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30화 (130/306)

130.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16)

***

점심시간이 되었다. 이 시간이 되면 으레 그렇듯 모든 학생이 들뜨기 마련이었다. 그중엔 나도 포함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떨떠름한 낯으로 반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

“점심시간…? 아, 입맛 없어….”

어둡다. 심하게 어둡다. 음울한 목소리가 밤이 찾아온 것처럼 실내를 더 어둑하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어두운 교실에 혹시 조명이 꺼졌나 확인해 보았으나, 조명은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누…! 뭐, 뭐야….”

그때, 반의 문을 벌컥 열며 찾아온 서이수가 교실 내의 분위기에 식겁하며 움찔거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같이 따라온 이재현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내게 다가와 조심스레 속삭였다. 나는 그 질문에 쓰게 웃으며 뒷자리를 보았다.

“그럼 난 여친이랑 먹고 올 테니깐 잘 부탁해, 동생들.”

눈이 마주친 고찬영은 반짝이는 웃음을 휘날리더니, 아이들에게 나를 맡기곤 사라졌다. 그러자,

“크읏…!”

“이럴 순…! 이럴 순 없어…!”

“웬 여우 같은 계집이이이이…!!!”

교실 안 곳곳에서 신음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 사실 반을 어둡게 만드는 건 다수의 여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날벼락같이 날아들어 온 고찬영의 연애 소식에 깊은 좌절과 슬픔에 잔뜩 절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내 오아시스가아… 오아시스가아아!!!”

“내 삶의 낙이 사라졌어…. 나 요즘 걔 얼굴 보는 맛으로 사는 건데… 품절남이라니… 갑자기 의욕 확 떨어져….”

“내 마음의 준비가아악!!”

울분을 토하듯 책상을 때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들을 쓴웃음으로 지켜보다가 서이수와 이재현에게 이제 무슨 일인지 알겠지? 란 뉘앙스를 담아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수, 재현이 안녕…! 빨리 왔네??”

그때 이혜인이 쭈뼛쭈뼛 인사를 하며 내 곁으로 다가오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반의 몇 명이 엎드린 고개를 퍼뜩 들며 내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들의 얼굴이 팍, 하고 펴지며 언제 죽상이었냐는 듯 환해졌다.

‘재현이 팬인가 보네….’

곧 죽어도 서이수의 팬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속으로 그리 단정 지었다. 그래. 얘네들 얼굴로라도 기분 풀어라….

“아. 그럼 차라리 다 불러 버릴까.”

사실 고찬영은 반의 아이돌…, 아니 정확히는 2학년의 아이돌인가? 아무튼 그런 존재가 애인이 생긴 만큼 팬들이나 그를 남몰래 사모하던 아이들에게 있어서 상실감이 클 터였다. 그렇다면 아이돌은 아이돌로 상처를 치유해 보면 어떨까? 내가 알기론 반 아이들 중에 도방중 출신 애들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로는 야자 때까지 계속 될 것 같았다. 이 꼴을 하교할 때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에게 속으로 이용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도방중 애들 전원을 호출했다. 물론 밥 같이 먹고 싶은 애들만 오라고 말이다.

‘…시원이는 조금 다르게 보내는 게 좋겠지.’

갑자기 보호자 비슷한 존재가 되어 버린 그를 위해 나는 한 놈에게 문자를 더 보냈다. 그리고 5분 정도 흘렀을까.

“누우나아~!”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한도훈이 반의 문을 벌컥 열며 등장했다. 그 소리에 시체같이 엎드려 있던 여자아이들 몇 명이 움찔 몸을 떨며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헉….”

“호올리이….”

“미쳤다….”

“어, 여기 천국…?”

그리고 뒤를 보자마자 여자아이들은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찡그리며 입을 가려 댔다. 이유는 간단했다.

“…….”

“안녕하세요.”

반휘혈과 김시원도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기엔 이재현도 있었으니, 그 유명한 도방중 출신 미남들의 총집합이었다.

‘와…. 얘네들 모인 거 나도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

왠지 저들에게서 후광이 나는 건 기분 탓일까…. 나는 다가오는 세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해 줬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

“괜찮아요! 전 누나랑 같이 먹는 거 좋아요~. 매일 먹어도 괜찮은,”

“그건 내가 사양할게.”

한도훈이 눈을 빛내 왔으나, 나는 단칼에 거절하며 반을 흘긋 둘러보았다. 교실 안은 언제 어두웠냐는 것처럼 환히 빛나고 있었다. 여학생들 대부분이 입을 틀어막고 감격에 겨워하는 모습에 괜스레 뿌듯해졌다. 그리고 몇몇은 나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연신 보내와 그들에게 몰래 엄지를 치켜들어 주곤 이혜인이랑 안경희에게 말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한데 난 얘네들이랑 먹을게. 아, 아니다. 너희도 그냥 같이 먹을래?”

“아니잇…?! 나, 난 됐어…!!”

“나, 나도….”

내 제안에 이혜인이 얼굴을 붉히며 새된 소리를 내면서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경희는 같이 먹기는 심히 부담스러웠는지 창백해지며 몸을 뒤로 뺐다.

‘…응? 경희는 그렇다 쳐도, 혜인이 쟨 왜 저러지.’

저번에 고찬영이랑 반휘혈과 함께 놀 때만 해도 꽤 괜찮아 보였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설마 이렇게까지 다시 낯을 가리는 듯 유난스럽게 나올 줄은 몰랐던 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생각했다.

