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37화 (137/306)

137.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23)

“뭐야, 깨끗하다면서요.”

그때, 한도훈의 무신경한 한마디가 식당 내부에 울렸다. 그 말에 주연희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움찔 떨었다.

“아, 어, 빠, 빨리 치울게요!”

주연희는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더니 청소 도구를 가지고 나왔다. 나는 그 모습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방금 뭐였지?’

우연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 보았으나 명확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난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곤 생각을 털어 내며 식당 내부를 쭉 훑으며 물었다.

“직원이 너 혼자뿐이야? 안에 사람 없어?”

이렇게 난장판인데 주연희 혼자서 이렇게 일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혹시 사장이 이상한 놈인가? 의심하는데 주연희가 황급히 내 질문에 대답했다.

“아, 잠깐. 삼촌이 자리를 비우셔서….”

“삼촌?”

“아, 여기 사장님! 사장님이요. 제가 삼촌 가게를 도와주고 있거든요. 아, 아무튼 삼촌은 진상들 때문에 잠깐 경찰서에 가셔서 안 계세요.”

…대견한데? 왠지 저기 멀뚱히 서 있는 내 동생을 보는 기분도 들었다. 어린 나이인데 집안 어른을 생각해서 도와주다니… 그것도 삼촌의 가게를 말이다. 그런 기특한 아이를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결심하며 그녀가 들고 있던 대걸레 하나를 빼앗아 들었다.

“어…?! 제, 제가 할게요, 언니!”

“됐고, 넌 음식물 쓸어 담아. 국물 같은 건 내가 닦을게. …거기 너희들도 빨리 도와!”

내 으름장에 아이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일은 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한도훈이 질색해 했지만 안 도울 거면 저기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한도훈은 혼자서 덩그러니 있긴 싫었던 모양인지 입을 불퉁하니 내밀면서 흐트러진 책상을 정돈했다.

어휴, 하여튼 한도훈 저 자식. 그 반휘혈도 고분고분하고 있는데 말이 많아요. 나는 한도훈을 흘겨보다가 얌전히 테이블을 닦고 있는 반휘혈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짜식, 역시 철이 든 게 분명해.’

저 묵묵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간 그를 외면하지 않고 고군분투했던 게 다 보답받는 느낌이었다.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반휘혈이 몸을 슥 일으켰다. 아무래도 다 닦은 듯 걸레를 움켜쥐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침 나도 거의 다 바닥을 닦은 참인지라 꼼꼼히 마무리를 한 후 그가 사라진 주방 쪽으로 향했다.

“저, 저기, 자꾸 못난 모습만 보이네. 이번에도 도와줘서 그, …고, 고마워.”

……어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나는 주방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반사적으로 굳혔다. 이 목소리는 분명… 주연희였다. 그런데, 자꾸? 이번에도?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나는 자연스레 떨려 오는 동공에 조용히 몸을 벽 쪽으로 붙였다.

“누, …!!”

수상쩍게 벽에 붙어 서 있자 마침 걸레를 가져오던 서이수와 마주쳤다. 그래서 들킬까 싶었던 나는 황급히 그 입을 틀어막고 나와 같이 벽에 붙게 만들었다.

‘조용히 해!’

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동생에게 경고했다. 서이수는 이게 뭔 상황인가 이해를 못 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으나, 곧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별로.”

“아니, 그래도 내가 너무 못난 모습만 보여서…. 그때마다 말없이 다 도와줬잖아.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들려온 말에 세상에, 세상에를 속으로 연호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저 둘의 관계가 시작된 거지?!’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런 진전이 생겼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딱 봐도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게 느낌이 팍, 하고 왔다.

스토리가 시작되었었구나!

정확히는 운명의 흐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게 맞기는 했지만… 뭐, 아무렴 어때! 이해만 되면 그만이었다. 어쩐지 아까 주연희의 행동이 이상하다 싶더니… 이런 의미였구나!

“…딱히 널 위해서 그런 건 아니야.”

