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각본. (4)
***
자, 판은 얼추 깔렸다.
이젠 한도훈과 안경희가 정보를 제공해 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앉아서 발만 까닥이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아 내 나름대로 움직여 볼 생각이었다. 뭐, 방법이라고 해 봤자 별건 없었다. 그저 주연희나 최강혁, 그리고 반휘혈이 자주 돌아다닐 만한 1학년 복도를 몰래 서성여 보든가, 그 정도일 뿐이었다.
굉장히 단순한 방식이었지만 결과를 못 얻은 건 아니었다. 1학년 교실을 모른 척 기웃거리고 있다 보면 당연하게도 아이들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기 마련이었다. 물론 압도적인 건 최강혁 일행과 반휘혈 일행의 이야기였다. 대부분 얼굴에 대한 찬양이었으니, 이건 대충 무시했다. 그러다가 하나씩 중요하다 할 만한 것을 건졌다.
“요즘 2반에 심하게 괴롭힘당하는 여자애 있다며?”
“어, 맞아. 나 어제 다정한 보고 싶어서 그 반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는데 눈에 띄게 책상이 엉망인 자리 있더라. 진짜 소름이었어.”
“헐…. 진짜 불쌍하다. 어쩌다가 그런 거야?”
“못 들었어? 걔가 최강혁한테 집적거려서 그렇다잖아.”
…집적거려? 주연희가… 최강혁에게? 정말 황당한 내용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벽 뒤에 숨어서 듣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최대한 인기척을 죽인 채였다.
“엥? 그렇다고 그렇게 괴롭힘당한다고?”
내 말이 그 말이었다. 설령 그 말이 맞다 하더라도 정도가 심하지 않은가. 듣자 하니 주연희의 책상은 나날이 엉망이라고 했다. 그걸 매일 아침, 그리고 하교 때까지 바라보고 있을 피해자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나로선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어,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걍 최강혁 빠순이들한테 찍힌 거겠지.”
“걔도 참 운 없다.”
두 여학생은 그 말을 끝으로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나는 벽에 머리를 가벼이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흐음.”
방금 얘기로 주연희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함을 알 수 있었다. 저 학생들이 한 얘기뿐 아니라 다른 얘기도 들은 바론 주연희의 교과서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든가, 그녀가 당번인 청소 구간은 그녀가 치운 다음 날이면 의도적으로 파손당하고 더럽혀지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게다가…
‘친구도 등을 돌린 것 같고.’
의외로 주연희의 유일한 친구로서 배신할 거라 여기지 않던 친구는 그녀의 등에 칼을 꽂는 데 기여했다. 나는 그 사실이 석연치 않았다.
‘왜지?’
보통 인소 속 여자 주인공의 친구는 배신하는 일이 있던가? 여주의 친구 같은 경우는 두각이 된 적이 거의 없어서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기억이 모호했다. 그나마 비중이 있을 때는 인소 속 사대천왕 중 한 명과 사귀게 되는 경우에만 조명이 되었던 것 같았다.
이런 갈등 상황에 직면했을 땐 주인공의 친구는 무엇을 했던가. 아니, 무언가를 한 적이 있던가? 곰곰이 떠올려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도 종내 언제나 그 우정이 이어 간 걸 보면 왕따 당할 때 배신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울론! 그런 복잡한 심리의 개연성은 무시한 게 인소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여긴 현실이었고, 살아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곳이었다. 그런 인간 심리의 흐름을 무시하긴 힘들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설마 시기가 앞당겨져서?’
시프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운명의 흐름은 바뀌었고,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혹여… 그 나비 효과가 이런 반작용을 일으킨 거라면?
그렇다면 주연희의 친구라고 여겼던 그 친구는 인소 속에 있을 법한 여자 주인공의 친구가 아니란 뜻이 되며, 주연희가 무슨 일을 당하든 배신할 수 있단 소리였다.
‘골치 아프네.’
그동안 주연희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부분엔 이런 요소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혼자일 거란 생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아마도 화이트 데이 사건 후인 것 같긴 했다. 그런데 그 괴롭힘이 한 달 이상 지속되었다, 라….
상상만으로도 명치가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반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고립. 단 하나의 책상만이 오로지 자신의 공간. 하지만 그 공간마저 저를 공격해 온다면….
‘…용케 웃었구나.’
나는 어제 보았던 그녀의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게에 들어갈 때 마주했던 찰나의 절망 또한 떠올렸다.
하아-. 숨을 깊게 내쉬어졌다. 손을 올려 이마에 흐트러진 잔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와 그녀는 같은 학년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게 한계가 있었다. 주연희와 같은 학년인 아이들에게 도움을 구해 봐? 그렇게 해서 상황이 잘 풀리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최강혁뿐만 아니라 반휘혈 패거리에게도 꼬리를 친다는 소문이 따라붙는다면? 직접적인 괴롭힘은 사라질지 몰라도 반으로 돌아간 순간부터 다시 혼자가 될 그녀의 입장이 도로 지독해질 건 뻔했다.
나는 이 복잡한 현실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머리 아프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조금, 막막해졌다.
