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41화 (141/306)

141. 각본. (3)

“뭐?!”

나는 대번에 기함하며 소리쳤다. 바로 앞에서 큰 소리가 울리자 이혜인과 안경희가 식겁하며 몸을 물렸다.

“아니, 그거 대체 어디서 들었어?!”

“쉿-! 쉿, 쉿!”

너무 놀라서 자연스레 목소리가 커지자 이혜인이 내 입을 틀어막으며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며 경고했다. 그 덕에 나는 바로 입을 막았지만, 놀란 건 놀란 거였다. 생각도 못 한 정보에 쿵쿵 뛰는 심장을 느꼈으나, 우리를 쳐다보는 주위의 시선이 따갑게 다가와 조용히 목소리를 죽이곤 이혜인에게 물었다.

“바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혜인은 헛소문을 함부로 흘리고 다닐 만한 친구는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건 나름의 심증도 있다는 소리였다.

“경희, 너 정말 몰랐어?”

이런 중요한 사실을 안경희가 몰랐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안경희는 내 질문에 바로 눈을 내리깔며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으, 응…. 미, 미안. 난 대인 관계 쪽으로 퍼지는 소문엔 약해서….”

의기소침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아차 싶어졌다. 바람이라는 난데없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날이 서 안경희에게 따지듯 묻고 말았다. 나는 미안함에 바로 그녀에게 사과했다.

“아냐. 네 잘못 아냐. 미안해. 이건 내가 너무했어.”

안경희가 대인 관계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정보엔 약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그게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나처럼 친구를 사귀는 게 서툴렀으니. 나는 조급한 마음에 실수를 저지른 자신을 탓하며 이혜인에게 한층 침착해진 투로 물었다.

“그거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으음-. 사실 나도 안 지 얼마 안 됐는데. …내 친구가 어제 밤중에 그 여자애가 남자랑 같이 있는 걸 목격했대.”

“네 친구?”

아니, 그보다 어제? 어제라고…?

“3반에 있는 세희 알지? 걔가 알려 줬어. 나랑 찬영이가 친하다고 생각해서 몰래 알려 준 것 같아.”

이건 정말 쉽게 알기 힘든 내용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기 위해 CCTV를 따거나 스토킹을 하지 않고선…

‘아니, 경희가 작정하면 CCTV는 가능했을지도…?’

그만큼 안경희의 스펙은 가히 짐작이 안 갈 정도였지만, 그녀가 현재 이 사실을 모른다는 건 단순한 이유였다. 그냥 나도 안경희도 고찬영의 여친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던 탓이었다. 나는 이 황당한 소식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곧 고개를 들며 하나의 의구심을 드러냈다.

“야, 근데 찬영이 감 엄청 좋지 않아? 눈치도 좋은 편이고. …그걸 몰랐을까?”

말 그대로 고찬영의 감은 정말 뛰어났다. 진짜 짐승인가 싶을 정도로 예리했다. 그러니 첫 만남에 나를 대번에 조커로 의심하거나, 그 이후에 다시 만났을 때 얼굴도 기억 못하면서 분위기로 나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런 그가 여자 친구의 수상함을 눈치 못 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세희 네가 잘못 본 거겠지 하고, 바로 반박했단 말이야…?”

…뭐지? 이 불길함은. 이혜인의 말에 바로 쭈뼛 등골이 서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저 다음 말에 굉장히 불쾌한 말이 들려올 것만 같은 직감이 경고등과 같이 울리는 동시에 이혜인이 슬며시 다시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근데 걔가 남자랑 …키스했다고 하더라.”

“…미친 거 아냐?”

나는 곧장 기함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한 내 반응에 공감하듯 이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혹시나 싶어서 그거 찬영이 아니었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찬영이가 보통 눈에 띄는 사람이냐 하면서 아무리 어두웠어도 걔는 아니었다고 바로 정색하더라고. 무엇보다 키가 찬영이치곤 너무 작았대.”

…이건 무슨 막장 드라마지? 나는 그녀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얼얼한 뒤통수에 입을 벌렸다. 그동안 잘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연애사에 불륜… 수준은 아니지만 바람이라니! 양다리라니!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와, 씁, 와, 이걸 어떻게 하지? 와.”

나는 주변을 서성이며 이를 아득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뛰어가 여자 놈의 멱살을 붙잡고 싶었지만 증거가 지나치게 불충분했다. 이 상태론 모함만 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자애와 알콩달콩 좋다, 좋다 하며 행복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고찬영에겐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초조하게 발을 굴리다가 이혜인을 보았다.

“혜인아, 네 친구가 걜 어디서 봤대?”

“어? 아, 어…. 그, 여기 다리 건너면 주택단지 많은데 있지? 거기 W 편의점 뒤편 골목이 되게 사람 안 지나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봤다고 하더라.”

주작이라고 하기엔 디테일이 너무 상세했다. 괜히 이혜인이 초반에 망설이다가 말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 내용을 들으며 안경희에게 눈짓하며 신호를 보냈다.

증거 확보 가능하겠어?

응.

그러자 안경희는 내 시선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핏대가 서려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침착하자. 아직 사실이 제대로 확인이 안 되었어. 그동안은… 지켜보자.’

