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22)
***
“왜 이렇게 늦었어!”
방에 들어서자마자 서이수의 격한 마중이 반겨 왔다. 깜짝 놀라 멈칫하고 있으니 이혜인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아 자리로 끌어당겼다.
“뭐, 뭐야?”
당황해서 바라보자 어쩐지 창백히 질려 있는 그녀의 낯이 보였다. …아니, 내가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끔뻑이고 있던 중,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이재현마저 어쩐지 안도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곧 의아한 낯으로 내게 질문했다.
“누나, 도훈이는 못 봤어요? 누나 찾으러 나갔었는데….”
“어? 아, 도훈이는 잠시 경희랑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먼저 왔어.”
“도훈이가요?”
예상외의 말에 놀랐던 걸까. 이재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구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나도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지는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딱히 해 줄 말이 없던 난 어깨를 으쓱이며 이혜인에게 속삭였다.
“혜인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 혹시 혼자 있어서 힘들었던 걸까? 그렇다면 정말 미안해지는데…. 이 시커먼 남정네들 사이에 홀로 두게 만들었다는 미안함이 설핏 들려고 하던 찰나였다. 이혜인이 강하게 고개를 젓더니, 내 팔을 꽉 붙들어 나를 안쪽으로 이동시키고 싶은 것처럼 잡아당겼다.
“안쪽, 안쪽에 앉는 게 어때, 이나야…!”
“엥?”
아까부터 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급해 보이는 이혜인의 얼굴에 어떤 토도 달 수 없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정작 이혜인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서이수마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도 잠시 화장실.”
그런데 왜 저 말을 하면서 나를 흘겨보고 가는 걸까…. 이 영문 모를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잡아당기는 힘을 계속 무시할 순 없어 어쩔 수 없이 안쪽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뭐야, 대체? 휘혈아 뭔 일 있었어?”
“딱히.”
이혜인이 이끄는 대로 들어가다 보니 자연스레 가장 안쪽에 앉아 있던 반휘혈이 있길래 그에게도 물어봤다. 그러나 반휘혈은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지 명쾌한 대답을 내놓질 못했다. …그래. 네가 주변에 관심을 둘 만한 녀석은 아니긴 하지. 물어볼 상대를 잘못 골랐단 생각에 쓴 웃음을 지으며 슬쩍 건너편에 있는 이재현과 김시원에게 무슨 일 있었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이재현(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딱히 별일은 없긴 했는데요....]
[저기... 누나, 혹시 휘혈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김시원(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휘혈이랑 싸웠어요?]
…휘혈아!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니!! 원흉이 바로 옆에 있을 거라 생각 못 했던 나는 경악하며 반휘혈을 바라보았다.
“왜?”
하지만 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 주인공은 정말 하나도 모른다는 것처럼 태평했다. 뭐라 따지기도 애매해진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집요하게 와 닿는 시선을 슬쩍 무시하며 이재현과 김시원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재현(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게... 어... 누나가 안 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좀...................]
[김시원(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누나가 점점 안 오니까 기분이 갈수록 저조해지던데요. 덕분에 누나 친구랑 애들이 분위기 좀 어떻게 해 보려고 진짜 눈물겹게 노래 불렀어요.]
휘혈아…!!! 나는 참다못한 마음에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진짜 이 녀석을 어쩌면 좋지? 내가 나간 시간이 얼마나 됐다고 기분이 안 좋아질 수 있는가. 게다가 지금 앞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이혜인의 모습이 왜 나까지 눈물겨운지 모르겠다. 그녀는 해방감이라도 얻은 듯 평소보다 더 열창을 하고 있었기에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차라리, 차라리 날 따라 나오지 그랬니, 휘혈… 응?’
어라? 뭔가 좀 이상했다.
왜 기분이 저조해지고 있는데도 방 안에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이전이었다면 바로 가타부타 않고 바로 내 마중을 나왔을 아이였다. 그래서 한도훈이 휘혈이가 슬슬 쫓아 나올 거란 말에 나도 후다닥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이들 말의 뉘앙스를 보건대 반휘혈이 나를 따라 나왔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왜… 아, 잠깐. 설마?’
‘걱정 마. 이젠 안 할 거니까.’
불현듯 몇 주 전에 반휘혈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내가 그에게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던 후였고, 반휘혈도 앞으론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혹시… 그 약속을 지키고 있던 거야?’
퍼뜩 떠오른 해답에 나는 놀란 눈으로 반휘혈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과연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하지만 호기심은 호기심으로 그쳤다. 그보단 대견한 마음이 더 커져 갔다. 이젠 남의 말도 들을 수준이 되었다니… 꽤나 감개무량해졌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김시원과 이재현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해 줬다.
“아.”
메시지를 본 이재현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가 스스로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곤 노랫소리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을 깨닫곤 안도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재현이 마주친 나를 향해 민망한 듯 쓴웃음을 지었고, 곁에 있던 김시원은 어쩐지 질린 낯을 하고 있었다.
[이재현(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쩐지 휘혈이가 왜 안 나가나 했어요.]
[김시원(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어쩐지 똥 마려운 개마냥 있다 싶었네요.]
