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40화 (140/306)

140. 각본. (2)

“…찬영이가?”

걔가 그렇게 기특한 짓을 했다고? …대체 언제부터? 아, 아니, 그보다 왜 나는 이걸 이제야 듣는 건데? 왜 아무도 나한테 이 사실을 얘기해 주지 않고, 내 귀에 전혀 들려온 적이 없던 거지?

나는 곰곰이 생각을 뒤져 봤다. 고찬영은 가만 보고 있으면 의외로 자신을 내세우거나 띄우는 일이 많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드물었다. 그런 아이인 만큼 스스로 이 사실을 내게 자랑삼아 말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내게 이 소식을 물어다 줄 만한 사람은 안경희나 이혜인으로 좁혀진다.

혹시 얘네들도 몰랐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은 1초 만에 그만두었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그 녀석들은 나보다 월등히 많은 정보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안경희는 가장 논외였고…. 물론 두 사람이 나를 따돌린 건 절대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이건 그냥 내게 굳이 알려 줄 만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걸지도 모른다. 확인차, 서이수랑 헤어진 후 반으로 가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뭐?? 그걸 이제 알았어?? 아니, 진짜로???”

이혜인은 듣자마자 기겁한 것 같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으, 어…! 미, 미안해! 내가 이런 쪽으로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서, 설마 그것도 모를 줄 몰랐어….”

게다가 안경희마저 정말 내 정보력이 이 정도로 둔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인지 울상을 지으며 잘못도 없으면서 내게 사과했다. …근데 왜 사과를 받고 있는데도 마음에 스크래치가 난 기분이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에 나는 조용히 눈을 데굴 굴리며 두 사람을 회피했다.

‘그건 그렇고 진짜 기특하네.’

나는 힐끗 지금은 비어 있는 고찬영의 자리를 보았다. 고찬영은 커다란 키 때문에 뒷자리에 그대로 앉게 되었다. 그리고 난 같은 줄이긴 하나 앞에서 두 번째 창가 쪽 자리였다.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고찬영이란 존재는 내게 부쩍 친근하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그의 살가운 성격이 큰 몫을 한 거겠지. 처음엔 너무 줏대 없이 붙어 와 이 새낀 뭔가 싶었으나, 지금으로선 꽤 낯을 가리는 편인 내겐 고마운 일로 다가왔다. 고찬영이 그렇게 접근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친해질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의 행동은 꽤나 기껍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조커라는 입장을 드러내지 않은 내 힘으론 왕따를 근절시키긴 힘들었다. 당연히 힘으로 굴복시킬 수도 있었다. 그냥 내가 이 학교의 일짱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난 과거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그러한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뭐,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즉 전국 서열 1위인 정태우와 싸우려 들었겠지, 이런 잔챙이들은 완전히 눈 밖의 존재로 취급했을 터였다.

그러나 고찬영의 입장은 나와 확연히 달랐다. 두 사람의 말을 듣자 하니, 별말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팔이 없나 다리가 없나~ 아, 그게 쓸모없으면 내가 그 팔다리 부러트려 줄 수도 있는데?’

라고 웃으며 경고를 날리면서 지나갔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불량배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전이라곤 해도 그는 사대천왕이며, 현재로서도 그 힘은 강대했다. 이건 프로로서 바라보는 시각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끔 우리는 서로 툭툭 치면서 장난을 치곤 했다. 그러다가 가끔, 가아끔! 조금 진심이 되어 주먹이 빠르게 오가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장난의 선에서 그쳤지만 그때마다 나는 고찬영의 재능에 감탄했다.

제대로 운동을 배워 보지 못한 스트릿 출신이라고 알려 준 고찬영은 그 재능을 썩히는 게 지나치게 아까울 정도였다. 역시 인소 세계라고 해도 전국 상위 랭커는 상위 랭커였다. 아마 그가 진심으로 최강혁과 붙었으면 그리 어이없이 지지 않았으리라. …아니, 어쩌면 이겼을지도 모른다. 사실 내 마음은 이기는 쪽으로 기울여졌을 정도였다. 그는 그만큼 강하고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그런데 걔도 정태우는 혀를 내둘렀단 말이지…. 대체 그 녀석은 어떻길래….’

아, 이런. 잠깐 생각이 삼천포로 빠졌다. 나는 바로 머리를 흔들며 다시 생각을 바로잡았다.

아무튼 그런 고찬영이었기에 그가 날린 경고는 쉽사리 넘기기 힘들었을 거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이 학교에서 텃세를 부리는 모든 일진을 주먹으로 묵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교내에서 딱 한 번 우리 학교 일짱이랍시고 우쭐거리는 답 없는 자식이 최강혁에게 졌다는 이유를 들이대며 겁 없이 까불다가 그 자리에서 날아갔다고 한다. 그가 진 것은 최강혁이지, 시비 건 학생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고찬영은 살갑긴 하더라도 그 성격이 온화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친 쪽에 더 가까웠다. 길들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길들여질 수 있지만, 야생성은 숨기지 않은 맹수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걸 직접 목도하면 아무리 허세에 찌들었어도 자기 목숨 아까워서라도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리라. 그렇게 우리 학년은 고찬영으로 인해 평화가 지켜지고 있고, 현재 같은 학년에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호감을 얻고 있는 모양이었다. 특히 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알게 모르게 피해 봤던 학생들의 호감은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또 이로써 선생님들도 그가 주었던 최악의 인상…, 운동장 사건에 대한 앙금이 싹 사라졌다고 한다.

