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49화 (149/306)

149. 각본. (11)

인생이 이렇게 불쌍해도 되나 싶은 건 반휘혈 이후로 처음이었다. 물론 세상엔 더 다양하고 눈물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곤 하지만, 고찬영의 인생도 열여덟 살이 받아들이기엔 버거운 삶이 틀림없었다. 그를 알아 온 시간은 2개월 남짓이었지만, 그 거리만은 한없이 가깝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생각에만 그치고 나는 행동으로 보인 적이 없었다는 걸 방금 깨달았다.

‘나 진짜 주위에 무심한가 봐….’

타인이 알려 주기 이전에 이 소식은 그에게서 들어야만 했던 게 아닐까? 나는 뒤늦은 후회를 느꼈다. 난생처음 사귀는 진정한 친구랍시고, 쑥스럽다며 ‘친구님’이라고 불러 준 그의 마음을 농락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 잠깐만. 근데 그러고도 걔는 여자를 계속 사귈 마음이 드는 거야?”

그러다 문득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보통 이렇게까지 당했는데도 누군가를 사귈 마음이 드는 걸까? 나라면 염증을 일으켰을 것 같았기에 더 의문이 들었다.

[…아. 어…, 음.]

그런데 아까까지 적극적으로 대답하던 이현호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건… 음…. 아니, 아니다. 예상 가는 건 있는데…. 이건 내가 말할 게 아닌 거 같아. 될 수 있다면 걔한테 들어 줘…. 미안.]

“…여기까지 말했는데 못다 한 말이 남았다고?”

뭐, 이런 반휘혈보다 더한 놈이 다 있나. 나는 이 엄청난, 만만찮은 여성 편력에도 더 남았다는 고찬영의 과거에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으게…. 아무튼, 그래. 응.]

끝내 이현호는 더 자세한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 지극히 사적인 내용인가 보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며 곰곰이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친구 보는 눈은 있네.’

그 안목, 여친 보는 눈에서도 살려 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들긴 했으나, 이미 상황은 최악이었기에 나는 씁쓸히 눈을 감았다.

[근데 그 바람피운 여친이 왜?]

“어?”

착잡히 씁쓸한 감정을 정리하고 있던 중, 이현호의 목소리가 상념에 젖은 내 정신을 깨웠다.

[아니, 이미 다 파악한 것 같은데 굳이 나한테 묻는 게 이상해서…. 내 억측인가…?]

그의 긴가민가한 목소리에 나는 퍼뜩, 잊고 있던 볼일이 떠올랐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 아냐! 볼일 있어! 사실 너한테 부탁이 있었어.”

[…나한테?]

“어어. 그게 말이지….”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고찬영의 바람피운 여친에 대해 정확한 증거를 조사하다가 내가 아는 애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엮여 있었던 일. 그리고 아는 정보통이 주소를 보내며 그곳에서 사는 놈에게 정보를 캐 오라는 일까지 말해 주자 이현호의 의문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거길? 왜?]

“난들 아나…. 도, 흠흠. 걔가 워낙 자기만 아는 정보가 많아서 나도 몰라….”

[이상하네…. 뭘 캐 오라는 건지 모르는데 그냥 가서 아나…?]

이현호는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쓰게 웃었다.

“너무 무리하진 마. 거기 가서도 정 떠오르는 게 없으면 그냥 와. 도훈, 어…. 아, 그냥 말할게. 한도훈이 정 못 하겠으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거든.”

[아, 그 정보통이 한도훈. …흐음. 알았어.]

그런데 이름을 듣자마자 이현호가 납득한 것처럼 수긍했다. …한도훈, 너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나는 그 이름 한 마디에 바로 모든 게 해결된 것 같은 자세에 잠시 동공 지진이 일었다.

‘…앞으로 그냥 한도훈 이름부터 까발릴까.’

왠지 그러면 거의 모든 게 수월히 풀리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확신마저 일었다.

“그럼 부탁할게.”

[어, 어…응! 기대에 확실히 부응할게…!!]