딱히 널 위해서 그런 게 아니야아~?? 아니, 저게 무슨 전형적인 남주 멘트람?? 나는 기함하며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 나올까 싶어 입을 더 단단히 막았다.

‘뭐야, 뭐야?’

그러던 중, 뒤에 있던 서이수가 상황을 파악하고자 내 위쪽으로 머리를 쭉 빼며 속삭였다. 나는 그런 놈에게 쉿, 하고 검지로 입을 가리며 주방 쪽을 가리켰다.

‘지금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아서.’

‘왜?’

‘아니… 둘 분위기가 좀 묘하잖아?’

말하면서도 내가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하나 싶어졌다. 그래서 귀찮아서 대충 설명을 마무리하는데, 불쑥 서이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묘하다고…?”

작은 목소리였으나, 순간 놀라서 서이수를 바라보았다. 이 눈치 없는 자식이…! 내가 조용히 닥치라고 눈빛으로 욕하려는데, 서이수가 안쪽을 살폈다.

“너 듣던 거랑 다르게 되게 착하구나.”

“…나 안 착해.”

“히힛. 내 눈엔 그래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 눈이 이상한 거 아니야?”

“…….”

서이수는 보이는 광경에 할 말을 잃은 듯 몸이 경직되었다. 거봐, 분위기 묘하지? 내가 동조의 뜻을 구하며 바라보자 그는 입을 잠시 달싹이다가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그러곤 왠지 모르게 복잡한 시선으로 날 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누나는… 아무 느낌도 없어?”

“뭔 개소리야?”

아뿔싸. 목소리가 너무 컸다. 그도 그럴 게 이 녀석이 너무 뜬금없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못마땅히 서이수를 노려보고 있자, 뒤에서 불쑥 인기척이 들려왔다.

“어? 걸레 빨러 오신 거예요? 저 주세요!”

“응? 어어??”

정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안쪽에 있던 주연희가 우리의 기척을 느꼈나 보다. 그녀는 몸을 내밀며 내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내 손에 들려 있던 대걸레를 홱, 하고 가져가더니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반휘혈도 밖으로 나오자 자연스레 나와의 시선이 부딪혔다.

“어…. 수고했어.”

갑작스레 마주쳐서일까, 순간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고르고 고르다가 형식적인 수고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방금, 왜 긴장한 거지?’

반휘혈과 눈이 마주치니깐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뭔가 구경해선 안 될 걸 구경한 느낌도 들었달까….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냥 공개적인 자리에서 우연히 목격한 것뿐 아니었는가. 나는 스스로에게 항변하며 위축되려는 어깨와 허리를 강제로 꼿꼿이 폈다.

“반휘혈 너….”

그런데 서이수가 언짢은 듯 반휘혈에게 말을 걸었다. 얜 대체 또 뭘 말하려고. 불길한 마음에 제지를 하려는데, 서이수가 확, 얼굴을 찌푸리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니, 아니다.”

신경 쓴 내가 바보지. 뒷말이 조용히 속삭이듯 들려오면서 서이수가 주방에 쏙 들어가 버렸다.

진짜 뭔 소리야…? 나는 그 뒷모습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았다. 혹시 사춘기가 아직 덜 끝난 건가? 슬슬 끝났을 거라 짐작했었건만… 아니었나? 나는 뒤숭숭해지는 마음에 얼굴을 살짝 구겼다. 지금 스토리가 시작된 것도 신경 쓰이는데 동생마저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인지….

“안 가?”

“아.”

나는 반휘혈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반휘혈과 시선이 부딪혔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보니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이 눈이 주연희를 향하게 되는 걸까?

평소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언제나 내가 있었다. 이 녀석을 볼 때마다 시선이 마주치는 일이 허다하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녀석의 관심은 이성적인 사랑이 아닌 나 그 자체를 향한 애정임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집요할 정도의 관심이 떨어질 걸 생각하니, 기분이 뭔가….

‘섭섭하달까.’

