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각본. (10)
“…저기 현호 학생?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더 이상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어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수습했다.
“나 걔 애인 아냐.”
그러니 엄한 오해는 하지 말아 주면 주겠다. 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침착히 대꾸해 주었다.
[하. 내가 찬영이를 얼마나 오래 봤는데…! 이번에도 또 친구로 위장해서 접근하려는 건 줄 모를 거 같아?!]
아니.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나는 당황스러움에 동공이 자꾸 흔들렸다.
“아니, 난 진짜….”
[그래, 이왕 말 나온 김에 묻자. 넌 뭐냐? 아까부터 현호 학생, 현호 학생…. 설마 이번엔 연상? 아니, 성인이야?! 지금 어린 학생한테 치근덕거리는…!!!!]
“난 걔 친구라니까…?!”
딱 벽에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생각도 못 한 난관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물론 내가 정신은 성인이 맞지만! 그렇다고 고찬영 걔랑 원조 교제를 하고 있는 게 아닌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우정을 쌓고 있기에 억울한 심정이 몰려왔다. 이 상황이 너무 갑갑해서 가슴을 퍽퍽 두드려 봐도 꽉 막힌 속은 내려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아니, 그보다 고찬영 너 그동안 여친을 어떻게 사귀어 왔길래 얘가 이렇게 회의적이야?!’
이젠 고찬영의 과거가 심히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도대체 18년이라는 그 짧은 인생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 잘못도 없는데 의심을 당하는 이 불합리한 상황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고찬영을 탓하고 싶은 경지까지 이르렀다.
[…진짜 친구? 아니, 아닌데? 찬영이한테 순수한 우정으로 다가가는 친구는… 아. 잠깐, 잠깐만. …잠깐만요.]
응? 웬 존댓말? 의심이 잔뜩 깔려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던 그의 목소리가 급변했다. 게다가 당황스러움마저 섞인 것 같다고 생각될 때, 그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 호, 호, 호옥시… 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서, 서이, 나… 님?]
…방금 뭘 말하려고 한 거지? 아니, 그보다 …님? 서이나 님…?
“어…. 내가 서이나는 맞는데, 님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닌데….”
어쩐지 뭔가 아는 것 같은 그의 반응이 신경 쓰였지만 어물쩍 넘어가기로 했다. 어찌 됐든 드디어 말이 통하는 것 같은 게 더 중요하질 않겠는가. 떨떠름한 느낌은 있지만 한시름은 놓은 기분에 안도의 숨을 조용히 내뱉었다.
[……저기, 잠깐, 잠깐만요. 끄, 끊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어어. 그래. 근데 우리 동갑….”
…이니깐 말 편히 하라고 해 주고 싶었지만, 툭, 하고 핸드폰을 어딘가 두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이미 그의 손에 핸드폰이 떠난 걸 눈치챈 나는 잠시 힐끗 그것을 보았다가 귀에 대고 차분히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길 기다렸다.
…기다렸는데,
[……으아, …아!! 쾅쾅!! 미…놈아!! 악…! …슨 짓을!!]
핸드폰 너머가 굉장히 수선스러워졌다. 현호라는 친구는 자기 나름대로 조용히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거의 다 들렸다.
‘…찬영아. 네 친구도 정상은 아닌 거 같아.’
하긴. 자기 친구를 동경해 팬이 되길 자청했다고 하는데 정상일 리 없긴 하지.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크, 크흠.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 아니, 오래 기다렸네요. 제가 죽을죄를…!!]
“어어. 거기까지. 거기까지 하자.”
나는 다시 땅을 파고 들려 하는 그의 행동을 즉각 저지했다.
“그보단 아까 한 얘기 다시 해 줄래?”
아까부터 신경 쓰였다. 도대체 어떤 여자들을 사귀었길래 고찬영의 친구랍시고 있는 놈이 이렇게 날이 세우는지. …물론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사실을 듣고 싶었다.
[어, 그게….]
그러자 현호라는 친구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부탁할게.”
[크, 흡…!! 하, 하지만…!]
