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13)
이 말을 하자 반휘혈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눈을 마주해 주니 평소보다 들떠 보이는 그가 있었다.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그의 주위가 퐁퐁거리듯 밝은 기운을 내뿜는 걸 보면 지금 꽤나 기분이 좋은 게 틀림없었다.
‘역시 이런 부분이 참 귀엽단 말이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던 중, 문득 궁금한 점이 하나 떠올랐다.
“아, 근데 휘혈아. 너 아까 그 몰카… 아니, 영상 찍던 놈 잡았던 건 뭐야? 알고 있었어? 아니면 우연?”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히게 등장했던 게 신경 쓰였다. 도착한 타이밍도 그렇고 너무 적절하게 몰카범을 잡은 게 떠올랐다. 아직까지 몰카범이란 단어가 널리 퍼지진 않아 혹시나 이해를 하지 못했을까 싶어 설명을 덧붙이며 묻자 반휘혈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우연.”
그러곤 살풋 이마를 찌푸리며 말을 더 이었다.
“누나 발견하니까 다른 골목 쪽에서 수상하게 찍고 있는 놈이 보여서.”
“아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냅다 발로 걷어차 버린 거였구나? 반휘혈의 훌륭한 처사에 만족스레 수긍하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어.”
그러자 반휘혈은 입을 앙다물더니, 시선을 내가 있는 쪽과 반대로 돌려 버렸다. 순간 뭔가 싶었으나, 곧 그의 귀가 붉어진 걸 발견했다.
“크흡.”
그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죽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추운 공기 탓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생각을 믿으며 목에 두르던 목도리를 풀어 반휘혈에게 건넸다.
“자, 추우니까 이거 둘러. 귀 빨갛다.”
물론 나도 춥긴 했지만 그렇게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옷만 보면 반휘혈이 가장 얇았다. 두꺼운 코트를 챙겨 입긴 했으나, 턱도 없을 터였다. 장난도 칠 겸 감기 예방도 생각할 겸 목도리를 건네자 반휘혈은 잠시 나를 흘긋 보더니, 말없이 목도리를 가져갔다.
“좀 낫지?”
내 목도리를 대충 두르고 있던 반휘혈에게 묻자, 그는 조금 뒤늦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뒤에서 나직하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고찬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별다른 반응 없이 나와 반휘혈을 느린 시선으로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누나랑 동생?”
그러곤 입 안에서 그 단어들을 되뇌는 것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무언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게 무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내 시선이 자연스레 가늘어져 그를 보고 있는데, 고찬영은 마침 상념을 마쳤는지 나와 다시 시선을 마주하곤 싱긋 웃어 보였다.
“…뭐야?”
“뭐가?”
“무슨 생각한 거야?”
“아무것도?”
미심쩍어서 바로 캐묻자 고찬영이 능구렁이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나는 그 모습에 입을 불만스레 다물었다. 고찬영은 그런 내 어깨를 잡고 능청스레 꾹꾹 밀었다.
“이런, 이런. 우리 친구님은 갑자기 왜 이러실까~ 뭔진 모르겠지만 기분 풀어~.”
“나 안 삐졌어.”
“그래, 그래. 우리 단 거나 먹으러 갈까? 기분 안 좋을 땐 단 게 최고야.”
“나 안 삐졌다니까?!”
“하하, 마침 이 근처에 유명한 크루아상 맛집이….”
반박하는 내 말은 전혀 안 들리는지 고찬영은 나를 무시하며 자기 갈 길을 재촉했다. 덕분에 내 얼굴이 부루퉁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무슨 애인 줄 아나!’
난데없는 애 취급이 불쾌해진 나는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 실제론 나이 차가 고찬영 이놈 나이만큼 벌어진 수준이다 보니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왠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나는 민망해진 볼을 훔치며 조용히 고찬영이 이끄는 디저트 카페로 향했다.
***
고찬영의 추천으로 들어간 카페의 크루아상은 확실히 맛있었다. 거의 모든 종류를 섭렵한 우리는 뿌듯하게 가게를 나왔고, 그 이후 오락실에 들렀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게임을 하다가 우연히 익숙한 게임 하나를 마주했다. 그것은 바로 철권이었다. 그래서 나는 곧장 반휘혈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반휘혈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우리들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와자아~!!!!”
“…….”
두 손을 번쩍 들며 내가 승리의 함성을 외쳤다. 반휘혈은 자신의 패배가 믿기지 않는 것처럼 조작기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 나는 피식피식 흐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반휘혈에게 이죽거렸다.
“후후후. 지난번에 처참히 발린 그 서이나는 더 이상 여기에 없다 이 말씀이라고? 정진하시지요. 반휘혈 씨~?”
그동안 도방중 애들 데리고 틈틈이 연습한 보람이 있을 정도였다. 지난날의 노력에 대한 성취가 드러나자 뿌듯함이 넘쳐흐르다 못해 거만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훗. 이 정도면 프로 노려도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사실 그 정도까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 반휘혈을 이겼다는 사실이 굉장히 자존감을 높게 만들었다.
