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각본. (9)
***
이걸 어쩌지…. 나는 책상에 턱을 괸 채 멍하니 창밖을 보는 중이었다. 내 심란한 마음과는 별개로 맑은 하늘을 보고 있자니 괜히 기분이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하고 푹 내쉬었다.
“하아-….”
“뭘 그리 한숨을 쉬어, 친구님?”
으왁! 나는 뒤에서 불쑥 나타난 고찬영에 깜짝 놀라 발작적으로 튀어 올랐다. 그러자 고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 곧 짓궂은 미소를 달며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얹고 치대 왔다.
“뭐야, 뭐야. 무슨 고민 있어? 응?”
흔치 않게 고민이 많은 모습을 보여서일까, 고찬영은 흥미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에게 속 시원히 고민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너 때문이란 걸 어떻게 말해.’
지난주 금요일 밤, 한도훈이 해 준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설마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을 상상도 못 했다. 고찬영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고찬영으로 빚어진 문제도 아니었고. 그보다는 그의 주위가 심각하게 문제였다고 할까…. 주말 내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보았으나 해결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무튼 상황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저기, 찬영아….”
“응?”
“어, 오, 오늘은 우리랑 같이 밥 먹을래??”
우선 상황을 봐서 그에게 말할지 말지 고민해 봐야겠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어딘가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제안했다. 그러자 고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친구님께서 웬일이람? 평소에 이런 제안한 적 없잖아. 정말 무슨 일 있었어?”
누가 들으면 내가 너랑 안 친한 줄 알겠다. 나보고 절친이라며 입에 달고 사는 놈이 어디 사는 누구냐고 따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시기가 적절치 못해 나는 속으로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아아니, 그냥 뭐 좀. 요즘 어떻게 사나 근황도 확인하고 뭐 그러려는 거지. 하하.”
“흐~음?”
하지만 고찬영은 이런 내 말에도 쉬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질 않았다. 아오, 평소엔 그냥 설렁설렁 넘어가면서 꼭 이럴 땐 감이 좋아선….
‘그 감을 여친한테도 발휘되면 좀 좋냐고.’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으음~.”
고찬영은 일부러 뜸을 들이는 것처럼 대답을 미뤘다. 그의 대답을 들은 건 내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치달을 즈음이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친구님이랑 같이 다녀 볼까! 나 잠깐 여친한테 말 좀 하고 올게.”
환히 미소를 지으며 들려온 긍정에 나는 그제야 안도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래. 다녀와.”
그런데 떠나는 고찬영의 모습이 심히 기뻐 보였다. 꼬리가 있다면 신이 나게 휘저었을 것처럼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있자니, 진즉에 한번 권유해 볼 걸 후회가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그런 애를 만나서… 어휴.”
타인의 연애에 간섭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 한도훈에게 들은 바는 이러했다.
‘우선 고찬영 여친이 바람피우는 건 확실하더라고요. 그 왜 전에 고찬영한테 처발린 우리 학교 전직 일짱 있죠? 걔랑 말이에요.’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요?’
‘주연희 괴롭히는 놈이 이 일짱 놈이란 거예요.’
‘게다가 가게 난장판 만든 것도 그 패거리 같아 보이던데요.’
시발. 다시 생각해도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왜 그 새끼는 최강혁 팬도 아니면서 가만히 있는 주연희를 괴롭히는 건가. 가장 유력했던 팬클럽이 용의선상에서 지워지는 것도 충격인데 고찬영의 여친까지 가세해 주자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졌다.
“보니깐 얘도 괴롭히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조용히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 남친 고찬영과 전 남친이라는 불량배랑 바람피우고 있는 그 여자애는 주연희의 괴롭힘에도 가담하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일이 그렇게 돌아가냐고 물어봤으나, 한도훈은 여기까지만 알려 주곤 더 이상 알려 주질 않았다. 그는 그저 고찬영의 친구에게 부탁할 일을 알려 줄 뿐이었다.
“에이, 시발. 이걸 어떻게 물어봐….”
너무 막막하니깐 자꾸 욕이 나왔다. 여친이랑 함께 있을 때마다 행복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놈이었다. 누가 봐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보이는데 그런 고찬영에게 내가 왕따 가해자 파헤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네 여친이 그중 한 명인 것 같으니까 좀 거들어 줘. 라고 말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녀석이 말이다.