***
시간은 어느새 수업이 끝나고 보충 수업 시간에 다다랐다. 그 전에 청소를 마치고 잠시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학교 건물을 가벼이 산책했다. 날씨는 완연한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려 하여 얇은 차림으로 교정을 지나기 충분했다. 나는 피어난 꽃을 멍하니 구경하며 한숨을 돌렸다.
안경희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향했으니, 아마 곧 정보 수집에 착수할 터였다. 한도훈은 자기 비서를 시켰든 어떻게 했겠지. 그럼 난 어떻게 움직여야 가장 현명할까. 아는 사람이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건 그저 무시할 순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여주인 만큼 메인 스토리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따 당하니 직접 도와준다며 나선다? 잘못해서 자존심 상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으음~~!!”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난 이런 섬세한 일은 잘 못한다고. 내 전공은 그냥 냅다 부딪치는 거란 말이야. 나는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으며 벅벅 헝클였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아, 휘혈이!”
문득 주연희가 반휘혈에게 고맙다고 얘기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반휘혈은 알게 모르게 그녀를 여러 번 도운 듯했다. 실제로 반휘혈 생각보다 엄청 착한 것 같다며 여자애들이 소란스럽게 군 것이 떠올랐다.
‘휘혈이한테도 부탁해 볼까?’
되도록 내가 움직이는 걸 아는 사람이 적길 바랐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원에게 상의했다. 어차피 반휘혈은 입이 무겁고, 그가 직접적으로 나서면 괴롭힘이 덜어질지도 모른다. 또 반휘혈은 내가 도움을 바라면 주연희를 보호해 줄 터였다.
‘어? 그럼 둘이 잘될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렇게 되면 반휘혈도 행복해지고, 주연희도 행복해진다. 참으로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나는 내린 결론이 마음에 들어 흡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아직 주연희와 최강혁에겐 이렇다 할 만한 접점이 많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흐름은 왠지 모르게 주연희와 반휘혈의 관계를 더 밀어주는 것만 같았다.
혹시 이곳의 남자 주인공은 최강혁이 아니라 반휘혈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확실히 반휘혈은 이름도 배경도 모두 인소의 남자 주인공으로 적합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 진짜 괜찮은데?”
왠지 희망이 보이는 감각에 눈을 빛냈다. 기분이 조금 가벼워진 듯한 느낌에 저절로 발걸음 가벼워졌다. 그러다가 아무 생각 없이 코너를 도는데,
“크억!”
난데없이 튀어나온 모서리에 퍽, 하고 부딪혔다. 나는 기습당한 배를 부여잡으며 고통을 감내했다.
“괘, 괜찮으세요?! 어, 어…? 어?! 언니!!”
그리고 통증에 잠시 무릎 꿇은 내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있는 주연희가 보였다.
“으아, 어떡해!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주연희는 황급히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놓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울상을 잔뜩 지은 채 안절부절 손을 방황시키고 있었다.
“아니, 이제 괜찮아.”
안 괜찮아도 지금은 괜찮은 척을 해야만 했다. 안 그래도 괴로운 상황에 있는 애한테 이런 사소한 짐마저 짊어지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내가 애써 웃어 보이며 아릿한 통증을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떡해…. 진짜 죄송해요. 왜 매번 언니한테 미안한 일만 만드는지… 정말 어떡해요.”
나는 그 말에 얘가 나한테 미안할 일이 있었나 생각해 보다가 아, 하고 몇 가지 일들이 주르륵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얘 실수로 나 트럭에 치일 뻔하게도 만들고 내 정체도 들키게 만들 뻔했지…. 생각해 보니 정말 주연희 입장에선 날 만날 때마다 미안한 일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랑 마주칠 때마다 뭐라도 해주려고 안달이었던 걸까? 나는 멋쩍음에 뒷목을 주무르다가 주연희가 내려놓았던 바구니를 보았다.
“어… 저건 뭐야?”
딱히 내용물을 몰라서 물은 건 아니었다. 바구니 안엔 야구공이 잔뜩 들어 있었다. 보아하니, 아까 마지막 교시에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던 이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반이 주연희가 속해 있던 반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주연희는 오전 중에 이미 체육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왜 이걸 얘가 들고 가는가 이상함에 묻자, 주연희가 난처한 듯 미간을 모으며 내 눈을 슬쩍 피했다.
“어…. 그, 체육 쌤이 시켜서요.”
“아니, 대체 왜…? 그 반에 주번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그 말을 듣고 대번에 어이가 없어졌다. 그 망할 인간이 장난하나? 아까 주연희를 고립시킨 것도 그렇고, 왜 이번에도…
‘어? 잠깐, 설마…?’
나는 훅치고 올라오는 의심에 기함했다. 설마… 이 인간, 주연희를 작정하고 괴롭히는 건가? 속이 좁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연약한 학생 한 명을 이렇게 괴롭힌다고?
“미친 거 아냐?”
“예?”
“아, 아냐. 그냥 좀 생각을… 아무튼 그 인간 이상하네. 이걸 왜 너를 시켜.”
나는 선생이라기도 부르기 싫은 인간을 속으로 욕했다. 주연희는 내 말에 쓰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제가 운동장 지나가다가 눈에 띄어서 그런 거겠죠.”
나는 그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체념의 빛이 깃든 그녀의 얼굴은 밝은 웃음을 그리던 몇 주 전의 모습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