그의 심중이 꽤나 흔들려 오는 게 느껴졌다. 내 말이 그렇게 여파가 셌나…? 그의 반응 모든 게 의문투성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안 그래도 요즘 찬영이가 사귄 여친이 이상한 애인 거 같아서 걱정돼서 그래.”
나는 앞으로 흐트러진 잔머리를 쓸어 올렸다. 사정을 설명하고 있자니 저절로 한탄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상한 애요?]
내 말을 들은 친구의 목소리가 대번에 달라졌다. 서늘하게 굳혀진 그 소리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찬영이 여친이 바람을 피웠단다, 글쎄.”
왠지 얘한테 이 정도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 아, 워메, 환장하겄다, 진짜.]
찬영이 니 때문에 못살겠다, 증말…. 친구가 깊은 탄식을 작게 내뱉으며 읊조렸다.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잠시 후, 어쩐지 체념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저기… 이나 님? 찬영이 주위에 있나요?]
“아니, 없어. …그리고 나 너랑 동갑인데, 편하게 불러.”
아까부터 거슬리는 부분을 슬쩍 지적해 주자 그가 예?! 하고 발작하듯 소리쳤다.
“열여덟 살, 아니야? 혹시 아래?”
그래서 더 극진히 보는 건가 싶어 떠보자, 친구가 바로 부정했다.
[아, 아뇨! 동갑, 동갑 맞긴 한데요…! 그, 그게….]
“그럼 편하게 부르자. 내 이름은 아까 말했다시피 서이나고 네 이름은 현호…, 성이 이씨였나? 이현호 맞아?”
[허어어…. 마, 마, 맞아요….]
점점 갈수록 공기 반 목소리 반이 되어 가는 목소리에 귀를 핸드폰에 더 바짝 대어야만 했다. 나는 이 이상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젠 더 캐묻기도 귀찮아졌다.
“어어. 그러니깐 그냥 편하게 불러, 현호야.”
그래서 내가 먼저 편히 불러 버리자 통화 건너편에서 무언가가 우직,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어? 부서져?
“야, 방금 뭔가 부서지지….”
[아닙니다. 아, 이게 아니라…! 아, 아니야. 안 부서졌어.]
“그, 그래….”
지나치게 단호한 대답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멋쩍게 볼을 긁적이다가 잠시 놓치고 있던 주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어어. 그래서 찬영이 여친이 그동안 뭐? 그러니까, 걔 여성 편력이 어떻다고?”
[아, 아…. 그거요. 아, 아니! 그, 그거….]
이젠 말투를 지적하기도 귀찮아진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러자 한층 진정됐는지 이현호는 헛기침을 하곤 차분한 음성으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이나… 넌, 찬영이 소문 어디까지 알아?]
나는 그 말에 잠시 천장을 보았다. 그러곤 떠오르는 소문들 몇 가지를 술술 내뱉었다.
“양다리는 기본. 성생활이 난잡하다. 싸움에 미쳐 있다. …뭐 대략 이 정도?”
그 외에도 더 들은 기분이 들었지만 당장 기억나는 건 이것들이었다. 그러자 핸드폰 건너에서 한숨이 푹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에 미쳐 있다는 것만 맞네요. …아니, 맞네. 음. 요즘은 또 달라진 것 같지만.]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의 한숨 어린 말에 나 또한 긍정을 보내왔다. 그러자 건너에서 잠시 침묵하더니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는 있었지만… 찬영이가 이번엔 진짜 ‘친구’를 사귀었나 보네.]
“뭐어…. 그렇게 평가해 주니 기쁘네.”
왠지 이 소리를 들으니 인정받은 기분에 나도 웃음을 흘렸다. 내 말을 듣던 이현호는 웃음을 푸스스 흘리더니 아까보다 편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알았어. 얘기해 줄게. …물론 나도 전부 아는 건 아니니깐. 그건 염려하고 들어 줘.]
“당연하지.”
알려 주는 것만으로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의 신임을 얻은 느낌에 뿌듯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평가가 후한 걸 보면 아무래도 고찬영이 그에게 내 칭찬을 많이 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녀석. 쑥스럽게…. 아무튼,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얜 이렇게까지 신중하지…?’