“못 해…. 난 못 해애….”
나는 책상에 푹 엎드리며 한참을 끙끙 앓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한도훈은 내게 너무 힘들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으나, 나 또한 이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런데, 왜 광주 쪽을 조사하는 거지?’
나는 핸드폰을 열어 한도훈이 보내 준 주소를 흘긋 보았다. 그는 고찬영의 친구에게 이 주소로 가서 거기 사는 놈한테 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캐 오라는 부탁을 전달해 달라고 했다. 뭐 이리 두루뭉술하냐고 되물어 보았으나, 한도훈은 고찬영의 친구라면 거기 가자마자 바로 알 수 있을 거라고만 말하며 자세한 내용은 생략했다.
“쳇…. 내가 이래서 한도훈이랑 같이 일하기 싫은 거야.”
그 큰 그림이 대체 뭐길래 꽁꽁 감싸는지 모르겠다. 나는 입을 쭉 내밀며 작게 툴툴거렸다.
“어휴…. 머리 굴릴 줄 모르는 놈은 그냥 닥치고 따라야죠, 네, 네.”
“우리 친구님, 왜 이렇게 기분이 저조해?”
“끄아악-!!”
책상에 턱을 괴며 끝도 없이 투덜거리고 있자, 어느샌가 나타난 고찬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래서 식겁해 바로 비명을 지르자 고찬영은 빙글빙글 웃으며 내 이마를 콕콕 찔러 댔다.
“이마는 왜 또 그렇게 험악하게 구겨? 귀여운 얼굴이 다 망가지잖아.”
“으엑…, 너 무슨 일 있어? 너야말로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건데?”
갑작스러운 닭살 돋는 칭찬에 내가 몸서리를 치며 그와 간격을 벌렸다. 그러자 고찬영이 짐짓 서운한 듯 미간을 모으며 과장스럽게 어깨를 떨궜다.
“친구님, 나 지금 막 서운해지려 해. 전학 오고 나서 처음으로 식사 권유를 해 준 건데, 그럼 내가 기분이 안 좋겠어?”
“…내가 그랬나?”
“그랬어.”
단호한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조용히 그의 눈을 피하며 사과했다.
“…그러게. 내가 너무 무정했다. 미안. 앞으로 더 권유할게.”
그는 아직 모르는 여친의 일 때문에 더 죄책감이 가중됐다. 나는 자신의 무신경함을 욕하며 입안을 깨물었다.
“후후. 강요는 아니야. 난 친구님의 그런 서툰 표현, 꽤 좋아하니까. 오히려 그래서 더 기분이 좋거든.”
…저건 무슨 칭찬이지? 하지만 고찬영이 기분 좋게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감정에 충실히 기쁜 마음을 표출하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내가 인간 말종이자 쓰레기같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찬영아…! 앞으로 더 신경 쓸게…!!’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갖은 노력이 필요했다. 자꾸만 시큰거리는 콧등을 문지르고 있자 고찬영은 그런 내가 이상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님, 아까부터 자꾸 왜 그래? 혹시 나한테 진짜 중요히 할 말이라도 있어?”
“어, 어어…?”
“아까 근황 확인한다는 것도 그렇고, 지금 친구님 반응도 그렇잖아. …그러고 보니 어째 점심 같이 먹자는 것도 수상한데?”
고찬영의 얼굴에 점점 의심이 짙어져 갔다.
“아, 아냐! 그냥 친구랑 밥 한 끼 먹는 게 뭐 대수라고! 아무 일도 없어! 진짜로!”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반사적으로 대꾸하다가 뒤늦게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 그냥 사실대로 말할걸!’
어쩌면 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차라리 말해 버려? 극심한 갈등에 휩싸이길 몇 초.
“…그래? 뭐, 상관없나. 친구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고찬영이 반짝, 하고 산뜻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 미소를 마주하자 충동적으로 가슴을 짚었다.
‘아프다, 엄청 아프다.’
양심이 지나치게 아파 왔다. 게다가 그가 보내 주는 신뢰가 너무 무거웠다.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아 냈다. 그리고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그의 미소에 답해 주었다.
***
‘이제 진짜 어쩌지.’
