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31화 (131/306)

131.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17)

“그, 으건…!”

내 마지막 쐐기에 한도훈이 마땅히 할 말을 잃었는지 입만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이 꽤 웃겼는지 서이수, 이재현은 숨죽이며 웃고 있었다.

“큽, 크흣, 아, 그건 맞아. 너 다른 사람 말 죽어도 안 듣잖아? 푸훗!”

“이, 큽, 이, 수야, 그만해, 풋.”

“…….”

“으하하!! 으얽…!”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서이수가 시원하게 웃어 젖혔고, 동시에 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도훈이 서이수를 걷어찬 소리였다. 나는 그것을 흐리게 바라보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가 반휘혈과 시선이 마주쳤다.

“응? 왜?”

언제부터 본 거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반휘혈의 입이 살며시 달싹였다. 그러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처럼 머리를 흩트리더니 휙, 하니 먼저 앞서 걸어가 버렸다.

“…쟤 이번엔 또 왜 저래?”

훅 가 버리는 그의 걸음에 나는 황망히 그의 뒤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상황을 모르는 아이들의 시선이 딸려 왔지만, 나도 할 말이 그다지 없어서 고개를 내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뜬금없게도 하교 중에서야 겨우 듣게 되었다.

“싫어.”

“…응?”

난데없이 들려오는 부정적인 말에 나는 걷던 발을 멈추고 반휘혈을 올려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

“보여 주는 거, 싫다고.”

반휘혈은 단호한 대답이 이어졌다. 어쩐지 그의 기색이 기분이 나쁜 것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 여전히 모호한 답에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이 대답이 점심시간의 연장선임을 눈치챘다.

‘…음? 잠깐.’

“왜 나한테 보여 주는 게 싫은 거야?!”

다른 애들은 다 좋아했는데! 혹시 내가 얘한테 그런 방면으로 영 못 미더웠나?! 아니, 그렇다면 정말 할 말이 없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상함에 얼굴을 울상으로 일그러트렸다.

“그냥, 불쾌해.”

…그 정도야?! 나는 얼얼한 충격에 쩍 굳어 버렸다. 내가 이렇게 돌처럼 굳어졌든 말든 반휘혈은 상관없는지 제 말을 다 마친 듯 휙, 하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덥냐고…! 너무하네, 진짜!!’

때아닌 서러움이 드는 하굣길이었다.

***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중간고사가 끝나 있었다.

“그어어….”

모든 시험을 마친 난 영혼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시험은… 대체… 왜 있는 걸까….”

넋을 뺀 채 공허하게 중얼거리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이혜인이 내 어깨를 붙잡고 칭얼거렸다.

“이나야~ 나 이번 시험 망한 거 같아~.”

“나도….”

우는 소리를 내는 목소리에 여기 망한 인간 또 있다고 알려 주자, 이혜인은 더 울상을 짓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럴 땐 역시 노래방…! 노래방이지!”

나는 그 말에 나갔던 정신을 돌이켰다.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퍼뜩 들어 이혜인에게 미안해져 눈썹을 찌푸렸다.

“아, 그거…,”

“노래방?”

그런데 목소리 하나가 내 말을 잘랐다. 범인은 고찬영이었다. 그는 있지도 않은 짐을 대충 책상으로 쑤셔 넣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을 반짝였다.

“나도…!”

“찬영아~.”

그때, 문 쪽에서 들려오는 가녀린 목소리가 있었다. 고찬영은 그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더니, 서글피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번엔… 패스.”

그러고는 재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멋있는 척 미소를 가증스레 장착하곤 자기 애인에게로 가 버렸다.

“…쟤 보기와 달리 엄청 사랑꾼인 것 같지?”

그런 고찬영을 보며 이혜인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나는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둥이다 뭐다, 세 다리 네 다리 여덟 다리 걸쳤네 마네, 여자를 금방 갈아타네, 어쩌고 하는 소문에 비해 고찬영은 꽤나 자기 애인에게 투철한 모습을 보였다. 처음엔 너무 듣던 것과 달라서 의외다 싶었으나, 그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진 것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역시 인기인은 참 피곤한 듯싶었다.

‘대충 한 달 되어 가나?’

처음엔 아이들 사이에서도 얼마 못 갈 거다, 라며 말이 많았었다. 고찬영의 소문도 소문이거니와 듣자 하니 여친의 소문도 만만찮았다고 한다.

‘우리 학교 이전 일짱…이랬나…. 걔 여친이라고 했지?’

으웩. 나는 생각과 동시에 소름이 돋아 얼굴을 찌푸렸다. 반휘혈이나 최강혁 정도면 몰라, 겨우 우리 학교 애들을 대상으로 일짱이라고 하는 게 같잖게 느껴진 탓이었다.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줄 알았는데 아직 평범한 놈들을 대상으론 아니었었나 보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그 여친에 대한 소문을 더 떠올렸다.

‘…흠. 걔 인성이 별로라고 하던데, 그냥 소문인가.’

이제껏 고찬영이 별 탈 없이 사귄 거 보면 과장된 허위 소문일지도 몰랐다. 고찬영의 말에 따르면 서울에 올라온 건 자기뿐이라고 했다. 이렇듯 타지에서 혼자 살고 있는 놈인데 이상한 애한테 걸려 상심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 말이다.

