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14)
“…뭘 그렇게 기죽어 있어! 친구님답지 않게!”
팡-! 하고 가벼운 타격음이 내 등에서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해 고찬영을 보자,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아니, 오히려 능글맞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친구님은 가만 보면 단순한가 싶다가도 생각이 많아 보여. 너무 쓸데없는 곳에 머리를 쓰는 게 아닌가 몰라~.”
“…하지만,”
“그러니까 친구님이 공부를 못하는 거야.”
나는 뭐라 말하려다 말고 움찔, 하고 몸에 제동을 걸었다.
“…방금 뭐라 했냐?!”
아니, 이 새끼가 갑자기 아픈 곳을 푹 찌르네?? 분노를 넘어 황당해질 지경이었다. 내가 눈을 부릅떠 그를 노려보고 있자 고찬영은 파앗, 하고 미소를 환히 지었다.
“그래, 친구님은 그 모습이 가장 보기 좋아.”
“……어?”
그 말에 화를 내다 말고 얼떨떨해진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저 녀석 분위기가 너무 휙휙, 바뀌어서 따라가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속마음을 파악하기 어려운 놈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고찬영이 몸을 돌리며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이며 태평히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친구님의 관심은 나쁘지 않았어. 그러니 상으로 하나 알려 줄게.”
그리고 그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내게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태우야.”
“정태우…?”
익숙한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왜 그 이름이 여기에….
“…아.”
나는 곧 그가 그 이름을 꺼낸 이유를 깨달았다. 고찬영은 내게 알려 준 것이다.
‘맞아. 내 경험담.’
한순간 비쳤던 혼잡한 감정. 내게 익숙했던 그것을 네 얼굴에, 네 마음에 새겼던 것이 바로, …정태우였구나.
고찬영은 말이 사라진 나를 말없이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제 들어갈까?”
나는 그 말에 눈을 가만히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은 묻고 싶었다. 그렇게 열을 올리며 타인과 싸우려던 네가 어째서 그렇게 깔끔하게 포기했는지. …하지만, 그것을 지금 묻는 건 겨우 대답을 내놓은 너에게 못 할 노릇일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 답을 묻는 것을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언젠가, 언젠가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을 때가 오기를.
나는 그의 친구로서, 그가 스스로 이야기를 해 줄 그때를 기다리는 걸 선택했다.
‘그보다 정태우라….’
요즘 들어 자주 들려오는 이름이었다. 내가 느꼈던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 이가 그 정태우라…. 나는 그 낯익은 이름을 곰곰이 되짚었다. 그러다 이내 가벼이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아니겠지.’
내가 아는 그 녀석일 리가 없다. 사지로 몰려드는 미련을 가벼이 털어 내며 나는 사라진 고찬영의 뒤를 쫓아 다시 건물 안으론 들어갔다.
***
주말이 지나고 다시 평일이 찾아왔다. 학교는 여전히 아이들의 북적임으로 시끌벅적하였고, 내 뒷자리는 특히나 더 그랬다.
“찬영아, 주말에 뭐 했어~?”
“나야 친구랑 놀았지. 꽤 재밌었어.”
간드러지는 여학생의 목소리에 내 목에 저절로 소름이 돋았지만, 태평히 말을 주고받는 고찬영의 대답에 왠지 기분이 복잡해졌다. 평소라면 그냥 ‘어휴, 오늘도 어장 관리를 시작하는구만.’ 하면서 혀를 내둘렀겠지만… 어쩐지 주말 이후로 고찬영을 평소처럼 대하기가 꺼려졌다.
…사실 이번 건은 내 잘못이 커서 그랬다. 말하기 싫다는 놈을 자꾸만 들쑤신 것도 모자라,
‘친구님은… 나와 선을 넘고 싶은 거야?’
…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그 말에 대한 의미를 곰곰이 떠올렸다. 침대에 누워 진정된 상태로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해답이 금세 찾아왔다.
‘미친 거 아니냐, 서이나…!!’
나는 뒤늦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리 그때 당황해서 머리가 둔해졌다곤 해도 그렇지, 그때 그 말은 심하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정확히는 연…애, 적인…! 그런 의미로…!!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을 순 없었다. 그때 차라리 입을 다물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아무 말이라도 꺼냈으면 진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앞으로 조심, 또 조심해야 돼.’
고찬영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는 꽤 쉬운 사람이라고. …솔직히 믿기 어려운 얘기였지만, 고찬영은 날 여, 여자…! 흠흠!! 아무튼 그런 시선으로도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왠지 그간 고찬영이 내게 해 왔던 모든 행동들이 떠오르는 건 덤이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사귄 친구라고는 해도 남들에 비해 차별을 두던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나… 그렇게 매력이 없는 건 아닌가…?’
으아아…!!! 그것을 깨닫자, 나는 베개를 퍽퍽 때리며 침대 위를 굴러다녔었다. 그리고 그것은 교실에 있던 지금도 당장이라도 책상을 두드리고 싶은 걸 주먹을 꽉 쥐며 참아야만 했다.
어떡해, 어떡해! 미쳤나 봐! 고찬영이 날 좋아한대…!!
나는 흥분해서 날뛰고 싶은 걸 억눌렀으나, 비죽비죽 솟는 입꼬리는 막을 수가 없었다. 주말 내내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그런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는 거 자체가 이미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 부분은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글러 먹었다고 생각했던 연애 플래그가 드디어 나에게도…!
“큽, 크흑, 크흐흫…”
“이, 이나야…?”
그 사실을 떠오르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그러자 안경희가 흠칫 몸을 떨며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시선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풀어지는 근육을 두 손을 붙잡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아니, 아니지. 정신 차려. 서이나. 너랑 쟤랑 나이 차가 얼만데….’