이현호의 힘찬 음성에 웃으며 끊으려던 찰나, 나는 가장 중요한 걸 잊었음을 떠올렸다.

“…아, 참참! 현호야, 번호 알려 줘.”

이걸 잊다니, 나도 참. 얼마나 정신이 없던 건지. 하마터면 극단적으로 안경희나 한도훈을 통해 이현호의 전화번호를 캐는 그리 좋지 않은 수단마저 사용할 뻔했다.

[…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데, 어쩐지 멍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도 생각을 못 했나 보다. 왠지 혼자가 아니라는 동질감에 마음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번호 불러 줘. 내가 받아 적을게.”

나는 들고 있는 고찬영의 폰을 어깨로 받치며 품에서 내 핸드폰을 꺼냈다.

[어, 어?! 어…! 그, 내, 내 번호는 010….]

꽤나 당황한 것처럼 우왕좌왕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처럼 중요한 사실을 놓친 게 부끄러웠나 보다~, 라고 여기며 나는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찬영이랑 다르긴 하지만, 이 녀석도 꽤 마음에 드네~.’

아무래도 고찬영의 친구답게 꽤나 친근감이 느껴지는 녀석이라 생각하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

나는 통화를 끊은 뒤 흐른 시간을 보곤 기겁했다.

“아니, 언제 시간이 이렇게?!”

청소 시간이 끝나는 것도 모자라 종례 시간이 한참일 시간에 나는 기겁하며 뛰어갔다. 황급히 반의 문을 열자, 이목이 한순간에 쏠렸다. 나는 멋쩍게 선생님께 사과하며 자리를 향하다가 고찬영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민망히 웃으며 그를 지나치려 했으나, 어쩐지 빤한 시선이 닿아 오는 기분에 순간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잠시 말없이 눈이 마주치길 몇 초, 돌연 그가 싱긋 웃었다.

“…응?”

“찬영이 얼굴 구경하는 건 좋은데 이만 자리에 앉는 게 어떨까?”

그 뜻 모를 미소에 의문이 불쑥 찾아올 때, 담임이 찬물을 끼얹으며 지적해 왔다. 나는 뒤늦게 지금이 종례 시간임을 다시 상기하며 부끄러움에 얼굴을 확 붉히며 항변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하하. 그런 거였어? 더 구경해도 괜찮은데~. 친구님은 언제든 환영이야~.”

고찬영의 짓궂은 말을 기점으로 왁자하니 반 아이들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 소리에 얼굴이 더 붉어져 고찬영을 노려봤다. 그러나 고찬영은 능청스레 윙크만 날려 대 내 속을 더 박박 긁어 놨다.

나는 두고 보자, 라는 심정으로 고찬영을 더 노려보다가 빠르게 자리에 착석했다. 그러다가 묵직한 주머니가 느껴져 그쪽을 더듬다가 그 안에 넣어 둔 그의 폰의 존재를 떠올렸다.

‘…아, 맞다. 이거 어쩌지.’

뒤늦게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종례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짧으면 몇십 초. 길면 몇 분. 그 안에 적당한 핑계를 떠올려야만 했다.

“…그럼 이걸로 오늘 종례를 마칠게요. 반장, 인사.”

“네.”

“…씁.”

하지만, 언제나 운은 내 뜻대로 따라 주질 않았다. 나는 침통한 손길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

“으어어…. 피곤한 하루였어어….”

나는 야자가 끝나자 바로 책상에 엎어졌다. 글자가 어떻게 머리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아니, 들어오긴 했나? 심히 걱정되었지만 그보단 내 친구가 더 걱정이었다. 성적은 정 망치면 정시나 재수에 힘을 다시 쏟을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은 그리 쉽게 풀리는 일이 아니질 않던가.

다행히 핸드폰을 도로 돌려줄 때, 고찬영은 그리 의심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핸드폰 주러 와 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들어 버려 양심의 가책이 더 무거워지는 일이 생겼긴 하지만 말이다.

