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각본. (8)
나는 멍하니 벌려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건 공기뿐이었다. 선뜻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돌연 최강혁의 바람 빠진 웃음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적막한 내부를 가벼이 울렸다.
“…무슨 개소린지. 내가 말해 놓고도 어이없네. 잊어.”
그러곤 최강혁은 몸을 돌리며 손을 가벼이 내저었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듯 가벼운 태도였으나, 나는 그 방금 느꼈던 그 말의 무게에서 쉬이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각본? 그걸, …그걸 느꼈다고?’
그저 인생이 순탄해서 그런 말을 한 걸지도 몰랐다. 남이 듣기엔 거만한 말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세계의 내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겐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운명이란 흐름 속에 놀아나는 기분은 대체 어떠할까. 나는 잠시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건… 괴롭겠네.”
최강혁의 몸이 움찔, 굳었다. 그는 돌린 몸을 다시 내 쪽으로 돌이키더니 어쩐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머리를 긁적이곤 살며시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살아 봐. 그러다 보면 재밌는 일이 생길 거야.”
그 운명의 흐름을 뒤바꾸기 위해 다른 세계의 내가 이 세계로 온 것이기도 하였다. 언제쯤 끝이 보일지 모를 운명이었으나, 언젠가 그 끝은 다다르리라. 나는 그리 믿고 있었다.
“…아, 젠장.”
최강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잔뜩 헝클이더니, 짓씹듯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기분 나쁘게.”
“뭐, 인마?”
기껏 힘내서 위로해 줬더니 욕이 돌아왔다. 나는 어처구니가 완전히 가출한 심정에 얼굴을 확 굳히자, 최강혁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잔뜩 신경질이 난 것 같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반휘혈 그 자식 마음이 이해되는 게 짜증 나서 그런다, 왜!”
“……아니, 그건 또 뭔 소리야.”
반휘혈이 이해가 된다고? …어떤 부분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저절로 얼굴이 멍청해지는 것 같았다.
“알 게 뭐야. 아무튼 그 새끼랑 엮이기 싫으니까 말 걸지 마.”
“그게 뭔 소리… 아니, 그보다 넌 왜 그렇게 휘혈이를 싫어하는 건데?”
최강혁은 성질을 내며 질문을 무시했다. 나는 멋쩍게 그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아까 내 위로가 마냥 싫은 것 같아 보이진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보단 최강혁이 생각 이상으로 반휘혈에 대해 부정적인 게 의외였다. 그동안 최강혁과 반휘혈의 마찰은 극히 드물었다. 다툼이라고 해 봤자 이전 화이트 데이를 제외하곤 거의 전무하다면 믿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최강혁의 태도가 의아했다. 그래서 순수한 마음에 묻자 최강혁은 나를 날카로이 노려보더니, 이내 혀를 차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새낀 처음 볼 때부터 기분 나빴어.”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이와 비슷한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으으음? 아, 도훈이가 윤이를 볼 때랑 비슷한가?’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내용에 나는 그 생각을 좀 더 수정해야만 했다.
“그냥 본능적인 혐오야. 엮이면 불쾌한 기분만 든다고.”
본능적인 혐오? 불쾌? 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거, 휘혈이도 느끼는 거야?”
“내가 그걸 왜 알아야 돼?”
아오, 저 새끼, 입 한 대만 치고 싶다. 나는 한 마디 툭툭 내뱉을 때마다 인내를 갉아먹는 최강혁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이를 짧게 갈았다. 얘만 보면 자꾸 이만 갈리는 게 이러다간 이 제대로 상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니, 고혈압으로 쓰러지려나. 나는 뻐근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지금이라도 저 뒤통수를 한 대 때릴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철컥-.
“어.”
“…엥?”
난데없이 열린 문과 함께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멍청히 그쪽을 보았다.
“누나, 여기서 대체…. 최강혁?”
그곳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 있어 더 놀랐다. 나는 입을 틀어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원아아…!”
바로 그 인물은 김시원이었다. 반가운 나머지 냅다 달려 나가 감격의 포옹을 해 주자 김시원은 어정쩡히 양손을 든 채 굳더니 뒤늦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얼떨떨히 물었다.
