없는 반응에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황당히 바라보는데, 이혜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짚었다.

“너도 보면 죄가 참 많은 거 같아.”

“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글쎄…? 아, 빨리 가자. 애들 벌써 저기까지 갔…, 얘들아!! 거기서 왼쪽으로 가야 돼!! 오른쪽 골목에 있는 노래방보단 왼쪽이 좋다고!!!”

이혜인은 내 말에 대충 대답하다가 노선을 잘못 틀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하곤 후다닥 앞서 뛰어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허탈하니 그들을 바라보다가 유일하게 곁에 남아 준 안경희에게 조용히 물었다.

“…내가 뭐 이상한 거 했니?”

“어, 음. 따, 딱히…?”

안경희는 이 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내 눈을 피했다.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 보였으나, 왠지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캐물어 볼까 싶었지만 왠지 맥이 빠졌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듯 나직하게 자신을 한탄했다.

“내가 그렇게 둔했나….”

일평생 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아무래도 인간관계에 한해서만큼은 눈치가 없나 보다. 반휘혈과 싸잡혀 비슷한 취급을 받으니 그게 여실히 다가와 나는 조금 침울해졌다.

“어, 어…! 그, 그래도 이나 넌 멋지니깐…! 괘, 괜찮아!”

…웬 생뚱맞은 소리지? 상황에 맞지 않는 칭찬에 나는 휘둥그레 눈을 뜨며 안경희를 보았다. 안경희는 얼굴을 붉히며 내게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열심히 손을 방황하며 설명했다.

“바, 방금도 완전 멋졌구…! 바, 반휘혈이나 찬영이를 저렇게 다룰 수 있는 건 너뿐일 거구…! 아, 아무튼 너, 넌 그 자체로 정말 최고라고 생각해…! 무, 무엇보다 너의 그런 솔직하고 꾸밈없는 모습이 정말 좋아! 그, 그러니까 다른 애들도… 어… 좋아하는 걸 거구…!”

안경희가 잔뜩 벌게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그 솔직한 고백을 멍하니 듣던 난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뭐야, 그게!”

“으, 어, 아, 어….”

그녀의 위로를 듣고 있으니 다시 올라온 기분에 나는 유쾌한 웃음을 그려 내며, 당황하고 있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렇게 말해 주니깐 고마운데? 아, 애들이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 어서 가자.”

안경희의 몸을 끌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정말이지, 나 그 자체로 최고라니….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깐이나마 가라앉았던 마음이 한순간에 부상하는 게 느껴졌다.

“아, 어, 응…!”

안경희는 내가 부축하듯 이끌자 얼굴을 붉히며 당황스러워했으나, 내 손을 치우진 않았다.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웠던 내가 그녀의 머리를 잔뜩 헝클여 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이혜인 추천의 노래방으로 들어서고 시간을 주문하고 있는 고찬영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난 문득, 무언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아, 잠깐. 근데 반휘혈은 진짜 왜 온 거지? 아니, 그보다 내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한도훈의 말대로라면, 분명 오늘이 형의 지사 개업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꽤 중요한 자리였을 터였다. 바쁜지 안 바쁜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통 터져 하는 한도훈의 목소리로 보건대, 나름대로 바빴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자식은 왜 내 옆에 이렇게 서 있는 건가.

나는 표정 없이 내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반휘혈을 흘겨봤다. 겨우 형과 사이가 진척됐으면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의문이 자꾸만 솟구쳤다.

“5번 방으로 가면 된대.”

“그럼 이쪽으로 가면 돼!”

그때, 결제를 마친 고찬영의 말에 이혜인이 상기된 얼굴로 두 갈래로 갈라진 복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 대화를 잠자코 듣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 얘들아. 나 잠깐 음료수 좀 사 가지고 갈게.”

“응? 그럼 내가….”

“아니, 먼저 들어가. 휘혈이, 넌 나 따라오고.”

아무래도 개인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보니 다른 애들 앞에서 말하는 게 꺼려졌다. 그래서 나름대로 적당한 핑계를 대며 반휘혈을 불러내니 고찬영과 애들도 대충 내가 반휘혈에게 목적이 있음을 파악했는지, 무언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럼 먼저 가 있을게~.”

“늦게 오면 우리 먼저 부르고 있는다?”

“어어. 금방 갈게.”

