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43화 (143/306)

143. 각본. (5)

나는 왜 이제야 이 사실을 눈치챈 걸까.

자신의 둔감함과 무심함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는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꾹 내리누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몸을 숙여 바닥에 놓여 있던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어, 언니?”

“내가 들고 갈게. 너 야자해? 하면 오늘은 그냥 집에 가. 피곤해 보인다.”

“하지만….”

“내 말 들어.”

나는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단호히 그녀에게 말했다. 주연희는 잠시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는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웃었다.

“…고마워요.”

“별말을.”

나는 그 감사를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그러곤 바구니를 한 손으로 든 채, 주연희의 어깨를 가벼이 치며 인사를 했다.

“조심히 들어가. 길 조심하고. 다른 길로 새지 말고 무조건 집으로 가.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연락하고. 알았지?”

걱정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인사가 길어졌다. 다 말하고 나자 문득 민망함이 차올랐으나, 어쩌겠는가. 진짜 무슨 일 생길까 싶어서 걱정되는걸. 볼이 살짝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지만 더워진 날씨 탓이라고 여기며 무시하고 있는데 앞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풋…. 하하. 언니, 꼭 저희 엄마 같아요.”

주연희는 내 모습이 꽤 유쾌했나 보다. 그녀는 아까보다 밝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가 더 그녀답다고 여기며 부드럽게 웃음을 덧그렸다.

“그래그래. 아무튼 조심히 들어가.”

“…네.”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의 감사가 다시 속삭여졌다. 어쩐지 많은 감정이 응축된 것 같은 그 목소리에 나는 가려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저기, 연희야!”

“네?”

그래서일까, 나는 충동적으로 그녀를 불렀다. 주연희는 떠나려던 몸짓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 투명한 검은 눈동자를 멀거니 바라보다 다시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이내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힘든 일 있으면 말하라고 하는 건… 너무 티 나겠지.’

주연희는 이제껏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따를 당하고 있다거나, 괴롭다거나, 그 어떤 것도. 그렇다는 뜻은 그 사실을 내가 몰랐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진짜 조심히 가라고.”

그래서 나는 그런 그녀의 기대를 배반치 않기로 하였다.

“푸핫, 그게 뭐예요. 진짜! 알았어요. 집 도착하면 문자 꼭 할게요!”

“하하, 그래.”

내 말에 주연희가 환히 웃었다. 그래. 그걸로 됐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잠시나마 그녀의 숨통이 되는 걸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나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 주며 들고 있는 바구니를 억세게 잡았다. 주연희가 사라진 뒤론 어느새 억지로 그리고 있던 미소는 종적을 감춘 뒤였다.

‘마음에 안 들어.’

운명의 흐름이고 뭐고,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아니, 실제로도 별 이유답지 않은 이유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들이 많겠지. 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고독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내 과거가 연상되었다.

물론 상황은 전혀 달랐다. 나는 왕따를 고의적으로 당하기보단 무리에 섞이질 못했던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 질은 주연희의 입장이 훨씬 최악이었다. 비교하는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도 그 공간이 만드는 고립감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았기에 주연희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빨리 이 사건을 해결해야 된단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느새 도착한 강당은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나는 그 적막한 공간에 숨을 크게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조급하다고 사건이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한층 차분해진 마음을 다독이며 침착히 창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들고 있던 바구니를 안쪽 구석에 내려놓는데,

쾅-!

“?!”

갑작스레 문이 닫혔다. 나는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연이어 찰칵- 하고 문이 잠기는 섬뜩한 소리마저 들리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문 쪽으로 뛰어갔다.

“뭐, 뭐야?!”

황급히 문을 열어 보려 했으나, 아까 들은 소리는 착각이 아니란 걸 증명만 해 주었다. 철컹철컹, 아무리 흔들어도 매정히 닫힌 문은 열리질 않았다.

“뭐, 이런 미친 경우가!”

장난해? 장난하냐고! 나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 하지만 고요한 강당에 누가 반응해 줄 리도 없었다. 아마 옆에 있던 탈의실에서 조용히 숨어 기다리다가 내가 창고에 들어가자마자 닫은 게 틀림없을 터였지만….

“와, 이거 진짜 좆같네.”

생뚱맞게 당한 입장으로선 심하게 어이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난 핸드폰을 책상 서랍에 놓아두고 와서 연락할 수단도 없었다. 아니, 물론 내가 사라지고 반에 들어오지 않는 걸 알면 이미 하교한 고찬영과 안경희는 없더라도 이혜인이 찾으러 나서 줄 게 분명했으니 괜찮았다. 게다가 반휘혈도 나와 거의 매일 하교하는 입장이었으니 적어도 야자 끝난 후라도 날 찾으러 나설 터였다. 그런데도 왜 이리 기분이 찝찔할까 고민해 보자, 문득 오늘 날짜를 떠올렸다.

“아, 잠깐. 오늘 금요일 아냐? …이런 미친!”