“왜 여기에 계시는 건지…. 아니, 그보다 왜 최강혁이랑 같이…?”
여기서 마주친 게 꽤나 당황스러웠는지 그답지 않게 말을 버벅거렸다. 설마 이렇게 빨리 구출될지 몰랐던 난 마치 오랜 수감 생활을 한 사람처럼 그에게 반가이 대꾸해 줬다.
“어떤 미친놈인지 몰라도 여기에 가뒀어! 가만 안 둬! 흐엉…. 진짜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사냐….”
내 오아시스! 내 활력소! 지나친 반가움에 내 안에 있던 김시원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게 느껴졌다.
“…가뒀다고요?”
김시원이 내 말에 팍 인상을 찌푸렸다. 그 또한 난데없이 닥쳤던 내 상황에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그와 몸을 떨어트리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새낀지 발견하기만 하면 그 손을 부러트려야만… 아, 근데 넌 여기 왜 온 거야?”
범인을 향해 이를 갈다 보니 문득 김시원이 이 자리에 있는 게 꽤나 부자연스럽다는 걸 느꼈다. 다음 시간…이라고 하기엔 보충 수업은 이미 시작했고, 보통 보충 수업엔 체육은 없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김시원은 보충을 듣지 않고 바로 체육관이나 집에 가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간에 학교에 남아 있는 게 의아해 묻자, 김시원은 뒤늦게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새삼 자각한 듯 눈을 깜빡이다 얼굴을 팍, 찌푸렸다.
“강이 그 녀석이 반에 안 돌아왔길래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가끔 여기서 자는데 사람 있는 줄 모르고 누가 잠그고 가기도 하거든요.”
“…….”
상상을 초월한 그 대답에 나는 입을 도로 다물었다. 왠지 그의 낯에 어린 짜증이 십분 이해가 갔다. 조용히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 주고 있자 뒤에서 커다란 기척이 다가온 게 느껴졌다.
“…뭐야.”
김시원은 최강혁이 다가오자 대번에 경계를 세우며 나를 제 몸 뒤로 빼내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 배려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김시원의 뒤통수를 보고 있는데 최강혁이 그런 우리를 보곤 어이없단 듯 조소를 그렸다.
“기사님 납셨군. 필요도 없을 텐데.”
…어째 뒷말이 유독 비꼬는 것 같다? 못마땅히 최강혁을 노려보고 있는데, 김시원은 단호한 음색이 강당 내부를 울렸다.
“알아.”
그리고 그는 한쪽 팔을 쭉 펴곤 내 어깨를 감쌌다.
“그 누구보다.”
그 단호한 태도에 나는 놀라 김시원을 바라보았다.
‘오….’
말이랑 행동이 다른 것 같긴 했으나, 굉장히 듬직한 자태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이런 보호 내가 어디서 받아 봤겠는가. 이게 바로 듬직함이라는 건가 보다.
짜식, 널 키운 보람이 있구나.
언제 이렇게 다 컸나 싶을 정도로 대견스러움에 왠지 내 눈이 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기분이었다. 괜히 흐뭇해져 실실 웃으며 김시원을 보고 있자, 불현듯 최강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날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기분이 멋쩍어졌다. 살며시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리고 있자니 최강혁이 헛웃음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됐다, 됐어. 기운 빠지네.”
최강혁은 김이 샜는지 재미없단 것처럼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멀어지는 뒷모습에 정신을 차리며 서둘러 인사했다.
“야, 너도 갇혀 있느라 고생했다! 조심히 가고 상처 소독 제대로 해!”
최강혁은 내 인사에 대충 손을 휘저었다. 무시해도 그러려니 할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몰인정한 녀석은 아니었나 보다. 나는 어깨를 가벼이 으쓱이며 피식 웃고 있자 김시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상처? 아, 볼.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나는 그 물음에 잠시 천장을 보았다. 그러곤 그와의 있었던 일을 곰곰이 떠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어, 음…. 그냥 가벼운 다툼과… 대화?”
“…….”
김시원은 내 대답을 듣곤 잠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시큰둥히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단 거네요.”
“그렇지.”
정확한 핵심을 짚어 주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다 김시원은 아, 하며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내게 물었다.
