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18)
***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난 후회했다. 정확히는 하교 후 노래방에서.
“와~! 누나! 여기서 만나네요! 히히.”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솜사탕 때문에 말이다.
“어…. 그래….”
그렇게 반가운 듯 웃지 말아 주지 않을래…. 나는 해맑은 이윤의 인사에 떨떠름한 시선을 금할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선 이를 아득 갈며 빡쳐 있는 한도훈의 기척이 굉장히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나 놀러 온 건데?”
“그니까 왜 하필 여기냐고!”
“여기가 좋아서?”
한도훈의 말에 빈틈없이 대답하는 이윤을 보고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한도훈 먹이기 쉽지 않은데 참 대단한 아이였다. …뭐, 물론 이윤만 보면 평소보다 흥분되어 제 본실력을 뽐내지 못하는 한도훈의 문제도 있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여튼, 한도훈은 참 이윤을 한결같이 싫어했다.
“…됐어! 어차피 누나가 노는 건 우리니까. 가요, 누나.”
한도훈은 내 어깨를 꾹꾹 밀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소란을 크게 일으키고 싶지 않던 난 조용히 그 손길을 따랐다.
“누나, 또 봐요!”
나는 그 인사를 듣다가 잠깐 멈칫했다. …설마, 아까 학교에서 또 보자고 했던 말이 이런 의미였나? 소름 돋는 추측에 나는 이윤도 절대 만만찮은 놈이란 걸 깨달았다. 역시 한도훈을 상대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나 보다. 나는 닭살이 돋은 팔을 북북 문지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적당히 자리를 잡자 내 양옆으로 서이수와 반휘혈이 앉았다.
“…음?”
원래는 낯을 가리고 있을 이혜인과 안경희를 끼고 앉을 생각이었던 터라 당황해서 양옆의 두 놈을 보자 내 시선을 눈치 못 챈 듯한 서이수가 리모컨을 조작해 노래 하나를 틀었다.
“누나, 같이 부르자.”
“…예약하기 전에 묻지?”
이미 흘러나오기 시작한 전주를 들으며 황당한 시선으로 서이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이수는 대뜸 뻔뻔하게 마이크를 들며 말했다.
“싫어?”
“…누가 싫대? 그리고 당장 안 일어나냐.”
노래방은 앉아서 부르는 게 아니다. 동생아.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쪽에 있던 서이수를 빨리 밀어내며 재촉해 나가자 어느새 한도훈이 마이크를 준비해 내 앞으로 대령해 왔다.
“평소처럼?”
“평소처럼.”
서이수가 고른 선곡은 보컬과 랩이 섞인 남녀 듀엣이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익숙한 노래였다. 왜냐면, 가족 모임 때마다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었다.
“으아…! 너무 기대돼. 어뜩해, 어뜩해.”
점점 가사의 도입이 시작되려는데, 어쩐지 잔뜩 흥분한 듯한 이혜인이 곁에 있는 안경희를 열심히 때리고 있었다. 안경희는 그 힘에 정처 없이 흔들리는 안쓰러움을 연출하고 있어 한순간 동정이 일 정도였다. 내가 쓰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자, 서이수도 소란을 들었는지 그쪽을 바라보곤 재밌던지 푸핫, 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이혜인의 손이 멎었다. 그녀는 눈과 입을 크게 뜨더니 어쩐지 고장 난 것 같아 보였다.
“으음??”
그 낯선 모습을 보자, 불쑥 내 촉이 말을 걸어 왔다. 이건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라고. 나는 이혜인에게 당장이라도 뭔가 묻고 싶었지만, 가사 도입의 숫자 카운팅이 시작되는 걸 발견하곤 멈췄다.
왜냐하면, 이 노래는 도입부터 랩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뭐, 원곡은 여자가 보컬, 남자가 랩이긴 했지만 뭐든 잘 부르는 쪽이 맡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나는 줄어드는 숫자를 지켜보다가 랩을 시작했다.
***
“…와, 저 누나한테 반한 거 같아요.”
노래가 끝나자마자 한도훈이 감동한 것처럼 입을 틀어막고 말했다. 다른 노래의 전주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전혀 관심이 없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익살스러운 칭찬에 질린 듯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과장하지 마라, 좀.”
“과장 아닌데? 진짠데? 저 누나 팬이에요! 사인해 주세요!”
“어이쿠, 사인지라도 내놓는 성의라도 주시죠?”
나는 한도훈의 장난스러운 칭찬에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이혜인이 있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저 녀석 진짜 왜 저러지? 누가 보면 내 동생 좋아하는 줄…, 어?
‘설마… 혜인이 너어…?’
우리 이수 좋아하니?
나는 번쩍 드는 깨달음에 황급히 입을 가렸다. 헐. 세상에. 맙소사! 그러고 보니 쟤가 유난히 긴장하고 낯을 가리던 순간엔 모두 서이수가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에 나는 뜨악한 심정을 감추질 못했다.
‘이걸…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나는 아직 동생이 누군가를 사귀는 걸 받아들일 단계는 아니었다. 아니, 물론 누군지에 따라 환영은 해 줄 수 있지만…! 그게 내 친구라면? 굉장히 심란해진 마음에 내 이마가 자연히 심각하게 구겨졌다.
‘대체 어떤 부분에 반한 거지? 운동? 운동인가, 역시?’