나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곧장 냉정한 현실을 떠올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내 머릿속으론 그동안 타인과 나와 차별점을 확실히 두었던 그의 행동이 떠올랐다.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 고찬영. 나를 무시하면 바로 정색하는 고찬영. 먹을 게 생기면 무조건 나부터 챙기던 고찬영. 내가 어딜 가든 따라오던 고찬영. 나와 더 친해지고 싶어 하는 고찬영.
그에게 있어서 나는 모든 게 전부 특별 대상이었다. 그 사실이 침착하게 정돈하던 마음을 다시 어지러이 흐트러뜨렸다.
‘아, 뭐, 다른 세계의 나면 몰라도…! 이 세계의 나는 얘랑 동갑인데 그리 이상한 건 아니지 않을….’
짝-!!
“이, 이나야???”
“아. 얼굴에 뭔가 벌레가 달라붙은 기분이 들어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양심이 없었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뺨을 강하게 후려치며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그런데 너무 강하게 쳤던 모양인지 안경희를 깜짝 놀라게 하고 말았다. 나는 민망함도 들었으나, 최대한 능청스레 뺨을 아무렇지 않게 문지르며, 경악하고 있는 안경희에게 적당히 핑계를 건넸다. 안경희는 내 말을 듣고는 눈을 깜빡이며 좀 의아한 듯싶었으나, 곧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 확실히 오늘은 날이 좀 풀리긴 했으니까 벌레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게. 어우, 진짜 싫다~.”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안경희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나야, 혹시 벌레 좋아해?”
“아니? 갑자기 왜?”
벌레 좋아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다고. 내가 파브르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뜬금없이 저 말은 왜 하는 걸까 싶어 바라보자, 그녀는 눈을 데록 굴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그것치고는 너무 조, 좋아하는 것 같아 보여서. 틀렸다면 미안….”
“…….”
…아니, 그 정도로 내 얼굴이 가관인가? 나는 내 양 뺨을 붙잡고 꾹꾹 눌러 대며 근육 마사지를 했다. 그리고 손끝에서부터 입꼬리가 다시 비죽 솟으려는 게 느껴지자 나는 검지로 그것을 억지로 끌어 내리며 눈을 꾹 감았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코로 깊게 내쉬며 주말 동안 계속 해 왔던 이 복잡한 상념을 정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래! 나는 고찬영이 나 좋다고 한 게 존나 좋아. 존나 좋다고-!!!’
서른 살 인생에도 없던 인연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도 그딴 건 개나 준 연애 전선! 누가 날 좋아해 준다는 게 처음인 것도 모자라 그 고찬영이 날 좋아한다고 한다.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만약, 있다면 진심으로 왜 싫어하냐고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고찬영이 얼굴 잘생긴 건 당연 탑급이라 말해 봐야 입이 아픈 부분이었다. 그는 남들에겐 어딘가 싸늘한 부분이 있어도 나에겐 한없이 젠틀한 놈이었고, 게다가 싸움도 잘하며, 일 터지면 집안이 막아 줄 정도로 좋은 경제력까지 갖췄다. 따지면 따질수록 호감을 가져도 부족하지 않은 놈이었다.
솔직히 간간이 그가 한 행동에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고찬영은 취향 파괴자란 별명에 걸맞게 정말 난 놈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철저하게 무시하긴 했지만…!
그건 고찬영이 내게 관심 있다는 걸 모를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좀 달랐다. 솔직히 나이만 아니었다면 그걸 깨닫자마자 내가 한발 먼저 대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내 양심의 벽은 너무 높았기 때문에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삭이는 중이었다.
‘아, 뭐~ 성인 되어서도 좋다고 하면… 새, 생각해 볼 만도….’
나는 헛기침을 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스스로가 너무 쉬운 인간이 아닌가 염려가 되었지만… 고찬영은 그만큼 내 기준에서, 아니, 남들 기준에서도 괜찮은 아이였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저렇게 서슬 퍼렇게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스스로의 생각에 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찬영아, 누가 너 부르는데?”
“응?”
반 아이 하나가 고찬영을 불렀다. 그 말에 내 시선도 자연히 교실 문으로 향했다. 거기엔 웬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 한 명이 서 있었다.
“음?”
그리고 나는 그 여자아이를 보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뭐지? 왜 얼굴이 익숙하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와중, 고찬영이 뒤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쁜 아가씨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을까?”
그리고 여자아이 앞으로 가더니, 그는 평소와 같이 플러팅 아닌 플러팅을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근데 쟤는 왜 저렇게 저런 말을 잘하는지 몰라. 나한테는 저런 말 한 번도….
“어…?”
문득,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러고 보니, 고찬영은 나한테 저런 말을 했던가…?
‘아, 아니, 귀엽다는 말은 했었…, 했었는데….’
어쩐지 뉘앙스가 달랐다. 그건 자연스레 튀어나온 말이었다면, 방금처럼 작업하는 것 같은 말은 아니었다.
“저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때, 여자아이가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생각을 끊고 두 사람을 보았다. 고찬영은 잠시 놀란 듯싶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처럼 예쁜 아가씨가 나를 불러 주다니, 나는 운이 좋은걸.”
그 말을 듣자 기시감이 확 퍼졌다. 동시에 퍼뜩, 하나의 회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렇게 빨리 너같이 예쁜 애를 만날 줄은 몰랐어.’
…아. 내 입에서 영혼 없는 감탄사가 인지할 수도 없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언젠가, 아니, 고찬영과 처음 마주쳤던 그날. 그가 보자마자 말을 건 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그렇게 연락이 없었어?”
그게 바로 고찬영을 보러 온, 저 여자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