‘흠. 다수는 무리고 두 명까지는 괜찮았다는 건가? 아, 아냐, 근데 방금 재현이랑 이수 올 때도 좀 긴장한 것 같기도….’

어? 뭔가 이상한데? 나는 찾아든 의구심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중, 이재현이 김시원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시원아, 강이는?”

“누나가 알아서 한댔어.”

“응??”

이재현의 물음에 김시원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갑자기 거론된 내 이름에 이재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어, 맞아. 이윤한테 말해 놨어.”

사실 방금 메시지를 따로 보내 둔 건 이윤이었다. 김시원이 짐짝처럼 챙기는 서강이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윤의 대답은 빠르게 도착했다. 그의 알겠다는 내용을 앞뒤로 뒤덮은 이모티콘 폭탄인 메시지가 도착했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였다.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오늘 밥 뭐더라?”

“돈까스라던데.”

우리는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며 식당으로 향했다. 복도를 거닐면서 온 학생들의 시선을 받았지만, 이젠 익숙해졌다. 어차피 이 중에 나는 공기와도 같은 취급이었기에 그리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말이다. 새삼 지난 주말에 거리에서 받았던 따가웠던 시선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치길 잠시, 갑자기 고찬영의 빈자리가 눈에 보였다.

‘흠…. 너무 붙어 다녔나.’

그가 전학 오고부터 교내에서 떨어져 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선지 갑자기 그의 공석이 눈에 보였다. 나는 잠시 없는 그를 떠올리다가 내 곁에서 걷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얘네들도 언젠가 애인 사귀겠지….’

그 생각을 하니 어쩐지 외로워졌다. 애인 하나 생겼다고 이렇게 친구를 내팽개치다니. 고찬영이 괘씸한 한편, 외로움도 들었다. 그리고 이 아이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니 더 서글퍼졌다.

“왜 그래?”

그런 내 기분이 겉으로 드러났나 보다. 옆에 서 있던 반휘혈이 내게 조심스레 속삭여 왔다. 나는 그 목소리에 숙어져 있던 고개를 들어 반휘혈을 보았다.

‘얘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겠지….’

높은 확률로 그 대상은 주연희일 터였다. 아직 그런 기류가 전혀 보이질 않지만 그 또한 누군가를 좋아할 시기가 올 거다. 시프가 알려 준 대로라면 반휘혈은 운명의 한복판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 세계관에서 중심에 있다면, 무조건 연애 스캔들이겠지.

‘반휘혈이 누군가를 좋아한다, 라….’

정말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왠지 그 모습이 보고픈 마음도 들었다. 반휘혈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행복해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가정 환경이 그렇다 보니… 누군가를 만난다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휘혈아.”

“응.”

“너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꼭 알려 줘야 돼.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꼭 봐 줄게.”

“…뭐?”

내 말에 반휘혈이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해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더없이 진지했다. 웬 놈팡이에게 이 안타깝고 예쁜 아이를 뺏길 바에는 이 녀석의 등짝을 때려 주며 말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응?”

“엥?”

“…잠깐, 뭐라고요??”

“하아….”

그런데 앞서가던 넷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봤다. 특히, 한도훈은 정색하며 말을 걸어 왔고, 김시원은 귀찮은 걸 들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애들아. 반응이 왜 그러니?

“누나, 그걸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럼 진심이지. 거짓말이겠냐.”

“아니, 누나, 아니, 와, 아니, 하아….”

한도훈은 어디서 어처구니가 없는지 모르게 말을 못 잇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마를 감싸며 골치 아파하는 모습에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의아해하는데,

“……아니, 잠깐. 그걸 왜 쟤한테만 말해? 나는?”

가만히 있던 서이수가 불쑥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그 어이없는 말에 나는 동생 놈과 같이 얼굴을 구겼다.

“야, 넌 당연히 나한테 검사받아야지.”

얘가 아주 당연한 소리를 하네? 내가 정색하며 대꾸해 주자 서이수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뿌듯하게 웃었다.

“그렇지?”

“어? 그럼 저는요?”

“아, 당연히 우리 재현이 내가 봐 줘야지~.”

그런데 이재현도 우리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그 모습과 질문이 꽤 귀여웠던 나는 참지 못한 웃음을 입에 걸며 말해 주자, 이재현이 기쁘게 미소 지었다.

“아, 시원이도 봐 줄까?”

“음…. 네.”

생각난 김에 김시원에게도 묻자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알겠다며 수긍해 주며 고개를 돌리며 이제 진짜로 식당에 가려는데, 언제부터일지 모르게 볼을 잔뜩 부풀린 한도훈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저한텐 안 물어봐요?!”

동시에 한도훈이 불만스레 외쳤다. 나는 그런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하다가 손으로 턱을 감싸며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넌 왠지 누굴 사귈 거란 이미지가 안 떠올라서.”

“우…!”

“그리고 설령 사귀어도… 내 말 안 들을 거 같아.”

뭐랄까, 한도훈은…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저 빌딩 꼭대기 층에 다리를 꼬고 앉아 웃으면서 사람들을 꼭두각시처럼 냉정히 휘두르는 그런 이미지가 그려졌다. 그의 나르시시즘의 성향도 그렇고, 남들을 깔보는 모습이나 가끔씩 보여 주는 싸한 모습도 그렇고, 누군가를 쉬이 좋아할 거라 여겨지진 않았다. 아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일 텐데… 그 크기가 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아마 그 정도면 누가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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