화가 났다. 하지만, 진정해야만 했다. 아무 이유 없이, 근거 없이 일반인에게 폭력적으로 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사실로 드러나면? 나는 내가 어떻게 나올지 자신이 없었다.

‘하…. 내가 이런 이야기를 또 듣게 되다니.’

어쩌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건 반휘혈의 가정사 때문도 있으리라. 나는 타인의 믿음을 단숨에 저버리는 그 잔혹한 행위가 너무나 싫었다. 그로 인해 타격을 받는 건 바람을 피운 본인보단 그와 관련된 이들이 아니던가.

나는 눈을 꾹 감으며 화를 다스렸다. 참자, 참아. 아직은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모든 건 조용히 움직여야 했다. 주연희 일로도 머리가 비상이었으나, 고찬영은 내 소중한 친구였다. 뒤로 밀어 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침착히 숨을 다스리며 앞으로의 일을 좀 더 차분히 계획했다.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하겠는데.’

되도록 이 녀석한테 이쪽으로 더 부탁하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

“흐음~? 그러니까 두 사람의 뒤를 캐달라고요?”

빙글거리는 웃음을 달며 재밌다는 듯 말하는 놈은 다름 아닌 한도훈이었다. 그렇다. 내가 찾아온 건 한도훈, 바로 이놈이었다. 부탁하는 처지인 입장에서 우습긴 하지만, 내 얼굴은 그 미소를 마주하며 떨떠름하게 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의도한 건지 아닌 건지 몰라도 사람을 너무 장기 말 다루듯 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별로란 말이지.’

그 정보가 안경희만큼이나 믿음직한 녀석인 건 확실하나, 너무 본인 중심으로 굴러다녀서 가끔 굉장히 불쾌해진다는 게 큰 흠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안경희 혼자선 힘들 것 같았기에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각각 알아 온 정보를 취합하면 주연희나 고찬영 여친의 상황을 제대로 그려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거 경희 누나한테도 부탁했죠?”

“어, 맞…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갑자기 훅 치고 오는 한도훈의 기습에 나는 기함하며 몸을 물렸다. 한도훈은 여전히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짓궂은 태도로 내게 다가왔다.

“실망이에요, 누나. 저로선 부족했어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대놓고 오해를 방불케 하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한도훈의 꼴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이 사람 하나 없는 창고라 다행이지, 누구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아찔할 뻔했다. 하지만 한도훈은 능글맞은 태도를 고수하며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저 서운하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제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수가… 악!”

“1절만 해, 이것아.”

나는 나불거리는 한도훈의 입을 막기 위해 그 이마를 찰싹 때렸다. 그에 한도훈은 이마를 두 손을 붙잡으며 과장스럽게 아픈 시늉을 했다.

“우우~. 너무해요. 이렇게 깜찍하고 잘생긴 제 얼굴에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래. 깜찍하고 잘생긴 한도훈 씨. 도대체 내가 경희에게서 정보를 얻고 있단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대강 한도훈의 말을 흘려들으며 마음에 걸렸던 부분을 지적했다. 그러자 한도훈은 우는 척을 그만두며 가벼이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이 말해 주던데요?”

“뭐?”

나는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그러자 한도훈은 천연덕스레 다시 말을 되풀이해 줬다.

“본인이 말해 줬다니까요? 누나를 위해 일진에 대한 정보를 모두 모았다고요.”

…경희야? 나는 생각도 못 한 안경희의 행동에 동공이 흔들렸으나, 이내 어제 두 사람이 따로 대화를 나눴던 게 떠올랐다.

“잠깐. 너 혹시 그때 이미 눈치채서 경희에게 겁준 건….”

“절 뭘로 보고? 제가 경희 누나 따로 부른 건 그런 목적 아니었거든요. 저 진짜 서운해지려 해요?”

한도훈은 이젠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는지 얼굴을 살풋 구겼다. 그제야 나는 한도훈을 너무 몰아갔다는 걸 깨닫고 그에게 사과했다.

“아, 미안. 상황이 너무 절묘해서 그만….”

“흥. 누나니까 봐줄게요.”

다행히 한도훈은 크게 걸어 넘어지지 않고 쉽게 풀어 줬다. 하마터면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이 시기에 다름 아닌 내 실수로 인해 감정싸움으로 시간 낭비할 뻔했다. 나는 등 뒤로 흐르는 진땀을 무시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알았는데.”

“음~ 대화하다 보니 어쩌다?”

“그게 뭐야?”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한 화제는 더 이을 생각이 없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내게 윙크를 날렸다.

“어찌 됐든 정보는 걱정 마세요. 무엇보다….”

그가 히죽 웃음을 깊게 그렸다.

“경희 누나 솜씨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것을 말하는 한도훈의 눈을 빛났다. 마치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를 보는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응. 나는 조용히 스쳐 지나간 생각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후후. 이거 이젠 저도 기대되네요.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나는 평소와 달리 묘하게 들뜬 듯한 한도훈을 보며 흐리게 눈을 떴다. 어쩐지 사태가 상상 이상으로 커질 것 같은 건… 이건 기분 탓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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