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각본. (6)
속으로 망했다고 연신 중얼거리고 있는 와중, 최강혁의 발걸음이 한 걸음 다가왔다. 불길함에 최강혁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는 흥미 100%의 얼굴로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어, 이거 진짜 좆 되겠는데…?’
나는 삐용삐용 울리는 경고음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곤 슬금슬금 몸을 뒤로 빼며 최강혁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에헤이, 거참. 농담도 못 하나. …진짜 싸우려는 거 아니지?”
삐질삐질 웃으며 상황을 무마시키려 해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최강혁은 그리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먼저 싸움을 건 줄 알겠어. 응?”
최강혁이 비릿한 웃음을 그리며 목을 좌우로 꺾어 댔다. 나는 그 모습에서 그의 진심을 느꼈다.
‘와, 저 새끼, 진짜 싸울 건가 봐.’
지금 우리의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는 있나 싶었다. 나는 다시 뒤로 몸을 물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외쳤다.
“야, 우리 갇혔다고! 그 와중에 무슨 쌈질은 쌈질이야!”
하지만 나의 다급함 외침은 그의 콧방귀로 한 방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비틀어진 미소와 함께 깔보는 시선이 내려왔다.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하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와, 진짜 좆 됐네.’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이러기냐! 나는 난처함에 눈을 굴리다가 결국 두 손을 어깨 위로 들며 외쳤다.
“아, 항복. 그냥 내가 진 걸로 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비좁은 창고 안에서 얼마나 갇혀 있을 줄 알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서로 다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항복?”
그러자 최강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며 미간이 살풋 찡그려졌다. 그는 내가 말한 내용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은 것처럼 나를 내려 보더니, 성큼 다가와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드밀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뒤로 몸을 무르려고 했으나, 어느새 벽까지 다다라 있어서 피할 수도 없이 막히고 말았다.
“누구 마음대로?”
최강혁이 내 멱살을 틀어잡았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도화선이 지펴진 건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얼떨떨히 당하고 있자, 최강혁은 내 반응은 신경도 안 쓰는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간만에 재밌는 일이 생기려 하는데, 나한테서 그걸 빼앗으려 들지 마.”
“……재미?”
나는 멍하니 그의 말을 되뇌었다. 재미, 재미라고? 몇 번을 되새겨 보아도 그 단어의 의미는 여전했다.
“허….”
그것을 깨닫자 반사적으로 허파에서 바람 빠진 듯한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나는 황당하게 그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얼굴을 팍 구겼다.
“야. 넌 이게… 장난이야?”
내 손은 눈앞에 있는 놈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러자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붉은 눈이 서늘한 냉기를 뿜으며 내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렇다면?”
비소가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이에 인상을 더 구기며 잡은 멱살을 더 강하게 틀어쥐었다.
“적당히 해. 우린 여기에 갇혔고, 지금 싸워 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몰라?”
“아까부터 갇혔다, 갇혔다 하는데, 누가 갇혔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최강혁은 여유롭게 고개를 들며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물을 생각이었으나, 그 전에 그가 쥐던 내 멱살을 풀곤 품 안에서 꺼내 드는 무언가를 보곤 눈을 크게 뜨일 수밖에 없었다.
“어! 너…! 핸드폰!!”
최강혁이 여유롭게 흔드는 그것은 바로 핸드폰이었다. 나는 경악한 마음에 그것과 최강혁의 얼굴을 여러 번 번갈아 보다가 양손으로 그 옷깃을 잡아채며 짤짤 흔들었다.
“아니, 그게 있으면 있다고 말을, 말을 하면 좀 좋냐고오-!!!”
머리끝까지 오른 당황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으나, 그보단 수치심 때문에 더 미칠 것 같았다. 혼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면서 죽상을 지은 그 모습을 보며 이 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어져 쥐던 멱살을 놓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쭈그러들었다.
끄아아, 거리며 혼자서 바닥을 치고 벽을 두드리며 난리를 치고 있으니, 문득 나를 제외한 사위가 고요하단 걸 깨닫게 된 건 한참을 몸부림치고 난 이후였다.
“뭐, 뭐야?”
당장이라도 싸움을 할 태도 만만이었던 놈이 조용하단 걸 깨닫자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에게 눈짓했다. 최강혁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팔짱을 끼며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던 듯, 나와 눈을 마주치곤 차분히 몇 번 깜빡이더니 여상히 말했다.
