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35화 (135/306)

135.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21)

“아, 누구 좀 만나느라 늦었다. 이제 갈 거니까 재촉하지 마.”

[만나? 누구? 누나 친구가 또 있었… 아, 찬영이 형?]

“…….”

아니, 이 자식이? 누가 이렇게 팩트 폭력을 배려 없이 하라고 가르쳤는가. 지나치게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싹 사라졌다. 게다가 남은 친구라곤 고찬영이라니…. 물론 틀리지도 않고 그와는 꽤 친하기 때문에 불만도 없었다. 고찬영은 좋은 친구였고, 그것은 서이수에게도 느껴졌는지 그들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를 향해 편히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러니 이 부분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새삼 자신의 교우 관계가 동성 쪽으로 넓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함이 올라왔다. 나는 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르며 뚱하니 입을 열었다.

“…찬영이는 아냐. 아무튼 있으니까 기다려.”

[뭐? 아니, 잠…!]

탁, 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동생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나는 통화를 종료시켜 버린 나는 한도훈을 옆으로 치우며 문을 열었다.

“대충 얘기 끝났으니 가자.”

내가 고갯짓으로 바깥을 가리키자, 의자에 앉아 있던 안경희가 벌떡 일어섰다. 뒤따라오려는 몸짓을 확인하곤 밖을 나서려는데,

“아, 저흰 이따가 들어갈게요.”

한도훈이 나가려는 안경희의 앞으로 불쑥 팔을 뻗어 진로를 막아 세웠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녀석을 보자 한도훈이 싱긋, 웃어 보였다.

“경희 누나랑 따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어, 왠지 불길한데. …무슨 꿍꿍이지? 그러나 내 미심쩍은 시선을 분명히 느꼈을 한도훈은 웃는 낯이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결국 먼저 포기한 건 나였다. 나는 떨떠름한 기색을 풀지 않은 채로 안경희를 보았다.

“경희야, 넌 어쩔래?”

“어? 아, 어?”

설마 자신에게 물어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은 네 의견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내심 당황했으나, 나는 다시 침착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나 먼저 갈까? 아님 같이 갈래?”

“으, 어, 어….”

안경희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방황했다.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그녀의 반응에 역시 데려가는 게 좋겠다 싶은 순간 한도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

그러자 안경희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곧 그녀는 안색을 단단히 굳히더니, 날 향해 말했다.

“나, 나 잠시 얘기 좀 하고 갈게. 먼저 가도 돼…!”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지? 한도훈이 어떤 말을 했길래 안경희가 저런 반응을 하는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나는 잠시 상황 파악을 못 하다가 짓궂은 미소를 달며 이쪽을 바라보는 한도훈의 얼굴을 보곤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됐으니 누나 먼저 들어가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하아… 알았다, 알았어. 너, 경희 너무 괴롭히지 마.”

“걱정 마세요.”

…저거, 저거, 절대 안 그런다는 말은 안 하네. 대체 무슨 얘기가 오갈지 수상한 의심이 더 박차를 가해지는 순간이었으나, 한도훈은 단호히 내 어깨를 밀어내며 날 강제로 떠나보냈다.

“자, 이제 가세요. 더 늦으면 휘혈이가 쫓아 나올지 몰라요?”

“앗.”

그것도 일리 있는데…? 나는 잠시 발을 동동거리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안경희에게 말했다.

“경희야, 도훈이가 괴롭히면 나한테 말해! 그럼 이따 봐!”

“어, 응…!”

그렇게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원래의 방으로 향했다.

***

“자, 이젠 말해 봐요.”

“으, 응…?”

“아까 이나 누나가 말하지 않았던 거 있죠?”

그 말에 안경희의 눈이 홉떠졌다. 마치 어떻게 알았냐는 것 같이 투명히 드러난 속마음에 한도훈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미간을 살풋 찡그리며 문에 기대어 섰다.

“누나는… 자기 일론 웬만해서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아….”

“또 경희 누나가 모욕을 당했다면, 분명 그걸로 화를 냈다고 분명히 말했거나… 저렇게까지 깔끔하게 끝나진 않았겠죠.”

서이나는 다혈질인 듯하지만, 꽤나 현실적인 구석이 있어 냉정한 부분도 있었다. 마치 어른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번 처사는 얼굴도 안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답지 않게 앞뒤 구분 없이 군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보통 그런 경우엔 주변이 모욕을 당하거나, 무슨 일을 당했을 때였다. 하지만, 현장의 흔적은 그 강도가 낮았다. 겨우 한 대 친 것 정도로만 보일 정도로 깔끔히 끝나진 않았을 거란 뜻이었다.

이런 경우는 한도훈도 처음 본 것이었으나, 어떤 경위였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서이나 자신이 무시 못 할 정도로 심한 모욕을 당한 경우였으리라, 그리 추측하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러니까 누나도 제가 그 녀석들 손써 준다고 해서 남겠다고 한 거잖아요.”

무엇보다 안경희를 남게 만든 그 말.

‘아까 그놈들, 제 손으로 처리해 줄게요.’

바로 한도훈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녀의 태도 또한 그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기엔 충분했고 말이다.

“…맞아.”

안경희는 내심 놀랐다. 소문으로 들어 한도훈이 영민한 편이란 걸 알고는 있었으나, …상황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까지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그녀가 아는 정보보다 눈앞에 있는 아이는 더 영특한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서이나가 말하지 않았던 내용을 꺼낼 마음이 들었다. 서이나가 꺼내지 않았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그녀의 얼굴은 지극히 사무적이었으며, 그것을 듣는 한도훈도 마찬가지였다. 최종적으로 안경희가 찍어 놨던 영상마저 확인한 한도훈은 이제껏 반응이 없던 게 무색하게도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었다.