원래 전공 분야를 할 때 사람은 가장 멋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이혜인이 우리 체육관에 온 적은 없던 거 같은데. 나는 다시 풀어지지 않는 수수께끼에 골똘히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나… 잠시 화장실 좀.”
그러다 도저히 해결이 되질 않아 나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밖을 나가기를 택했다. 얼굴을 깊이 쓸며 터덜터덜 나가 화장실을 가는데,
“아, 씨발. 조옷같네.”
“가오 존나 상하네. 퉤.”
웬 양아치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딱 봐도 엮이면 귀찮아질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재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냐. 생각해 보니깐 이수가 혜인이를 좋아할 보장은 없잖아.’
그렇게 되면 안타깝긴 하더라도 서먹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응원을 안 해 줄 수도 없고… 참으로 골치 아픈 난제에 끙끙거리며 화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나는 참으로 황당한 광경을 조우했다.
“야, 너희들 뭐 하냐?”
“이, 이나야…!”
눈앞에 안경희가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방금 지나친 양아치들이 시비를 걸듯 둘러싸고 있었다. …지금 이거 무슨 상황?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당장이라도 눈이 돌아 버릴 뻔한 걸 겨우 붙들며 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가 안경희를 일으켰다.
“허, 씨발. 웬 같잖게 생긴 것들이 자꾸 눈 버리게 하네.”
“아, 어깨 좀 부딪혔다고 사람 존나 무안하게 만드네? 시발. 별 병신같은 것들이 자꾸 짜증 나게 만들어.”
“어깨를 부딪혀?”
나는 그 말에 그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그럼 사과를 해.”
“내가 왜? 실수라고~ 실수. 겨우 그딴 걸로 존나 유세야, 어? 이러다가 빵까지 가자고 하겠어? 아, 부딪힌 나도 내 어깨 아프다고~. 나도 병원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 미친 새끼. 큭큭.”
“…….”
나는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즐겁게 놀자고 온 곳에서 이런 모욕을 듣게 될 줄이야. 특히, 먼저 잘못한 건 그쪽이면서 오히려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는 꼴에 머리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적당히 하고. 사과하고 좋게 좋게 끝내지?”
조금만 더 건드리게 된다면, 이젠 진짜 경찰을 불러서 CCTV까지 열어 볼 생각을 하려던 중이었다.
“하. 씨발. 도방고 새끼들은 이렇게 다 나대나?”
“아까 말 좀 걸었다고 존나 꼬나보는 년도 있더니….”
“야, 야. 그건 잊어, 씨발. 잘못 걸리면 좆 되는 건 우리야. 그 개강고 일짱이 들개 새끼한테 깨진 거 잊었어?”
…들개 새끼? 왠지 익숙한 네임이었다.
‘혹시 찬영이랑 마주쳤나.’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여자 쪽은 아마도 고찬영의 여친이었을 테고. 그리고 이놈들은 자신들이 건드린 게 고찬영의 여친인 걸 깨달은 후 자존심 뭉개고 도망쳐 온 길이었나 보다.
‘그럼 이건 화풀이라는 거네.’
떠오른 답안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나 원. 어이가 없어서. 나는 삐져나온 잔머리를 쓸어 올리곤 그들을 노려보았다.
“가오 빠지게 도망친 새끼들이 연약한 약자를 건드려? 너희들 수준은 잘 알겠다.”
“…뭐, 이 씨발년이?”
한 녀석이 내 어깨를 억세게 밀쳤다.
“죽고 싶냐? …아, 아니다, 아니야.”
나를 밀친 놈이 갑자기 히죽, 하고 징그럽게 웃었다.
“내 밑에서 아양이라도 떨면 봐줄 수 있는데?”
“……뭐?”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나는 나에게 들이친 충격에 눈을 부릅떴다.
“미친 새끼. 넌 그딴 년을 보고 발정이 나냐? 킥킥.”
“여자는 눈 가리면 다 똑같아, 멍청이 새꺄.”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대화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이를 으득 갈며 그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했다.
“…미성년자라고 봐주는 건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그다음은 없었다.
“뭐래. 누가 보면 자긴 아니라고 하는 줄 알겠다?”
“아, 혹시 그런 취미 아냐? 성인이면서 학생 교복 입는 변태.”
뚜둑, 내 손아귀에서 살벌한 뼈 소리가 울렸다. 나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 진짜 좆같네.
나는 이 순간 결심했다. 경찰서 따위 알 바냐. 지금 이 새끼들을 죽여 버리겠노라고. 그렇게 작정하고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퍽-!!
쿠당탕-!!!
강한 타격음과 양아치 한 놈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노래방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엇.”
나 아직 손 안 올렸는데…? 이 얼떨떨한 상황에 내 입에선 자연스레 실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듣자 듣자 하니, 변태 새낀 너희들 아닌가?”
낮은 미성에 잠시 난데없는 상황에 벙쪄 가출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황급히 그 정체를 보자, 긴 다리를 느릿하게 내리며 천천히 벽에 기대는 한 남자를 보았다.
“…최강혁?”
놀랍게도, 나를 도와준 이의 정체는 최강혁이었다. 그는 찰칵, 하고 라이터의 뚜껑을 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봐.”
철컥. 라이터의 뚜껑이 강하게 닫혔다.
“왜 가만히 있지?”
그의 붉은 눈이 나를 향했다.
“날 차 버린 그때의 패기는 어디로 던지고. 응?”
최강혁은 나를 향해 히죽, 하고 재수 없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