“아니, 바보같이 구는 게 꽤 재밌어서.”
“…….”
갑자기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홧홧해진 볼을 무시하며 최강혁을 째려보았다.
“난 네 구경거리가 아니거든?”
“그래? 난 혼자서 잘 놀길래 그런 줄 알았지.”
“아오….”
나는 튀어나오려는 욕을 꾹꾹 삼키다가 문득 아까까지 독기를 품은 듯한 호승심이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음을 느꼈다.
‘…원래 이렇게 기분 패턴이 자주 바뀌나?’
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녀석의 태도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지금 당장은 싸울 일을 만들지 않는 게 더 중요했으니 어쩌면 다행인 셈이었다.
“아, 됐고 누구든 좋으니깐 연락 좀 해 봐. 계속 여기 있을 순 없잖아.”
“한참 재밌었는데.”
“…그 재미를 꼭 나한테서 찾아야 하는 거냐고!”
아이 같은 투정에 성질을 내자 최강혁은 시큰둥히 대답했다.
“당신 빼곤 딱히 재밌는 일도 없는걸.”
“……뭐?”
나는 최강혁의 말이 순간 이해가 가질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이내 그가 털썩 주저앉은 채 벽에 기대며 따분한 듯 말을 이었다.
“재미없다고. 모든 게.”
“…….”
이 시건방진 애새끼가 뭐라는 거야? 어이가 신속히 탈출한 기분에 입을 떡 벌리고 있는데, 그가 권태로운 낯으로 눈을 감았다 뜨더니 나를 슥 보며 픽, 웃었다.
“그래, 그거야.”
“…아니, 뭐가?”
“그 태도가 재밌다고.”
“…….”
진짜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당황하는 게 재밌냐? 어? 시비를 거는 건가 싶었으나, 그의 얼굴을 보자니 딱히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다.
“참 신기해.”
화내기도 애매해 얼굴을 묘하게 구기고 있던 중, 최강혁의 얼굴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어, 뭐지?! 하고 주춤거려 뒤로 무르고 싶었으나, 여전히 벽에 막혀서 그러긴 힘들었다. 아까는 홧김에 얼굴이 가까워지긴 했으나, 지금은 좀 달랐다. 냉정을 찾은 머리는 눈앞에 있는 잘생긴 얼굴에 비상이 걸리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손끝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렸을 땐 진심으로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에 나는 황급히 외쳤다.
“야, 야. 얼굴 좀 가깝…!”
“이 못생긴 얼굴이 이렇게 휙휙 바뀌는 게 참 재밌단 말이지.”
나는 하려던 말을 뚝, 멈췄다. 그러나 그는 내 표정이 어떻든 간에 신기한 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흥미로운 눈을 풀지 않고 잡은 내 턱을 이리저리 옆으로 흔들었다.
“왜 재밌지? 언뜻 보면 그냥 지나가는 돌멩이 같은데…. 왜지?”
“…….”
죽일까? 나는 진심으로 밀려오는 살심에 주먹을 부들거렸다.
“오. 그래. 이거야. 사람 얼굴이 이렇게 바뀌는 게 참 신기해.”
이젠 내 볼을 조물딱거리기 시작했다. 명백한 장난감 취급에 머릿속에서 끈 하나가 위태롭게 끊어지기 일보 직전임을 알려왔다.
“즈윽등히 흐르….”
적당히 하라고 경고를 일러 주었으나, 최강혁이 어떤 놈인가.
“싫은데?”
곧 죽어도 마이웨이인 인간이었다. 그는 이죽대며 내 볼을 쭉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미약하게 잇고 있던 끈이 깔끔하게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퍽!!
“아까부터 뭐라는 지껄이는 거야! 이 반휘혈보다 못생긴 놈이!!!!”