이거 완전 작정했잖아! 지금부터 주말까지 이 체육 창고에 누가 온다고! 물론 나야 나 찾으러 올 사람이 있어서 지나치게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 꼴을 주연희가 당했을 거라 생각하니 저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지독한 악의에 이를 빠득 깨물며 강하게 문을 내리쳤다. 쾅! 철제를 뒤흔드는 강한 파열음과 함께 한쪽이 움푹 파였다.

“가만 안 둬. 진짜 가만 안 둬.”

선을 넘어도 정도껏 넘어야지. 나는 이 일의 원흉을 반드시 잡겠다며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아- 존나 시끄러.”

“?!”

그때, 구석 어딘가에서 불쑥 낮은 미성이 들려왔다. 생각도 못 한 인기척에 놀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커다란 뜀틀이 보였다. 나는 눈을 멍하니 깜빡이다가 조심스레 그 위를 폴짝 올라 건너를 살폈다.

“…최강혁?!”

그리고 보이는 인물에 너무 놀라 손가락질을 하며 기함하듯 소리쳤다.

“시끄러. 닥쳐, 좀.”

“…내가 지금 조용히 하게 생겼냐! 왜 네가 여깄어! 아니,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건데-!!!”

다름이 아니라 최강혁이 매트리스를 쌓아 놓고 자기 침대인 것마냥 널브러져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 미친 우연은 또 뭐람! 잠깐. 그보다 나 이 상황 어딘가… 익숙한데?

‘서, 설마 이거 이벤트? 이벤트야…?! 원래는 주연희랑 만나야 했던 게 나랑 마주친 거야?!’

파바박 하고 떠오르는 수많은 로맨스의 개연성. 바로 감금 이벤트가 지금 이루어진 게 틀림없었다.

오, 망했어요. 괜히 오지랖 좀 부렸다가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게 생겼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힘없이 뜀틀 위에서 주르륵 내려왔다.

“망했어. 망했어…. 이거 어떡해….”

이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의 전황이 어떤 식으로 꼬이게 될까. 벌써부터 두려웠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처량하게 뜀틀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뭐가 그렇게 유난이야?”

“…잠시 혼자 있게 해 줘.”

되도록 저 문이 열릴 때까지라도 좋으니 조용히 있어 주길 바란다. 아니, 우리 원래부터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 그러니 철저히 무시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뜀틀 건너에 있을 그를 의식해 힐끗 시선을 위로 향했다.

“…….”

“뭘 그리 궁상을 떨지?”

그런데 내 기대를 와장창 배신한 놈은 어느새 서려 있던 잠기운을 모두 떨친 것처럼 뜀틀에 기대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또렷이 나를 보고 있는 걸 마주하자 나는 그냥 바닥을 뒹굴며 쓰러졌다.

“하필 왜 너야…. 왜 너냐고….”

차라리 갇힌 게 반휘혈이나 다른 애들, 하다 못 해 이윤이면 별 의식도 안 했을 텐데! 플래그의 선두 주자인 감금 이벤트에 함께 갇힌 상대측이 최강혁이란 게 너무나 가혹했다.

“나 지금 무시당하는 건가?”

“아니야아…. 무시하기 힘드니까 더 괴로운 거야아….”

멘탈이 붕괴되니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 말이나 주절거리며 드러누운 바닥을 힘없이 탕탕 두드렸다.

“흐-음?”

최강혁은 그런 날 보며 의미 모를 소리를 내더니 훌쩍 뜀틀을 넘어왔다. 키가 크니 높게 쌓인 뜀틀도 우스워 보일 지경이었으나, 지금의 내겐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냥 녀석이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세워지는 경계에 바로 낙법 취하듯 재빠르게 바닥을 굴러 거리를 벌려 버렸다.

“허….”

그러자 최강혁이 한쪽 눈썹을 내리며 비틀린 미소를 취했다. 어쩐지 기분이 상한 듯도 보이는 게 그저 느낌 탓이길 간절히 바랐다.

“거기 스탑. 접근 금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수습할 생각도 없었다. 이미 우리의 관계는 고쳐질 것도 말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내 쪽으로 다시 다가오려는 최강혁에게 경고했다.

“더 이상 다가오면 싸우자는 걸로 간주한다.”

그러니 이 이상 엮이지 말자.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물론 최강혁이랑 싸우면 재밌겠지. 그렇지만 갇힌 창고 안에선 싸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듣자 하니,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는 소식 한 가지.

그는 우리나라 굴지의 삼대 기업 중 하나인 최강 그룹의 후계자란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가 먼저 작정하고 나를 공격해 오지 않고선 최대한 엮이고 싶진 않았다. 잘못 엮여서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부딪히면 나만 손해 아니겠는가. 나는 몸에 긴장을 불어 넣으며 부디 그가 나를 공기 취급해 주길 소망했다.

“호오?”

그가 뜀틀에 기대며 비틀린 미소를 깊이 더했다. 그의 붉은 눈이 차갑게 빛나는 것이 굉장히 불길했다. 그런 내 직감이 틀리길 진심으로 간곡히 바랐으나…

“그것도 재밌겠는데?”

현실은 언제나 나를 배신했다.

‘시발.’

그리고 나는 그런 현실에 대고 욕을 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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