내가 방금 말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현호가 뜸을 들이는 게 어쩐지 석연찮았다. 의아해하고 있던 중, 이현호가 입을 열었다.
[그니까… 바람은 기본이고… 살인 미수 당할 뻔한 적도 있고, 광신도, 스토킹이라든가, 집 안에 숨어 있다가 덮치려고 했다든가….]
“…아니, 아니, 잠깐만요. 아니, 잠깐만…!”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황급히 수정은 했지만 당황스러움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나는 덜덜 떨려 오는 동공으로 핸드폰을 슬쩍 보다가 침을 크게 삼키며 재차 물었다.
“바, 방금 뭐라고…?”
[어…. 그러니까, 바람은 기본이고, 아, 바람피워서 찬영이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너 못 잃는다고 칼로 찌르려고 든 미친 여자가 있었거든요. 아, 그리고 광신도는 혹시 들어 봤나요? 이거 사대천왕이나 나름 유명한 일진들 팬클럽인 애들 사이에선 불문율이긴 한데요, 찬영이 여친이란 애가 찬영이 몰래 사진 찍고 막 그러면서 사생활 엄청 파헤치더니 찬영이를 신격화한 것도 모자라 팬들 돈 처먹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사건 이후로 광신도같이 움직이는 걸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거든요. 또 스토킹은 말 그대로 인데… 아무튼 별의별 꼴은 다 봤어요. 아마 찬영이가 얘기 안 해 준 것도 여럿 있을 것 같고…. 제가 아는 건 대충 이 정도?]
들으면 들을수록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설명을 하다가 자연스레 이현호가 다시 존댓말로 돌아왔지만 지적조차 하질 못했다. 그보단 이 골 때리는 설명을 듣자니, 머리가 저절로 멍해지고 아파 왔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하나.
‘친구님!’
하고 방금까지 봤던 그 해맑은 얼굴. 그의 과거와 방금 보았던 그의 표정에서의 간극에 나는 끝내 입을 틀어막았다.
“크흡…!”
[그리고 또… 어? 저, 저기요? 조, 아, 아니, 이나 님, 이 아니라 이나, 이나…야?]
“아, 아니, 잠깐, 재채기가…. 계속해 줘.”
[어, 네…….]
참담함에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지만 그것조차 억누를 수는 없었다. 왠지 눈물까지 고일 것 같았지만 지금 당장은 꾹 참았다.
[아무튼 전적이 그러다 보니 스스로도 아마 잘 알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걔는 완벽한 똥차 컬렉터라….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오해했어. …미안.]
“…이해해.”
이해할 수밖에 없잖아, 이건…. 그 정도로 처참한 여성 편력이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고찬영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걸었는데 갑작스럽게 여성이 전화를 받는다? 나라도 바로 의심으로 시작했을 게 뻔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현호가 한 말 그대로 읊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정말 착하게 잘 자랐네….”
그렇게 험한 꼴을 보았는데도 그런 순수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그것도 모자라 한 여자에게 그런 순수한 애정을 쏟아부을 수 있다니…!! 나는 자꾸만 울컥하는 감정에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 그치?! 얘가 진짜 착해!!! 진짜 호구가 찬영이 걔라고, 걔!!]
“알아, 알아. 네가 예민했던 거 다 이해해, 진짜. 나라면 우선 멱살부터 잡았어….”
아닌 게 아니라 그 녀석 주변에 여자가 있으면 정말 멱살부터 잡고 무슨 꿍꿍이냐고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도 고찬영을 배신하고 바람피운 그 여자애의 멱살을 잡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아, 그냥 지금 당장이라도 해 버릴까….”
나도 모르게 스산한 중얼거림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그와 관련되었던 모든 소문이 그 녀석이 사귀었던 여자들이 했던 행동들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거 완전 피해자잖아.’
찬영아, 너 대체 무슨 삶을 살아온 거야. 나는 다시 한번 18년이란 삶을 살아온 그 녀석의 인생을 진심으로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