동시에 내 주먹이 녀석의 얼굴을 강타한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나 많이 참았다? 엄청 참았다고! 나는 부글거리는 머리에 이를 갈며 씨근덕거렸다. 최강혁은 잠시 상황 분간이 안 되는지 눈을 깜빡이다가 맞은 자신의 뺨을 엄지로 살며시 쓸었다. 그러곤 입가로 새는 피를 확인하곤 허, 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못생겨? 내가? …반휘혈보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아니, 잠깐. 맞은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해? 어처구니가 없어 바라보고 있자, 최강혁이 다시 내게 불쑥 다가왔다. 그러곤 내 양 볼을 꽉 붙잡곤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다시 보지? 그 자식보단 당연히 내가 더 나을 텐데, 응?”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심히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붙잡힌 볼에서 느껴지는 악력과 그의 얼굴에서 여실히 그의 빡침이 느껴졌으나 이런 것에 겁먹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그에게 대놓고 조소를 그리며 이죽거렸다.
“백번 천번을 봐도 너 반휘혈보다 못생겼거든~?”
볼이 꽉 붙잡혀 발음이 샜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보단 눈앞에 있는 이 상도덕도 모르는 개자식의 성질을 건드리는 게 더 중요했다.
“그리고 볼 놔라? 어디 손윗사람을 이따위로 다뤄?! 나 네 선배거든!!!”
무엇보다 나만 볼이 붙잡힌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도 똑같이 최강혁의 볼을 꽉 붙잡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은 평소라면 감탄을 느낄 법했지만 심사가 제대로 뒤틀릴 대로 뒤틀린 현재로선 그럴 여유 따윈 전혀 없었다.
“하-! 선배는 무슨 선배. 난 땅꼬마를 선배로 둔 적이 없는데? 그보다 당신 먼저 놓지…?!”
“으그극…! 너 땅꼬마라 했냐?! 이 멀대 자식아! 키 커서 존나 부럽다! 이 반휘혈보다 못생긴 놈아!”
“윽…!!! 어, 키 커서 존나 좋고! 땅꼬마 네 눈이 맛이 간 거겠지!!!”
점점 나도 이 녀석도 볼을 붙잡고 있는 악력이 강해졌다. 갈수록 고통스러워지는 감각이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보복 심리만 더 강해졌다.
“나 양쪽 다 2.0이야-!! 아, 존나 아파! 좀 놔!! 이 못생긴 놈아!!”
“그럼 눈이 땅에 닿은 거겠지! 땅꼬마, 네가 먼저 놓으라고-!!!”
그렇지만 소리치는 것과 다르게 양쪽 다 놓을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먼저 놓는 쪽이 지는 거란 걸 직감한 터였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고집을 놓지 못한 채 그렇게 유치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언제나 승부 끝에는 승자가 있기 마련.
“윽…!”
손이 미끄러져 잡아당기는 위치를 바꾸자, 최강혁이 큰 반응을 보이며 내 볼을 쥐던 손을 놓쳤다. 그와 동시에 나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벌떡 일어섰다.
“아자-!!”
내가! 최강혁을! 이겼다!!
승리의 도취감에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자, 한쪽 볼을 부여잡으며 최강혁이 털썩 주저앉았다.
“씁….”
그런데 반응이 어째 좀 이상했다. 나는 의아함에 최강혁을 내려 보았다. 그는 꽤나 아픈 듯 눈살을 찌푸리며 볼 한쪽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손안에 숨겨진 볼을 자세히 보니 어느새 그쪽 볼이 꽤나 부어있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어, 야. 거기 왜… 그러…냐.”
왜 저쪽 볼만 저리 심하게 부었나 의아하던 찰나, 문득 그와 실랑이를 벌이기 전에 내가 했던 행동을 떠올리곤 나는 말을 흐렸다.
‘아참. 저거 내가 그랬지.’
아무래도 아까 내가 때려서 찢어졌던 상처를 제대로 건드렸나 보다. …왠지 모르게 비겁한 수를 쓴 기분이 들었다. 미안함에 난처히 뒷목을 쓸다가 다시 그 앞에 쭈그려 앉으며 상처를 살폈다.
“야, 야…. 그러니까 강혁? 강혁이라고 불러도 되지? 어, 괜찮아?”
최대한 조심스레 부르는데, 돌연 최강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강혁?”
“응? 왜? 어…. 이름 불리는 게 싫어?”
“허….”
설마 이름조차 가리며 부르게 하는 미친놈인가 싶었으나, 어쩐지 그의 낯에 황당함이 만면에 그려진 걸 보자니 그건 아닌 듯싶었다.
“혁.”
“어?”
최강혁이 못마땅한 듯 내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의 뜬금없는 말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질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답답한 듯 외쳤다.
“내 이름, 강혁이 아니고 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