“이 새끼들이….”

뒷말은 조용히 삼켜졌지만, 그가 이를 강하게 무는 걸로 그가 욕을 삼킨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흔치 않게 강한 살의를 발하고 있었다.

“학교는 약채고등학교. 영상 기준으로 오른쪽부터 변지호, 김기학, 박경태야. 모두 3학년이고, 아, 반도 알려 줄까? 변지호랑 김기학은 5반이고, 박경태는 3, 3반이야! 아, 또 얘네들이 얼마나 질이 나쁘냐면…!”

안경희는 조금 들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도 서이나를 모욕한 그들을 적당히 응징해 줄 수 있었으나, 자신의 마음에 차기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확실하고도 정당한 응징을 원했다. 또 그들이 얼마나 질이 나쁜 이들인지 알고 있기에 여기엔 한 치의 망설임도, 죄악감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고 있는 정보를 나열해가던 중, 가만히 듣고 있던 한도훈이 그녀를 제지했다.

“잠깐만요, 누나.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예요? 여기 영상엔 이 녀석들 교복을 제외하곤 딱히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당장은 없는데?”

혹시 안 찍힌 사각에 명찰이라도 있었나 싶긴 했으나, 설사 그렇다 쳐도 아는 게 지나치게 많았다. 그들의 질 나쁜 행동을 듣다 보니, 한도훈 자신도 점점 처벌의 수위를 올려 가고 있긴 했으나,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어, 어…? 어어…. 그, 그냥??”

“말이 되는 소리를…. 솔직히 말해요. 저 지금 좀 소름 돋으려고 하니까.”

그, 그 정도야…? 안경희는 자신의 정보량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랐다. 그래서 당황스러움에 울상을 짓고 있자, 한도훈은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말해 봐요. 이런 놈들은… 따로 각 잡고 조사하진 않고선 안 나올 텐데, 대체 어떻게 당연하단 듯 알고 있던 거예요. 혹시 전부터 원한이라도 있었어요?”

한도훈의 말은 꽤 일리가 있었다. 개인적인 사심이 담긴 복수가 끼어 있어도 이상치 않을 정도로 정보가 자세했다. 그의 얼굴에 의심이 깃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안경희가 고개를 파드득 내저으며 완강히 부정했다.

“아, 아냐…! 나, 난 그저 이 일대의 일진들을 전부 조, 조사했을 뿐인걸…!!”

“네…?”

“나, 난 이나가 필요하다면 바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싶어!”

정말 황당한 말이었다. 한도훈은 지나치게 이타적인 그녀의 발언에 잠시 벙쪘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그치만! 이나는 내 우상이야!”

우상…? 그 단어에 한도훈의 머릿속으로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한 인물이 있었다. 이젠 조금 친숙해졌을지 모를 자신의 우상이 말이다.

“하, 하하! 하하하하!!”

한도훈의 웃음이 돌연 방 안을 울렸다. 그는 뭐가 그리도 웃긴지 한참을 웃다가 자신의 이마를 붙잡았다.

“아… 진짜 뭐라 말도 못 하겠네. 갑자기 확 납득이 되어 버리잖아요.”

그는 어쩐지 좀 유쾌해졌다. 왠지 자신과 비슷한 동류를 만난 기분이었다. 한도훈은 피식 웃음을 흘리다가 좋아, 하며 짧게 중얼거리더니 기대고 있던 문에서 몸을 떼어 냈다. 그러곤 한 손을 자신의 옆구리에 갖다 댄 채 안경희에게 다가섰다.

“아무래도 누나랑 자주 연락할 것 같은데요?”

“어?”

“친하게 지내잔 뜻이에요.”

한도훈이 손을 내밀었다. 안경희는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마 그가 먼저 자신에게 다가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저, 누나 마음에 들었어요. 잘 부탁해요?”

“어….”

한도훈은 그녀의 정보가 마음에 들었다. 정보의 정확성은 좀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는 꽤나 신빙성이 높을 것임을, 어쩐지 서이나가 자신에게 무언가 소식을 묻는 빈도수가 적어졌다 싶을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다. 설마 이런 정보통을 숨기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왠지 가공되지 않은 원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다이아몬드를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흥미로운 것은 아름다운 보석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가로 취급되는 보석인 다이아몬드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채굴된 다이아몬드의 대다수는 공업용으로 쓰인다. 그리고 그 실용성은 정밀 공업 분야에선 없어선 안 될 재료였다.

그렇다. 한도훈은 그런 자를 좋아했다. 그 재능이 분야를 압도하는 자. 그리고 눈앞에 있는 안경희는 지금도, 어쩌면 훗날의 미래도 촉망받는 인재임이 틀림없으리라. 그렇다면, 그가 할 일은 단 하나.

이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 것.

“저 팔 아픈데 안 잡아 주실 거예요?”

“어? 어어…!”

한도훈은 빠르게 계산을 마치며 능청스레 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안경희가 그 말에 당황해 그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나 그녀의 소심한 성정을 보여 주는 듯 손끝 자락만 겨우 잡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한도훈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씩, 웃으며 안경희의 손 전체를 끌어 다시 마주 잡아 보였다.

“악수는 이렇게.”

“어, 어…? 어….”

아까부터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안경희였지만, 이 중 그 누구도 그에 간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도훈의 얼굴엔 배부른 짐승처럼 느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어, 어….”

그렇게 포식자와 피식자…가 아니라, 서로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 뜻을 합치는 결정적 만남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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