……시원아, 휘혈이한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니? 평소 사용하지 않는 과격한 언사에 나는 슬쩍 김시원을 바라보았다. 김시원은 만사가 귀찮아진 듯 얼굴을 팍 찌푸리며 등받이에 몸을 뉘며 얼굴을 크게 쓸어 올리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나 보네.’
하긴. 일절 하지도 않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피곤치 않을 리가…. 나도 처음에 서이수 뒤치다꺼리할 때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었기에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자존심이 강한 아이니만큼 이럴 땐 조용히 해 주는 게 낫겠지…? 나는 나중에라도 맛있는 디저트를 사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한도훈과 안경희가 돌아왔다. 우리는 2시간 정도를 신나게 부르다가 노래방을 나섰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역시 불공평한 인소 세계 같으니라곤….’
미모, 재력, 지능 등 다 뛰어난 것도 모자라 아이들은 노래 실력까지 훌륭했다. 덕분에 콘서트에 온 건지 노래방에 온 건지 중간에 헷갈릴 지경이었다. 물론 반휘혈은 이번에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얘마저 불렀다면 완전체 그 자체였을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언제 한번 단둘이 오면 불러 주려나?’
전적이 있다 보니 마냥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나는 당연하게도 옆에 서 있는 놈을 흘깃 보며 속으로 훗날을 꾀했다.
“배고파, 밥 먹자, 밥.”
서이수가 배가 많이 고픈지 늘어지는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나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확인하니 얼추 저녁 시간에 접어드는 무렵이란 걸 알아챘다.
확실히 4월이 끝나가고 5월이 되어 가려고 하니 해가 길어졌다. 나는 주변을 슥 둘러보며 밥집을 찾다가 문득 어떤 한 식당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좀 가까웠지?’
나는 그때 갔던 길을 되짚어 보다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애들아, 그럼 요 앞에 철이 분식이라고 있는데 거기 어때? 거기 맛있던데.”
“엑, 거기 위생은 어떤… 윽!”
“넌 그냥 다물어.”
내 제안을 듣던 한도훈이 간섭해 오려 했으나, 김시원이 즉각 옆구리를 치며 막았다. 그 기습에 한도훈이 옆구리를 붙잡으며 노려보자, 그 꼴을 보고 있던 서이수도 김시원을 거들었다.
“네가 고르면 너무 오래 걸리잖아. 서민 문화도 좀 접해 봐라, 좀.”
“우우- 찝찝한데에-.”
서이수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한도훈은 볼을 퉁퉁 부풀리며 툴툴거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쓰게 웃으며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성에 찰진 모르겠다만, 내 기준엔 깔끔하다 싶던데.”
“맞아. 거기 뭐지? 식약처? 거기서도 인정했다는 명패 붙은 거 본 적 있어.”
내 말에 이혜인도 맞다는 듯 동조했다.
“흐음…. 뭐, 그 정도면 봐줄까.”
깐깐한 도련님인 한도훈의 허가가 떨어졌다. 어휴, 하여간 쟤랑 같이 다니면 확실히 입과 눈은 즐겁긴 하지만, 뭘 제대로 먹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저 녀석이 고른 곳은 그만큼 증명이 된 곳이니 좋기야 하다만…. 아무튼 장단점이 굉장히 확실하단 건 분명하니 상관없나. 나는 대충 생각을 정리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식당은 금세 다다랐고, 가장 앞에 서 있던 난 자연스레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아-?”
이야, 오랜만이네. 하면서 혹시 이번에도 주연희가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을 열다 말고 보이는 난장판에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뭐, 뭐야. 이건.”
왜 음식이 뒤집어져 있고, 테이블이랑 의자가 막 질서를 흩트려 놓은 것처럼 있는 거지…?
아니, 말 그대로 모른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웬 난동이 일어난 듯한 현장을 마주하니 머리가 순간 새하얘졌다.
“아, 죄송합니다. 금방 치울… 어, 언니?”
그리고 침울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 주연희가 뒤늦게 손님이 온 걸 눈치채고 일어서다가 그 정체가 나란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머리가 새하얘진 것처럼 몸을 굳히더니, 크게 눈을 부릅떴다.
“뭐야, 왜 안 들어가?”
그때 뒤에 서 있던 서이수가 내 등을 꾹 밀며 안으로 억지로 들어섰다. 나는 아차, 싶어 뒤늦게 막아 보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어? 뭐, 뭐야. 이거.”
상황을 맞닥뜨린 서이수의 황당한 음성으로 시작해 하나둘 아이들이 식당을 들어왔다.
“세상에, 이게 뭐야….”
“심하다….”
다들 하나같이 보이는 내부에 당황한 듯하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조용히 구석으로 자리를 비키며 슬쩍 주연희의 눈치를 살폈다. 주연희는 갑작스러운 다수의 손님에 놀란 듯싶었다. 다가가서 진정시켜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돌연 주연희의 눈이 커졌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의아함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그래서 나는 반사적으로 문 쪽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막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마지막에 들어온 듯 막 문을 들어서고 있는 반휘혈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