에이, 무슨 소리야.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턴 반휘혈 이 녀석이 주연희에게 더 관심을 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조금… 조오금! 서운하기 하다만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었다. 반휘혈이 행복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랑이라도 응원해 줄 수 있었다. 실연이 다가올지라도 그 과정까지 그가 행복하길 바랐다. 물론 이어지면 더 좋고. 설령 사랑이 아닐지라도 그의 세상이 더, 더 넓어지길 바랐다. 나는 그의 누나로서, 또 인생 선배로서 그 과정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

‘우리 사이도 좀… 변하려나?’

아무래도 관심의 방향이 달라지는 거니 말이다. 으음…! 난 무언가 복잡해지는 감정에 잠시 미간을 모았다가 이내 웃음을 덧그렸다. 뭐, 아무렴 어때. 관계가 변해도 난 이 녀석의 누나란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러니 좀 서운하긴 하더라도 괜찮았다. 그래서 난 씩 웃으며 날 기다리고 있는 반휘혈의 등을 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자, 가자, 가자.”

그리고 나는 또렷이 눈을 뜨며 생각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정말로 똑바로 정신을 차릴 때가 찾아왔음을, 나는 직감했다.

***

상황이 얼추 정리가 되자, 우리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우리 밥은 어떻게 하지?”

꼬르륵-. 청소까지 마치자 배가 공복을 호소해 왔다.

“주방장이 없다고 했으니… 여기서 먹는 건 틀리지 않았을까요?”

이재현이 지극히 맞는 말을 꺼냈다.

“여기 떡볶이 맛있는데에… 먹여 주고 싶었는데에….”

그 말에 이혜인이 울상이 되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켜서 한 말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하나 조금 갈등하고 있던 중, 주연희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말했다.

“그,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해 드릴게요! 제가 이래 봬도 삼촌 따라 많이 만들어 봤거든요. 금방 해 드릴게요. 한 20… 아니, 15분만 기다려 주세요!”

주연희가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우리의 먹성이 보통 먹성이던가. 나는 그녀가 너무 무리를 할까 싶어 사양하려 고개를 저으려는데,

“여기 장사 오늘 끝난 건가?”

한도훈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 말에 주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무래도 나 혼자 운영하는 건 힘들긴 하니깐… 아, 그래도 여러분들까진 받을 수 있어요!”

“그럼 됐어.”

한도훈은 듣고 싶은 걸 들은 모양인지 시큰둥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빠르게 키패드를 치는 것처럼 손을 놀리는가 싶더니, 볼일을 다 끝마친 것처럼 다시 핸드폰을 품속에 넣었다.

‘뭐지…?’

방금 뭔가 한 것 같은데…. 나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한도훈을 보았다. 주연희는 한도훈의 말에 자신의 요리를 대접해도 된다는 것처럼 받아들인 모양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한도훈은 그렇게 적당적당한 놈이 아니란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또래인 여학생이 요리를 대접한다고 하면 치를 떨며 거절할 텐데 조용히 수긍한 것이 보통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나뿐만은 아니었던지 여자애들 빼고 모두가 한도훈을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기다려 주세요, 금방 만들어…,”

“아, 잠깐.”

주연희가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 의기양양하게 주방으로 떠나려는데, 한도훈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주연희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한도훈이 툭, 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 반듯한 소리가 묘하게 중독성 있어 나도 모르게 수를 세게 만들었다. 그게 한 열 번쯤 다다랐을까, 벌컥 하고 양복을 입은 수상한 양반이 들이닥쳤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어. 주방에 들어가서 먹을 것 좀 만들어 와.”

“네.”

양복을 입은 남자는 짧게 경례를 마치더니 재빠른 몸놀림으로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

주연희는 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상황이 당황스러웠는지 굳어 있었다. 한도훈은 별일 아닌 것처럼 태평히 자리에 앉아 있고, 남의 식당 주방엔 정체 모를 양반이 요리를 만들러 들어갔다. 이 혼란스러운 장소에 나는 새삼 깨달았다.

이곳은 역시 그 지독한 인소 세계란 걸. 그리고 한도훈은 그 지독한 세계의 지독한 재벌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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