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19)
“엥? 이거 무슨 소리…, 누나??”
소란을 들었는지 근처에 있던 문 하나가 벌컥 열리며 분홍색 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의아한 얼굴이 나와 눈이 마주치는 건 순식간이었고 그 커다란 눈망울이 얼굴을 뒤덮듯 커졌다.
“지금 무슨 상황인 거예요? 이 사람들은 또 뭐고… 저기 저 사람은 왜 복도에 드러누워 있어요?”
“……음.”
그러게.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일까. 오히려 나야말로 되묻고 싶었다. 최강혁이 왜 난데없이 날 도운 건지, 그리고 지금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되는지. 방금은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서 충동적으로 주먹을 내지를 뻔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만약, 최강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겠지. 자신의 안일한 대응에 대해 혀를 차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 녀석들이 우리한테 시비를 걸었는데, 저 녀석이 도와준 상태?”
솔직히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아 떨떠름했다. 게다가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최강혁의 친구인 이윤조차 내 시선이 향한 방향을 보곤 믿을 수 없단 것처럼 경악했다.
“네에?? 말도 안 돼!”
“…그거 무슨 뜻이야.”
“네가 그렇게 착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
“윤아,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이윤이 소리를 질러 가며 부정하자 안에 있던 일행이 또 나타났다. 그는 다정한이었다. 질문 소리에 이윤이 다정한을 휙, 보더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격한 것처럼 두 팔을 휘휘 저으며 설명을 해 주었다.
“혁이가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었어!”
“……윤아, 너 어디 아파?”
다정한이 짐짓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며 이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윤이 아프지 않다고 하며 아픈 건 최강혁이라며 말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골치가 아파 왔다. …이 바보 같은 상황은 대체 뭔지.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그들을 바라보다가 슬쩍 최강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또한 이 상황이 어이가 없긴 했는지 얼굴을 짜증스레 굳히고 있었다.
“최, 최강혁…?”
“설마, 그 최강혁?”
그때, 양아치들 사이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잊고 있던 상황을 상기하곤 양아치들을 싸늘히 노려보며 다정한과 이윤을 향해 말했다.
“애들아, 이왕 나왔으니 나 좀 도와주고 가지 않을래?”
“예? 엇? …헉, 와! 네!!”
내 말에 이윤이 순간 못 알아들은 건가 싶더니 곧 말의 의미를 정확히 깨달은 듯 환히 눈을 빛내며 총총총 내게 다가왔다.
“뭐 도와드리면 돼요? 누나? 네?”
어우, 부담스러워라. 별이 쏟아지는 것처럼 과하게 빛내는 눈동자에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헛기침을 내뱉어 마음을 진정시키곤 눈앞에 있는 이들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부터 위축되어 있는 듯한 양아치 놈들을 가리키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저 빌어먹을 새끼들이 좀 빡치게 해서… 보다시피 내가 연.약.하잖아? 가만히 당하고만 있기엔 억울해서 말이지.”
“……예?”
“네?”
“풋…!”
방금 비웃은 놈 누구냐. …안 봐도 뻔한 최강혁이었다. 내 말이 그리도 우습던지 최강혁은 조소를 가득 담고 있었으나, 그 눈은 흥미로 가득했다.
‘아, 역시 재수 없어.’
나라고 해서 스스로 연약하다고 말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나서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고 대충 저 녀석들의 도움이 필요했기도 했다. 방에 있는 도방중 출신 애들을 데려올 즈음 여기 있는 양아치 놈들이 다 도망치고 없으면 오늘 나는 분해서 절대 한숨도 못 잘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 내 눈앞에서 이 자식들이 밟히는 걸 꼭 봐야만 할 것 같았다. 비록 내 손으로 때려눕히지 못하는 건 안타까웠지만 뭐 하나 제대로 얼굴을 가리질 못했기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바로 이거였다. …정말이지, 이 한심한 자신의 처지에 한숨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내 주먹이 버젓이 있는데 다른 놈들의 손을 빌려야 하다니… 어휴.
그런데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이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화내게 했어요? 누나를?”
커다랗게 반짝이던 눈동자가 점점 찌푸려지더니, 휙 하고 양아치들을 노려봤다.
“우리 누나한테 대체 뭘 한 거야? 괴롭혔어?”
…응? 언제부터 내가 네 누나였냐…? 황당해서 그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양아치들의 어쭙잖은 항변이 이어졌다.
“아, 아니, 우린 그냥 복도를 지나가다 우연히 부딪힌 것뿐이거든?!”
“허, 어이가 없네. 사람을 모함해도 정도껏이지, 피해망상이 지나친 거 아냐?”
“에이, 씨발. 웬 미친년들한테 걸려 가지고….”
“우, 우리가 괴롭힌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늬들 씨발, 건드리면 다 철창 가는 거야!”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양아치들이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말에 이를 아득 갈며 뭐라 한마디 하려는데….
[내 밑에서 아양이라도 떨면 봐줄 수 있는데?]
뒤에서 기계음이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예상 못 한 상황에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경희야?”
[미친 새끼. 넌 그딴 년을 보고 발정이 나냐? 킥킥.]
[여자는 눈 가리면 다 똑같아, 멍청이 새꺄.]
그 소리는 내가 뒤로 숨겨 두고 있던 안경희에게서 나오는 소리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말이다.
“즈, 증거는 있어. 그, 그리고 여기 복도 CCTV에도 찍혔을 거고, 또, 또… 만약 CCTV가 돌아가지 않더라도… 내, 내가 찍었어.”