“그럼 누가 가둔 건지 예상 가는 사람은 있어요?”
“아-. 그거.”
나는 그 말에 서늘히 눈을 내리깔았다.
“있어.”
정황상 추측일 뿐이긴 하지만…. 원래의 목적은 내가 아닌 주연희였을 테고, 최강혁은 당연히 논외였을 확률이 높았다. 보아하니 최강혁은 그곳에 꽤 오래 있었던 것 같았고, 무엇보다 주연희의 괴롭힘은 최강혁의 팬클럽에서 유래되고 있는 게 유력했다. 그러니 최강혁을 괴롭힐 의도는 전혀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 팬클럽을 돕고 있는 듯한 한 사람. 바로 주연희에게 심부름을 시켰던 이가 한 명 있었다.
‘…왜 도와주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
[네에~. 틀렸습니다~.]
“뭐어…?!”
나는 단번에 부정당한 추측에 식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뭐야, 시끄럽게!”
“아, 미안. 아무 일도 아니야!”
문밖에서 소란을 들었는지 서이수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 건너에 다시 외쳐 주곤 조용히 핸드폰에 속삭였다.
“…틀렸다니 무슨 소리야?”
나는 현재 야자를 끝낸 후, 집에 돌아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한도훈에게 체육 쌤에 대한 것도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자마자 걸려 온 전화를 받자, 한도훈은 그 연유를 물었다. 그래서 대강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자 한도훈의 단호한 부정이 돌아와 심히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보다 누나 갇혔었어요? 이거 미친놈들이네, 진짜.]
그런데 한도훈은 내가 감금됐단 소식에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니, 이게 맞긴 한데! 나는 지금 왜 체육 쌤이 이번 일과 상관없는 건지 이유가 궁금했다.
“아, 그건 나중에 욕해 주고! 왜 틀렸냐니까?”
[왜긴 왜예요. 말 그대로 틀린 거지. 그 인간은 원래부터 성격 괴팍하잖아요? 축하드립니다. 누나는 그놈들의 계략대로 놀아나는 데 성공했어요~.]
“넌 이런 상황에 날 놀려야겠냐?! …아, 잠깐. 너 벌써 누군지 알아낸 거야?!”
이미 정황을 파악한 듯 여유로운 그의 태도가 석연치 않아 되묻자 한도훈은 잠깐 침묵했다. 잠시 후, 그는 내게 한 가지를 요청했다.
[자세한 건 조금 더 조사를 해야 아는데… 누나, 하나 부탁 좀 드릴게요.]
흔치 않은 그의 부탁이었다. 웬만한 일로는 그의 선에서 다 끝나는 일이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나는 놀란 마음에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더듬더듬 물었다.
“어, 뭔데?”
[고찬영 그 자식 지인…, 그니까 광주 사람 중에서 입 좀 무겁고 실력도 좀 있어야 되는데….]
“어? 찬영이?”
예상치 못한 내용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한도훈은 짜증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투덜거렸다.
[제 선에서 끝내고 싶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일이 크네요. 제가 너무 움직여도 눈치챌 것 같아서요.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쪽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눈치챈다고? 누가? 한도훈이 움직이는 걸 간파할 만한 인물이 대체 누군가. 나는 이 순간 직감했다. 그의 말대로 이 사건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나는 조용히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 나보단 찬영이한테 직접 부탁해 보는 게 더 낫지 않아?”
고찬영의 지인이라면 나를 통한 게 아니라 고찬영에게 직접 부탁하는 게 더 나았다. 왜 굳이 한도훈답지 않게 번거롭게 움직이나 의아해 묻자,
[음….]
떨떠름한 반응이 그에게서 돌아왔다. 나는 그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으나, 한도훈은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이거 밝혀지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기도 하고.]
“응? 뭔 소리야?”
영문 모를 소리에 자꾸만 미간이 모아졌다.
[으음-.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대충 어떤 흐름이냐면….]
그러나 곧 나는 들려온 한도훈의 말에 점점 경악으로 서서히 얼굴을 굳혀 갔다. 이 짧은 시간 동안 한도훈과 안경희가 파악한 그 대략의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