‘…어쩐지 학생 주임이 조용하다 싶었어.’

가끔 고찬영에게 툭툭거리긴 했으나 크게 미워하는 느낌은 없었다. 나는 분명 개학 첫날부터 사고 친 탓에 얼마 안 가 전학 온 고찬영이 선생님들에게 크게 밉보였을 거라 예상했었으나 전부 좋은 쪽으로 어긋나 버렸다. 그 사실에 나는 허탈히 웃으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뭐-야, 결국 고찬영이 그렇게 좋은 놈이란 걸 나만 이제 알았단 거야?”

“응.”

“……어, 음.”

이혜인은 칼같이 고개를 끄덕였고, 안경희는 머뭇거리다 슬쩍 눈을 피하며 대답을 피해 갔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어쩐지 힘이 빠져 주변에 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앉으며 툴툴거렸다.

“아아니, 그런 일이 있으면 보통 좀 시끄럽지 않아? 나도 그 정도 들을 귀는 있다고.”

“…보통 당사자 눈앞에서 그런 얘긴 못하지 않아?”

……그것도 그렇네. 고찬영이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빵 셔틀이 근절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기면 나와 고찬영은 거의 항상 붙어 다닐 시기였다. 그러니 내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요즘은 시험 기간이 지나고 나서일까, 조커에 대한 관심도 많이 사그라들기도 한 탓도 있고 그의 연애를 위해서도 같이 다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러니 이 정도면 들렸을 법도 한데 지금에서야 들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결국 내 사교성이 문제였나.’

슬픈 현실을 마주하자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싫어서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누가 먼저 접근하지 않고는 쉽사리 타인에게 다가가는 게 어려웠다. 간단한 도움이나 일시적인 만남이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유독 친해지는 건 지난 세계에서도 지금 세계에서도 줄곧 어려웠다.

“…나도 참 피곤한 성격이다, 정말.”

“응?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나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리자 이혜인이 못 들었다는 듯 되물어 왔다. 하지만 굳이 얘기해 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 나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휴, 어쨌든 고찬영 그 녀석, 너무 여친만 생각하는 거 아냐? 걔 얼굴 까먹겠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쉬는 시간마다 거의 칼같이 나가는 그 녀석의 행동 때문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 정체 숨긴다고 도와준다는 놈 어디 갔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이 자식은 연애를 하면 친구를 뒷전으로 생각하는 놈이란 걸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참 연인으로선 100점짜리였으나 친구로선 0점인 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할 수 없는 놈이라 참 아이러니했지만 말이다.

‘…뭐, 같이 있을 때 진짜 행복해 보여서 뭐라 말하기도 힘들고.’

사실 이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우연히 복도를 지나다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보았던 고찬영은 진지했고, 나와 같이 있을 때완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정말 진심 어리게 풋풋한 공기를 뿜어내는 그의 얼굴을 보자, 없던 화도 싹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다. 정말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으음~. 근데 말이야….”

고찬영의 행복을 빌며 속으로 손만 흔들어 주고 있던 그때, 이혜인이 팔짱을 끼며 고심 어린 투로 슬쩍 중얼거렸다.

“내가 좀 이상한 얘기를 들었단 말이지?”

“응?”

그 말에 나는 자연스레 이혜인을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뭘?”

“아니이~, 씁…. 이거 말해도 되나?”

그런데 그녀는 쉽게 말하기 힘든 사안인지 자꾸만 머뭇거렸다. 밀당을 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뭔데 그래?”

호기심이 동해 말을 재촉해 보았지만, 이혜인은 구겨진 미간을 문지르면서도 쉬이 대답을 내놓질 못하고 스스로만 아는 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모함인 것 같은데. …근데 사실이면? 진짜 큰일이잖아. 으음~. 어쩌지….”

갈수록 신중해지는 그녀의 얼굴에 나도 같이 심각해졌다. 대체 뭘 들었길래 저러지? 내가 눈짓으로 안경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탓이었다. 그런데 안경희도 좀체 갈피를 잡지 못한 것처럼 의문을 담아 이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희도 모르는 정보인가?’

물론 얘기를 들어 보면 안경희는 알고 있던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간의 경험상 그녀는 대화의 뉘앙스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유추하여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이 모습은 쉬이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빨리 말해 봐. 아니, 장소를 옮길까?”

그 덕에 내 호기심을 불이 지펴졌다. 이젠 안 들으면 좀체 궁금해서 안달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길 의지까지 내보이자 이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그 정도는. 어차피 내가 아는 것도 그리 많지 않아서….”

이혜인이 이마를 찌푸린 채 한숨을 짧게 푹 내쉬었다. 그러곤 잠시 주위의 눈치를 슥 살피더니 안경희에게 다가오라는 듯 손짓하며 내 쪽으로 가까이 와 속삭였다.

“그냥 여기서 조용히 얘기하는 정도면 돼.”

그 말에 나는 눈을 빛냈다. 이혜인은 마음을 정했는지 다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방금보다 훨씬 작은 소리로, 즉, 우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입을 열었다.

“찬영이 여친이… 양다리를 걸치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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