나는 세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준 후, 바로 몸을 돌려 반휘혈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 가자.”

반휘혈은 의아한 듯 날 보았으나, 말리지는 않았다. 순순한 그의 태도 덕에 나는 수월히 노래방을 빠져나온 후,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곤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우리 반휘혈 씨는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낸 거지?”

“…….”

내 질문에 반휘혈의 눈이 커졌다. 잊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꺼내질 않길 바랐던 건지 그의 얼굴에 설핏 낭패감이 스쳐 지나갔다.

“게다가 형의 지사 개업식이라며. 엄청 중요한 자리잖아. 왜 이곳으로 온 건데?”

“…….”

반휘혈이 슬며시 내 눈을 피했다. 마치 말하기 싫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물며 나를 외면했다. 나는 그 모습에 역시 무언가가 있다는 걸 파악하곤 질문을 재차 던졌다.

“우선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안 거야? 그것부터 말해 봐.”

나는 오늘 딱히 애들에게 어디서 논다고 얘기해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누구와 노는지도 말이다. 그런데 반휘혈은 대체 어떻게 나를 찾아온 건지 궁금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대답해 주기 전까진 절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강경한 태도를 갖추며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반휘혈은 꿋꿋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고집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숨겨 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대답 안 하면 네가 나 스토킹 했다고 오해해 버린다? 어? 진짜 그래 버릴 거야?”

“……!”

내 강수에 반휘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내 말에 입을 달싹이더니, 눈썹을 찌푸리곤 그 무거운 입을 드디어 열어 주었다.

“…아냐.”

“응?”

“스토킹은, 아니라고.”

그 말을 내뱉고 난 후,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곤 그는 코트의 주머니를 뒤지더니, 핸드폰을 꺼내 조작하곤 내게 건네주었다.

“……어?”

얼결에 받아 들고 확인하자, 그 내용은 단체 채팅방이었다. 이게 뭔가 싶었던 나는 의아하게 내용을 살펴보곤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어? 고찬영이 왜 여기에…? 아니, 얜 왜 사진을 여기에…?!”

그가 보여 준 채팅의 내용은 이러했다. 오늘 나와 친구들이랑 노는 걸 자랑으로 시작한 고찬영의 말에 아이들이 나랑 노는 게 그였냐며 놀라움과 부러워하는 내용이 잇따랐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내가 잠시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며 목도리에 말려 있던 사진에서는 내가 애벌레가 되었다며 웃고 있었고, 삐져 있었던 사진이 올릴 때는 고찬영의 웃음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시피 할 정도였다.

“…….”

고찬영 이 자식, 아까 이상하게 웃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던 건데…!! 설마 뒤에서 이렇게 놀고 있을 줄이야! 아니, 그보다 이 자식 친화력 뭔데?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얘네들 사이에 끼어 있는 건데?? 나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꾹 참고 가장 중요한 점을 물었다.

“그래서 이걸 보여 준 이유는…?”

설마 노는 게 부러워 배 아파서 찾아왔을 것 같진 않았다. 반휘혈은 기본적으로 노는 걸 방관하는 스타일에 내가 다른 애들이랑 노는 것에 대해 그리 질투하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반휘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진 하나를 툭툭, 두드렸다. 그것은 고찬영이 내가 애벌레가 되었다며 즐거워하던 사진이었다. 이게 뭔데, 라는 시선을 곧장 돌려주자, 반휘혈이 사진을 확대해 어느 한 곳을 비췄다.

철이 분식.

“…….”

그것은 메뉴판이었다. 그것도 선명히 식당의 상호가 적힌 메뉴판 말이다. 나는 그 정체에 흔들리는 동공을 참지 못하고 홀린 듯 반휘혈을 올려다봤다.

“너, 설마… 이거 보고 온 거야?”

“…….”

반휘혈이 내 질문을 회피하듯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런 그를 어이없단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새하얀 피부가 조금 상기되었다. 아무리 철면피인 그라도 부끄럽긴 부끄러웠나 보다. 나는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을 이었다.

“그럼 왜 왔는데…? 오늘 중요한 행사 있었잖아.”

그것도 그의 유일한 보호자나 마찬가지인 형의 회사 개업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몰래 빠져나와 나를 만나러 오다니… 미친 게 아닐까? 내 얼굴이 저절로 떨떠름해지려 할 때,

“…들으면 또 화낼 거잖아.”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