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29화 (129/306)

129.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15)

“음? …아! 너구나!”

고찬영도 드디어 눈치챘는지 놀란 듯 소리쳤다.

그런데, 그 말에서 반가움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이야~, 이거 미안한걸. 내가 그동안 정말 정신이 없었거든. 미안, 미안. 근데 그때도 지금도 예쁘다고 하는 건 진심이니깐 오해는 마.”

그는 능청스레 여자아이에게 사과했다. 그러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친구님, 나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 그동안 사고 치지 마!”

산뜻한 미소였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고찬영은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그 자취를 뒤쫓다가 몸을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기댄 채 천장을 보았다.

“허….”

어쩐지 이 이후에 있을 일이 무엇일지 알 것만 같았다. 이유 모를 허무함에 두 손으로 크게 얼굴을 쓸었다.

‘내가 그렇지 뭐.’

작년에 반휘혈한테 당해 놓고도 또 김칫국부터 마셨나 보다. 뭐, 지금 당장 고백받아도 받아 줄 마음을 요만큼도 없었긴 하지만… 나는 떫어진 얼굴을 금할 수 없이 못마땅하게 책상에 턱을 괴었다. 그래, 어차피 날 이성으로 생각해 주는 놈은 없다 이거지. …쳇.

“이나야, 왜,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나는 걱정 어린 안경희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뾰로통하게 입을 삐죽였다.

***

돌아온 고찬영은 깜짝 아닌 깜짝 소식을 발표했다.

“아까 그 애랑 사귀기로 했어.”

역시. 예상했던 내용에 나는 시큰둥하게 턱을 괴며 녀석을 향해 축하해 줬다.

“어, 그래. 축하한다.”

“…반응이 너무 짠 거 아냐?”

“난 성심을 다하였다, 친구야.”

손을 대충 내저으며 귀찮다는 걸 감추지 않고 말하자, 고찬영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변하였다.

“뭐~야. 나 여자친구 사귀었다니까? 응? 앞으로 나랑 같이 노는 시간 줄어드는 거라고.”

“어차피 나 공부해야 됐는데 잘됐네.”

앞으로 귀찮게 하는 놈 한 명 줄어서 그건 좋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고찬영은 못마땅하게 입을 다무는 걸 본척만척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고찬영은 전학 오기 전부터 여자랑 스캔들이 여럿 엮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치곤 오래 안 사귄 걸지도 모른다. 시간도 4월에 접어드니 슬슬 꽃도 피겠다, 데이트하기 딱 좋겠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펴고 있는데, 뒤에서 숙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님, 오늘 기분 안 좋아? 왜 이렇게 저기압이야?”

“그, 글쎄…? 근데 아까부터 이상하긴….”

다 들린다. 이것들아.

***

“…….”

주연희는 말없이 자신의 책상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은 소리 없이 흔들렸고, 그녀의 몸은 충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죽어. 꺼져 버려. 쓰레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이 책상을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 산란한 욕들을 믿을 수 없단 것처럼 바라보던 그녀는 떨리는 눈을 방황시키다가 어느 한 단어에 꽂혔다.

거지년ㅋㅋ

“거, 지….”

떨리던 손이 강하게 쥐어졌다. 주연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상황을 점차 깨달은 그녀의 볼은 점차 수치와 분노로 벌겋게 물들어져 갔다.

“누구야….”

그녀의 조용한 분노가 나직이 터져 나왔다.

“누구냐고…!!”

점점 격앙된 감정이 그녀에게서 분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실은 그 누구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닌 것처럼 모르쇠를 일관하고 있었다. 주연희는 자신에게 닥친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악의가 가득한 괴롭힘이었다. 정체 모를 그 악의는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딴 짓거리 하니까 좋아? 좋냐고!!”

하지만, 그녀는 외쳤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 걸 억눌렀다. 이 순간은 절대 울어선 안 된다는 걸, 그녀는 살면서 깨우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정당당히, 대범하게 맞서는 법뿐이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말이다.

“…누구야?”

“몰라. 나 오기 전부터 저랬어.”

주연희의 외침에 하나둘,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 범인이라고 하는 이는 당연히 없었고, 그 정체를 아는 이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주연희는 주먹을 강하게 쥐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곤 차마 다시 보기도 싫은 그 책상을 들고 나갔다. 당장이라도 이것을 치워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

그런 그녀의 등 뒤로 따라오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는 이조차 말이다.

…괜찮아. 이런 취급은 익숙해.

주연희는 자꾸만 숙어지려는 고개를 세우려 노력했다.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자, 커다란 몸 하나와 마주쳤다. 그녀는 놀란 마음에 고개를 들자 검은 머리칼 사이에서 냉랭한 눈으로 차분히 내려 보는 한 쌍의 검은 눈이 보였다.