안경희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꼭 붙들며 벌벌 떨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두 눈엔 눈물까지 글썽이는 걸로 보아 그녀가 얼마나 겁을 먹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분위기에 맞진 않지만 그 와중에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경탄했다.
‘대체 언제부터….’
나는 주먹부터 휘두를 생각을 했건만, 그녀는 조용히 또 영리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나로선 상상도 못 했던 방향이었다.
“그, 그리고 너, 너희들 약채고등학교 애들이지…? 하, 학년은 3학년…. 또 거기서 여자 소문 더러운 애들 몇 명이 있었고, 신체적 특징을 보면… 그러니까 이름이 분명 변지호, 김기학, 박경태…가 분명해.”
“헉.”
“시, 시발, 저, 저거 뭐야?!”
와…. 나는 주변에서 나오는 반사적이면서도 그녀의 말을 긍정하는 듯한 반응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대, 대단하다.’
나라면 저런 길가의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 기억도 못 하고 깔끔하게 잊어버렸을 텐데… 대체 어떤 특징들을 보고 이름까지 밝혀 버린 건지…. 이러니까 그만한 정보도 쓸어 모을 수 있는 건가?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았다.
“아, 그러니까 시비를 걸었을 뿐 아니라 성희롱까지?”
그때 좌중을 가르며 차분하면서도, 어쩐지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자 입과 눈이 웃고 있음에도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다정한이 있었다.
“이거 순 쓰레기들이잖아!!”
게다가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던 이윤마저 격분했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상황은 점점 양아치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그들도 깨달았는지 주춤거리며 몸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아, 아무튼… 나 너, 너희들 콩밥 먹일 증거는 다 가지고 있어. 그, 그러니까 사, 사과해.”
…다 가지고 있어? 왠지 석연치 않은 말이었으나, 나는 토를 달지 않고 가만히 있기로 하였다.
“허….”
“사, 사과해!”
안경희가 내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옷 너머로 잔떨림이 느껴져 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 손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러자 안경희가 흠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안심하란 듯 미소 지었다.
“아… 아, 그, 그래, 미안하다! 시발! 돼, 됐냐! 야, 시발, 가, 가자!”
이름까지 밝혀진 마당에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간 더 불리해질 거란 걸 드디어 눈치챈 놈들이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기 위해 발을 빼기 시작했다.
“아~ 잠깐.”
하지만, 나는 그들을 그대로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뭐, 뭐야?!”
“사과는 사과고, 내 분은 아직 덜 풀려서 말이지?”
“뭐, 뭐??”
“그러니까 나한테 깔끔하게 한 대씩만 맞고 끝내는 건 어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작전은 바로 안경희가 내 정보를 봐주고, 설령 세간에 말이 오가더라도 여기 있는 최강혁 패거리에게 묻어가면 어떨까? 하는 솔깃한 생각이었다. 머리가 차츰 이성을 되찾으니 나도 꽤 능청스러워진 것 같았다. 여러 가지로 든든한 빽이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더 뻔뻔해진 것도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연약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오늘 잠 못 잘 것 같았다.
나는 이윤에게 저놈들의 길목을 가로막으라는 의미로 눈짓했다. 과연 알아먹을까 싶었으나, 이윤은 꽤나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던 모양인지 재빠르게 그들의 뒤로 갔다. 그러곤 그는 한 바퀴 빙글 돌아 뒷짐을 지곤 허리를 살짝 숙이며 상큼하게 미소를 흩뿌렸다.
“아니면 우리한테 맞는 건데~ 괜찮을까 몰라~.”
“그러게. 결정해. 보다시피 연약한 여성에게… 한 대씩 맞고 끝낼지, 아니면 우리 선에서 끝낼지.”
다정한이 싱긋, 웃으며 이윤과 함께 길목을 막았다. 어쩐지 그의 말이 아까 내가 했던 말과 겹쳐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떨떠름하게 웃으며 바라보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미소가 깊어지는 그의 얼굴에 노려서 한 말임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거참, 센스 좋네.’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고 있자,
“연, 큽, 약, 크큭….”
다정한의 말에 웃음보가 제대로 터진 한 놈이 보였다. …아, 쟨 왜 저렇게 하는 행동 모두가 재수 없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내 얼굴이 저절로 똥 씹은 얼굴로 변하고 있는데 얼추 웃음기를 거둔 최강혁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 존나 웃기네. 좋아. 재밌어 보이니 장단 맞춰 줄게.”
아니, 왠지 넌 빠져 줘도 괜찮을 거 같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떫게 얼굴을 굳히고 있자, 마주친 최강혁의 짓궂은 웃음이 짙어졌다.
“크…읏!”
“아, 씨발, 겨우 여자애한테 한 대 맞는 게 뭐라고! 아, 쳐, 치라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궁지에 제대로 몰린 양아치들이 최후의 선택을 외쳤다. 그 선택에 나는 웃음을 그렸다. 그래, 보통은 그렇지. 그게 일반적인 선택이지.
“좋은 선택이야.”
그러니 난 그들의 선택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영해 주었다. 나는 손가락의 관절을 풀 듯 강하게 오므렸다가 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들이 움찔, 하고 몸을 튀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 것 같긴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양아치 친구들. 이빨 안 나가게 꽉 깨물길 바라.”
아, 혹시 모르잖아? 아무리 연약한 주먹이라도 잘못 부딪히면 이빨 날아갈지. 걱정 마. 걱정 마.
“겨우 여자애 주먹일 뿐인걸.”
입술을 비릿하게 올리며 그들에게 최후의 통첩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