‘뭐, 정말 소문대로 이상한 아이라면….’

“누-우-나-아!!”

한참 생각에 깊이 잠겨 있을 때 내 등 뒤로 누군가가 기습했다. 깜짝 놀라 보자, 가장 눈에 띄는 건 분홍색이었다. 이 머리 색을 지닌 이는 내가 알기론 단 한 사람뿐이었다.

“왜 또 왔어….”

“우웅- 누나 보고 싶어서 와쪄염.”

“말 똑바로 해 주면 안 되겠니….”

혀가 반 토막이라도 났나, 왜 그리 짧은 소리를 내…. 소름 돋은 팔뚝을 쓸며 나는 질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윤은 별 타격도 없는지… 아니, 오히려 배시시 웃으며 내 팔을 꼭 붙잡았다.

“누나, 시험도 끝났는데 이번엔 저랑 꼭 놀아요. 네? 다른 애들은 안 부를게요.”

이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참으로 깜찍한 얼굴이 지척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게 예쁘긴 하다만. 나는 난처히 머리를 긁적이며 그에게 말했다.

“안 된다니까. 도훈이가 싫어한다고 몇 번을 말해.”

사실 이윤이 이렇게 내게 놀러 가자고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 이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하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레 친해지긴 했다만… 그렇다고 같이 놀러 갈 정도는 아니었다.

“우우- 맨날 도훈이, 도훈이. 안 봐도 뻔해요. 걔가 저 욕 많이 하죠? 걘 절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에-.”

이윤이 심통이 난 것처럼 볼을 크게 부풀렸다. 그렇게도 나와 놀고 싶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긴 했으나, 애매하게 중간에 낀 나로선 난처히 웃을 따름이었다.

‘같이 놀러 갔다가 한도훈 그 성깔을 누가 감당하는데.’

그 당사자는 물론 나였다. 그래서 한사코 거절하고 있자,

“네가 왜 여깄어? 안 꺼져?”

라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나 다를까 한도훈이었다.

“도훈이 너 때문에 내가 누나랑 못 놀잖아! 도훈이, 미워!”

“어쩌라고.”

이윤의 불평에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깡그리 무시한 한도훈은 탁탁, 이윤을 저 멀리 치우곤 나를 향해 환히 웃으며 말했다.

“누나, 저랑 한 약속 안 잊었죠?”

정말 180도로 완벽한 차별 대우였다. 나는 어처구니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노래방 약속 안 잊었어.”

지난번에 고찬영이 올린 영상 때문인지 한도훈은 시험 기간 내내 내게 시험 끝나면 노래방 가는 거 잊지 말라고 내게 으름장을 놓았었다. 그래서 잊지 않았다는 걸 알려 주자 한도훈이 활짝 웃어 보였다.

“노래방? 나도, 나도!”

“꺼져.”

멀리서 그 소리를 들은 이윤이 불쑥 끼어들려 했다. 그러나 한도훈이 누군가. 그는 보지도 않고 싸늘하게 반박했다.

“아, 혜인아. 아무튼 이런 선약이 있는데…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갈래? 물론 불편하면 다음에 가자.”

나는 그녀가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이혜인은 꼭 이 녀석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를 불편해했으니깐 말이다. 그래도 예의상 묻기라도 해 보자 싶어 물어보았다.

“…노래, 부르겠지?”

그런데 이혜인이 무언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응? 어… 노래방을 가는 거니까 당연히 노래를 부르겠지?”

얼떨떨히 대꾸를 해 주자 이혜인의 눈이 한순간에 빛났다.

“…갈래.”

“응…?”

“나도 갈래!”

“…엥?”

아니, 웬일로?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벙쪄서 바라보았다. 이혜인은 그런 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쩐지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왜 저래?’

몇 년을 함께 다녔지만 여전히 모르는 구석이 있는 친구의 모습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흔치 않게 동참을 말했기에 나는 같이 가도 되냐는 의미로 한도훈을 슬쩍 보았다. 한도훈은 내 시선을 발견하곤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에 안도하고 있길 잠시, 나는 방치되어 있던 한 놈을 떠올렸다.

‘아, 삐졌겠다.’

안 봐도 뻔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눈가에 피로가 몰리는 기분에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꾹 참고 이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흐음….”

예상과 다르게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윤이 있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골몰하는가 싶더니,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동시에 이윤이 씨익 웃어 보였다.

“…좋아! 결정했어!”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불길해졌다. 그것은 한도훈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싸늘하게 내리깔며 이윤을 노려보았다.

“무슨 꿍꿍이야.”

“네 알 바 아니거든! 흥! 누나, 전 가 볼게요! 또 봐요!”

히히, 하고 사랑스럽게 웃으며 이윤은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한도훈은 토악질이 치미는 것처럼 얼굴을 구겼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더 엮여 봤자 피곤해지기만 할 따름이었으니까 말이다.

‘…근데 왜 이렇게 불길하지?’

굉장히 찝찝하다. 이윤이 깔끔하게 사라져 준 게 좋긴 한데, 이렇게 불길한 일인가. 나는 자꾸만 기울어지는 고개를 기분 탓이라고 여기며 석연치 않은 감정을 떨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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