‘반, 휘혈…?’

그는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인 반휘혈이었다.

주연희는 예상치 못한 그와의 마주침에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마주친 책상의 흔적에 그녀는 다시 입술을 물었다. …왠지 수치스러움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는 것만 같았다. 주연희는 애써 모른 척 입꼬리를 올리며 그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 그, 이, 이나 언니랑 친한 애 맞지? 여기서 다 만나네! 하하.”

왜냐하면, 그는 서이나와 친한 사이였으니까. 그래서 더 부끄러웠으나, 그 모습을 동경하는 지인과 친한 사이로 지내는 남자아이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주연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용기를 꺼냈다. 좋아. 그렇게 이상하지 않았어. 그녀는 얼추 만족하며 대충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누나랑 아는 사이?”

반휘혈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주연희가 반휘혈을 보자, 반휘혈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표정이 없었다. 주연희는 그 서늘한 낯을 마주하자, 왠지 기가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질문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는 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주연희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나 언니한테 내가 이것저것 신세를 많이 져서…! 그러다 보니 친해졌어!”

물론 그렇게 친해진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그렇게 될 생각이었다. 주연희는 상상만으로도 기쁜 미래에 현재 자신이 처하던 상황도 잊고 히죽 웃었다. 반휘혈은 그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소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 미안. 내가 가던 사람을 붙잡고 있었네. 나도 이만 가 볼게.”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주연희는 문득 반휘혈을 오래 잡았단 생각과 동시에 어서 이 책상을 치우고 싶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깔끔하게 잊고 새로운 책상과 함께 좋은 생각만 하고 싶었다. 주연희는 스스로의 마음을 대변하듯 서둘러 사라지려 하는데,

“어?”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이 가벼워졌다.

“뭐, 뭐야?”

그 이유는 바로 반휘혈이 주연희가 들고 있던 책상을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반휘혈의 행동에 주연희는 그 커다란 눈에 당황을 물들였다. 그러나 반휘혈은 아무 설명도 없이 그것을 들고 척척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 자, 잠깐만!”

주연희는 그 난데없는 행동에 얼이 빠지길 잠시, 황급히 정신을 차리곤 그 뒤를 쫓았다. 반휘혈이 향한 곳은 5층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외진 창고였다. 그는 책상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 두며 깔끔한 책상 하나를 챙겨 다시 나왔다. 그 행동만으로 주연희는 그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내, 내가 해도 괜찮은데…!”

설마 이 차가운 남자아이한테서 이런 호의를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질 못했다. 주연희는 당황해서 반휘혈의 주위를 맴돌며 난처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들어줄 반휘혈은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왜 반휘혈은 평소와 달리 이렇게 타인에게 후한 행동을 해 주는가. 놀랍게도, 아니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서이나.

그가 움직인 이유는 바로 그녀 하나뿐이었다. 반휘혈은 주연희가 서이나와 아는 사이, 그것도 친하다는 말을 듣고 떠올린 건 바로 지난 주말이었다.

반휘혈은 지난 주말, 서이나가 친구와 노는 모습을 보는 걸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친구와 지내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지게 만들 정도였다. 반휘혈 자신이 알기론 서이나의 교우 관계는 여자 쪽으론 협소하기 그지없었다. 남자가 남자를 친구로 사귀기 편하듯, 여자도 여자를 친구로 사귀기 편하다는 걸 그는 새삼스럽게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반휘혈은 주연희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누나가 더 즐거워했으면 좋겠다, 라고.

자신의 삶은 그녀로 인해 개벽을 맞이했다. 자신은 그렇게 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게 불만스러운 일이었으나, 서이나가 행복했으면 하는 일엔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반휘혈은 그녀의 교우 관계가 원활하길 원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즐거운 미소를 또 지어 주겠지.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는 누가 보아도 질이 낮은 괴롭힘을 당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이 여자애와 서이나가 마주치면 서이나의 기분도 당연히 안 좋아질 터였다. 그녀는 자기 사람에게 지나치게 여린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까닭으로 반휘혈은 주연희를 도와줬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단순한 이유였으나, 그 동기에 비롯된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반휘혈은 자신의 감정의 무게를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인생을 바꾼 이를 향한 당연한 감정이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따윈 있을 수 없기에. 그는 서이나가 즐거울 수만 있다면 뭐든 해 주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사소한 도움으로 조금이라도 영향을 준다면, 그는 언제든 발 벗고 나설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주연희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소문으론… 피도 눈물도 없고, 인정머리도 없다고 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주연희는 두 눈을 크게 깜빡이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사실 그리 틀리지 않던 소문이었으나, 사정을 모르는 그녀의 입장에선 오해가 자연스레 쌓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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