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26화 (126/306)

126.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12)

“어쭈. 너도 켕기는 게 있나 보다?”

그의 말에 헛웃음을 내뱉으며 인상을 살풋 찡그렸다. 겨우 입을 열었나 싶었던 반휘혈은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화 안 낼 테니깐 말해 봐.”

정말이지, 나중에 이 녀석 형을 보게 되면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는 누나 하나 때문에 중요한 자리를 과감히 빠지는 동생이라니. 그의 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유를 안 들을 수도 없었기에 난 조금 양보를 하기로 했다. 한 수 접어 주며 기다리고 있자, 잠시 뜸을 들이던 반휘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또 나보고 뭐라 할 거면서.”

“아니, 안 한다니까.”

“정말 오해 안 할 거야?”

“…안 해! 안 한다고! 안 할 테니까 좀 말해 봐!”

끝없는 의심에 결국 참다못해 터진 난 발끈하며 외쳤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의 말 중에 중요한 부분을 하나 놓쳤음을 깨달았다.

‘어, 잠깐만. 방금 오해라고…?’

나는 그의 말을 되묻기 위해 황급히 입을 열었으나, 반휘혈이 더 빨랐다.

“보고 싶어서 왔어.”

“……어?”

“누나 사진을 보니까, 보고 싶어져서 왔다고.”

“…….”

자연스레 입이 닫혔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아아아아악!!!!’

듣지 말 걸 그랬다. 차라리 모를 걸 그랬다. 어떻게 들어도 오해를 쌓게 하는 그의 발언에 나는 머리를 싸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럼에도 반휘혈조차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하기 싫어했던 걸 억지로 꺼내게 만든 주범이 나였기에 그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반휘혈 그 자신도 오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쓰으읍…. 그, 그래. 그랬구나. 어….”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억지로 수긍하는 것뿐이었다. 차마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을 흐리고 있자, 내 눈을 피하고 있던 반휘혈이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흩트렸다.

“걱정 마. 이젠 안 할 거니까.”

“응?”

난데없이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 버렸다. 나는 놀란 마음에 그를 동그랗게 쳐다보자, 반휘혈이 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누나 난처하게 안 만든다고.”

“어….”

멍하니 입이 벌어졌다. 반휘혈은 그런 날 힐끗, 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러곤 볼일이 끝났다는 것처럼 먼저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잠시 동안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깊게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나는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스스로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추운 공기에도 불구하고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건 기분 탓일 거다. 나는 고개를 벅벅 쓸며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뒤늦게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

“재-밌-었-다-!”

노래방을 나오며 이혜인이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외쳤다.

“아~ 나 완전 배 끊어지는 줄 알았잖아. 완전 웃겼어.”

고찬영은 다시 생각해도 재밌었던지 입을 가리며 자꾸만 피실피실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이번 노래방은 진짜 미친 듯이 웃은 것 같았다. 초반엔 서로의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건 처음이라 나와 이혜인이 쭈뼛거리길 잠시, 곧 금세 고삐가 풀려 버린 우리는 왁자하게 노래를 불러 젖혔다. 고찬영이 우리에게 휩쓸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다 화룡점정으로 탬버린을 치던 안경희를 끌어들여 노래를 재촉하자, 용기를 낸 안경희가 곡을 선택했다.

노래방 내에서 울려 퍼지는 익숙한 멜로디.

그 정체를 깨닫곤 우리는 모두 쓰러졌다. 그녀가 고른 곡은 바로 ‘비행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동요 말이다. 나는 터진 웃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용기를 낸 그녀가 너무 대견해 마이크를 들어 함께 불러 주었다. 그리고 그 장면은 고찬영의 핸드폰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필시 그 단체 채팅방에 영상이 올라갔겠지, 하고 추측도 해 본다.

지잉-.

[한도훈(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으아! 치사해! 나도 놀 줄 아는데!!!]

[누나 다음번엔 저도 갈래요!!!٩(๑`^´๑)۶٩(๑`^´๑)۶٩(๑`^´๑)۶]

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한도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는 그 문자를 보곤 피식, 웃으며 시험 끝나고 가자고 대답했다. …말하고 나니 슬프게도 눈앞에 드리워진 현실이 보였다. 노는 건 정말 오늘까지였다. 모의고사는 망했다 쳐도 중간고사가 몇 주 안 남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쓰디쓴 현실을 지금은 잠시 외면하기로 하고 핸드폰을 닫았다. 그러다 신나게 떠들고 있던 고찬영과 이혜인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안경희를 발견했다. 그녀도 이번 노래방이 재밌었던 모양인지 얼굴을 잔뜩 상기시킨 채였다. 그 모습이 왠지 흐뭇해져 웃고 있는데, 그녀가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마주친 시선에 내가 반사적으로 더 웃어 주자, 흠칫하며 몸을 떨던 그녀가 돌연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이, 이나 랩 엄청 잘하더라! 멋졌어…!”