나는 후들거리는 손끝을 깨물었다. 점심시간을 같이 보낸 건 좋았다. 오랜만에 보낸 그와의 시간은 여전히 유쾌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났다.
정작 중요한 볼일은 하나도 못 얘기한 채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현재는 청소 시간을 맞이했다. 즉, 이 시간만 지나면 고찬영은 바로 하교를 한다는 뜻이었다.
‘어떡하지? …진짜 어떡하지?!’
나는 발을 동동거리며 고찬영 책상 주위를 맴돌았다. 게다가 나는 교실 청소이고 고찬영은 음악실 청소였다. 돌아오자마자 너한테 할 말 있다고 해 봐? 그럼 뭐라고 말해야 돼? 아니면, 네 친구 번호 내놓으라고 해 볼까? 그럼 왜 내놓는 거냐고 묻겠지! 젠장!
“와, 진짜 어쩌면 좋….”
지잉- 지잉-.
한참 다가오는 고찬영의 하교 시간에 노이로제에 걸릴 즘, 타이밍 좋게 그의 책상에서 가벼운 진동 소리가 울렸다. 나는 동동거리던 발을 멈추고 그 안을 살폈다.
“…어? 핸드폰… 두고 갔어?”
늘 챙겨 다니던 핸드폰이 버젓이 그 안에 있었다. 그것을 빼내자 커다란 화면 너머로 발신자의 이름이 보였다.
[현호]
“현호? 현호, 현호….”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입 안에 그 이름을 굴려 보았다. 어디서 들어 봤나 고민하길 잠시, 나는 곧 떠오르는 인물에 손바닥을 쳤다.
“아! 그 친구!”
현호라고 불리는 이는 분명 고찬영을 배신한 무리 속에서 유일하게 의리를 지키던 그의 친구였다. 그리고 고찬영의 팬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이것은… 운명?’
때마침 가장 필요했던 인물이었다. 현호라고 하는 이 친구라면 믿을 만했다. 현 상황에서 고찬영의 친구 중 가장 적합한 인물과의 뜻하지 않은 조우에 나는 유레카를 외치며 좋아하길 잠시, 슬쩍 주위를 둘러보곤 이혜인에게 소리쳤다.
“혜인아, 경희야! 나 찬영이한테 핸드폰 좀 주고 올게!”
“응? 어, 알았어.”
“…어, 응!”
혹시라도 내가 고찬영의 핸드폰을 몰래 훔치는 것처럼 보일까 봐 티 나게 외치는 주도면밀함을 잊지 않은 나는 재빠르게 한적한 곳으로 튀어 갔다.
‘끊어지지 마라, 제발-!!’
간절함이 통했을까, 겨우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할 때까지 통화는 끊기지 않았다. 나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참으며 신속히 통화를 연결시켰다.
[아, 여보세요. 찬영아. 너 지금 시간 돼? 다름이 아니라 전에 챙겨 달라 했던…,]
“크, 크흠. 크흠흠! 여, 여보세요?”
나는 자연스레 통화를 잇는, 낯선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한 것 같기도 한 그 목소리에 안도하며 급하게 달려와 헐떡이는 숨을 달랜 후 서둘러 인사했다.
[…….]
그러자 통화 너머의 주인이 갑자기 침묵했다. 나는 그 반응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고찬영이 아니라서 당황했다고 여기며 최대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저기, 잠시 찬영이가 자리를 비워서 대신 받았는데…. 찬영이 친구 맞….”
[시발. 넌 또 뭐야?]
…지? 라고 다 묻기도 전에 살벌한 으름장이 전화 건너편에 들려왔다. 나는 설마 이렇게까지 문전 박대를 당할 정도로 차가운 대접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해 굳어 버렸다. 그런데,
[아이, 시발…. 이번엔 또 어떤 년이야….]
“……응?”
어쩐지 그의 말이 이상했다.
“어, 저기… 현호, 현호 학생? 저기 나는….”
[야, 난 네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고. 알 생각도 없고.]
그래서 황급히 내 정체를 밝히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얄짤 없이 다시 막혀 버렸다. 그래도 포기치 않고 재차 도전하려는데,
[그냥 찬영이랑 당장 헤어져라.]
굉장히 이상한 오해를 받은 것 같은 말을 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