“오, 그럼 친구님, 나랑도 해 볼까?”
한창 승리의 도취감에 코가 하늘을 찌르던 중,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고찬영이 도전을 걸어 왔다. 물론 난 그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결과는,
“아~! …져 버렸네.”
당연히 고찬영의 패배였다.
“하. 그 실력으로 나에게 이기려면 10년은 멀었다.”
나는 시건방지게 눈썹을 모으며 고찬영을 비웃었다. 고찬영은 내 표정을 보더니, 으엑, 하고 질린 감탄사를 내뱉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친구님, 거만한 건 좋지 않아~. 그러다가 한방에 처발리면 진짜 쪽팔릴걸?”
“오, 그건 경험담?”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심술궂게 물었다. 옆에서 내가 게임하던 걸 지켜보던 이혜인마저 순간 내 얼굴을 보곤 질색하며 고개를 젓는 걸 보면 지금 내 표정은 심히 재수 없어 보였을 거였다. 그만큼 난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곧이어 당연히 이런 내 거만한 말에 고찬영도 맞춰 대응해 줄 거라 여겼다. 그런데,
“…….”
고찬영의 눈이 한순간 커지며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 표정에 나도 덩달아 놀라 바라보니 그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내 경험담.”
담담히 말하며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가 일어섰다. 그러곤 내게 다가오더니 가볍게 내 이마를 툭, 쳤다.
“그러니깐 그렇게 거만하게 굴다간 큰코다친다~.”
히죽, 그가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은 평소 흔히 봐 온 그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물었다.
“너, 누구한테 진 거야.”
“누구긴. 네가 알고 모두가 아는 최강혁….”
“거짓말하지 마.”
고찬영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능청스러웠던 그의 기색이 한순간 경직됐다.
“이, 이나야. 갑자기 왜 그래…?”
이혜인이 불안한 듯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가 감당이 안 되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잠시 보다가 반휘혈에게 눈짓했다. 잠시 이 아이들을 봐 달라는 신호를 주자 반휘혈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혜인과 나와의 사이를 거리를 벌리듯 서는 모습에 나는 반휘혈에게 고맙다고 작게 속삭이며 고찬영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끌고 나왔다.
“다시 물을게.”
물론 고찬영의 말대로 그가 처참히 졌다고 한 대상이 최강혁일 수도 있었다. 내막이 어떠하든 간에 이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는 내가 그간 봐 온 이제껏 최강혁에게 별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나치게 산뜻해서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말이다.
그렇지만 방금 한순간에 내비쳤던 그 감정은….
“너, 누구한테 진 거야.”
더 복잡한 무언가, 였다. 동시에 나는 어쩐지 그게 무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렇게까지 알고 싶은 건데. 평소엔 내 과거 같은 거 별로 궁금하지 않았잖아? 앞으로도 그렇게 넘어가도 될 일이야.”
그의 담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길이 나를 향해 왔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그냥 넘길 수 없어.”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미련과 집착, 그리고 끝내 포기한 체념과 수치와 좌절.
“왜?”
그것은 한때 내 온몸을 덧칠하고 덧칠해 자승자박으로 이끌었던 감정이었으니까.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서.”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친구님.”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던 고찬영이 나직하게 나를 불렀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다음 살짝 뜨며 내 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그러곤 내 얼굴과의 두 뼘 정도의 거리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친구님은… 나와 선을 넘고 싶은 거야?”
나는 그의 말에 휘둥그레 눈을 떴다.
“…뭐?”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달싹거리길 잠시, 나는 더듬더듬 그에게 물었다.
“선을 넘는다니…?”
“…무자각인가.”
알고는 있었지만 질이 나쁘네. 그의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왠지 먼발치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 와닿지 않았다. 내가 멍청하게 그를 보고 있자, 고찬영은 진지한 시선으로 눈을 내리깔며 내 뺨에 닿을 듯 말 듯 손을 올렸다.
“친구님.”
“…….”
“오해하게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그의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닿을 듯하던 손끝의 온기가 사라졌다.
“…친구님도 조심하는 게 좋아.”
그가 나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나, 이래 봬도 굉장히 쉽거든. 특히, 너처럼….”
고찬영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웃음을 덧그리더니, 언제 나와 가까워졌냐는 듯이 한순간에 멀어졌다.
“아무튼 그렇다고~ 조심 좀 해 줘~.”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언제나처럼. 방금 있었던 그는 없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되는 걸까, 나는 입을 달싹였다.
“…….”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무언가라도 말하는 게 좋았을까? 네가 말하는 선이 뭔지 모르겠다고, 쉽다는 말이 무어냐고, 특히, 나처럼…이라니, 그 뒤에 할 말이 무엇이냐고. 묻고픈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알 수 없더라도, 그 하나하나의 질문의 무게가 평범치 않다는 것을, 그것만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택한 건 역시 침묵밖에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