“오, 맞아, 맞아. 기대 이상이었어.”

“그~치~? 우리 이나 랩 진짜 잘하지~?”

“왜 네가 뿌듯해하냐.”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칭찬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혜인이 자기 일인 것마냥 흐뭇해하자, 고찬영의 타박이 이어졌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내 팔에 팔짱을 끼며 자꾸만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그 와중에 고고한 반휘혈은 결국 노래 한 곡도 안 부르셨네. 거참, 비싼 도련님일세~.”

고찬영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진심으로 타박하는 것이 아닌 장난으로 보였으나, 나는 그런 그에게 애매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그가 노래를 안 부르는 건 아마 내 탓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기분이 별로 좋질 않았나.’

괜히 미안함이 차올랐다. 자기 딴에는 나름의 표현이었을 텐데, 이상하게 몰아갔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계속 방치할 순 없었지만, 이렇게 애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 건 좋지 않았던 게 아닐까 자꾸만 후회가 되었다.

“난 원래 안 불러.”

“……응?”

그때, 차가운 반휘혈의 대꾸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반휘혈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감흥 없는 얼굴로 고찬영을 지나치고 있었다.

“거참, 더럽게 비싸구만?”

고찬영은 툴툴거리는 말이 들려왔으나,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방금 들었던 반휘혈의 말을 다시 속으로 되뇌었다.

‘안 부른다고? 근데 작년에 나랑 왔을 땐….’

아. 나는 퍼뜩, 떠오른 사실에 인지하지 못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때 비록 내가 한 곡이라도 불러 달라며 사정사정해서 불러 준 것이긴 하였지만, 그 입장에선 그것조차 꽤나 드문 경우일지도 몰랐다. 나는 혹시나 싶어 한도훈에게 물었다.

[도훈아, 너 휘혈이가 노래 부른 거 본 적 있어?]

지잉-.

답은 금세 날아왔다.

[아뇨?]

[설마 걔 노래 불렀어요?!]

나는 그 대답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도훈에게 아니라고 대답해 준 후, 난처히 머리를 긁적였다.

‘너를 진짜 어쩌면 좋냐.’

아무래도 상상 이상으로 반휘혈에게서 나란 존재는 굉장히 큰 것 같았다. 그것도 꽤 오래전부터. 저 고집쟁이가 내 부탁이란 이유로 한 수 접어 준 것도 모자라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은 해 준다니.

정말이지, 이러니깐 내가 물러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반휘혈에게 다가갔다. 반휘혈은 내가 곁에 다가온 걸 눈치챘으면서도 눈길 하나 주질 않았다. 단단히 토라진 것 같은 그의 행동에 그 몰래 작게 미소를 짓다가 입을 열었다.

“휘혈아. 나, 너한테 또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

내 말에 이번엔 또 뭐냐는 듯한 질린 시선이 닿아 왔다. 하지만, 나는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며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너희 집, 집들이해도 돼?”

역시 이럴 땐 그의 호의에 대해 보답해 주는 방법밖에 없지 않겠는가. 자고로 집을 방문한다는 건 그 사람과의 친밀함을 보여 주는 것이나 증표나 마찬가지! 어차피 이젠 원래 살던 집이 아닌 형과 같이 산다고 하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원래 남자들만 사는 곳에 여자가 함부로 가는 게 아니긴 했지만, 이 녀석이 당당하게 여자로 보지 않고 있다고 하니 난 그 말을 믿어 준다는 증거를 내보이기 위함이기도 했고 말이다.

“집, 들이….”

반휘혈은 내 말을 잠자코 중얼거렸다. 그러곤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승낙에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좋았~으! 그럼 나중에 괜찮을 때 알려 줘.”

“응.”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분위기가 방금보다 나아진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싸늘하게 굳어져 있던 낯이 조금 풀어져 있었다. 나는 왠지 그 모습이 귀여워 웃는데 뒤에서 불쑥 누군가가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어이쿠, 둘이 무슨 얘길 그렇게 주고받으실까~?”

“음…. 비-밀.”

고찬영이 내 몸에 자신의 체중을 은근슬쩍 실으며 대답을 장난스레 독촉했다. 그래서 나 또한 짓궂게 넘어가자 고찬영이 피식, 웃고는 내 몸에서 자신의 몸을 떼어 내며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참, 둘 사이를 알다가도 모르겠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남들이 보기엔 우리 둘의 사이가 참 이상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단언했다. 반휘혈은 이 세계에서 내가 외면하기 힘들 정도로 중요한 존재가 되었음을.

“뭐, 얘가 내 아끼는 동생인 건 확실해.”

어쩌면 그가 원했던 동생의 위치인 서이수만큼이나 그 위치가 강고히 다져졌음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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