‘도훈이는 이 사실을 알았을까? …그리고 경희는?’

나는 이현호에게 들었던 고찬영의 과거를 다시 떠올리며 얼굴을 쓸었다. 하지만 당장 풀릴 의문은 아니었고, 딱히 듣고 싶은 내용도 아니었다. …이 사실은 굳이 많은 사람이 알 필요가 없었다. 만일 그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책상을 두들기길 잠시,

“아, 오늘도 왔다.”

“진짜 잘생겼어….”

“이게 바로 사는 맛….”

야자로 지쳐 있던 이들 사이에서 생기가 띤 목소리가 살며시 들려왔다. 나는 그에 어느샌가 내 자리 앞에 당당히 서 있는 놈을 보았다.

“…휘혈아. 이젠 그냥 반에 당당히 오는구나?”

“새삼스럽게.”

그러게. 참 새삼스럽기도 하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에 나가지 않고 있던 모두가 우리에게 시선이 쏠린 게 느껴졌다. 나는 익숙하게 그 시선을 모조리 무시하며 학교를 나섰다.

“참 신기하네.”

어느 정도 교정을 벗어나자, 나는 불현듯 중얼거렸다.

“뭐가.”

“이쯤 되면 너랑 나 사귄다는 소리 들릴 법도 하지 않아?”

학기 초에 그렇게 난리였는데, 요즘 유독 조용한 건 역시 한도훈의 영향이려나? 아니면, 여전히 내가 소식에 어두워서 그런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나는 자문자답을 내리고 있는데, 내 중얼거림을 듣던 반휘혈이 대꾸했다.

“아닌 걸 아나 보지.”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 말에 그를 흘끗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어쩐지 뿌듯해 보인다?”

“글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표정이었지만,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반휘혈은 나와 눈도 안 마주치며 태평한 대답만을 내놓았다. 나는 그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 그런 걸로 하자. 그게 더 편하기도 하니까.”

아니라고 주장하는 놈의 말을 굳이 꺾을 필요가 있나. 나는 그의 등을 툭툭, 가벼이 두드렸다.

“아, 맞아.”

문득, 사귄다는 대목에서 떠오르는 하나의 사실. 바로 주연희였다. 반휘혈의 미래의 여친이 될지도 모를 그 아이의 심신을 위해서라도 그에게 부탁할 일이 생각났다.

“휘혈아, 나 뭐 좀 부탁해도 돼?”

“?”

반휘혈이 고개를 돌리며 나를 보았다. 음. 역시 기분 좋아 보여. 흔치 않은 그의 분위기가 어쩐지 내 부탁에 선뜻 응해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한동안 나 말고, 연희랑 같이 다녀 주지 않을래?”

***

“아, 시발! 나간다고! 나가!”

“현철아!”

고요하고 어두운 한밤중, 어느 한 주택에서 소음이 일었다. 곧 쿵, 쿵. 어둑하고도 잠잠한 밤길에 둔탁한 발걸음이 울렸다. 곧 끼익, 하고 녹슨 철문을 연 이는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에이, 시발. 좆같네….”

욕을 중얼거리던 이는 머리를 헝클였다.

“시이발. 그때, 조커 새끼만 안 나타났어도 크게 한탕 치는 건데…!”

그는 담배를 짓씹듯 강하게 물며 벽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자 낡은 콘크리트의 벽에서 후두둑 먼지가 일었으나,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이딴 낡아 빠진 집, 내가 한탕만 치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고. 시발.”

그는 코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마치 무언가를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발언이었으나, 그게 무언지 물어볼 이는 없었다.

“아, 그래?”

“응?”

…그랬어야만 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대문 앞에 쪼그려 앉던 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점차 다가오는 그림자에 눈살을 찌푸렸다.

“넌 또 뭐야?”

“뭐야. 내 목소리 벌써 까먹었어?”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는 짜증스레 손을 휘저으며 내쫓으려 했다.

“시발,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그러나 가까이 다가올수록 뚜렷해지는 그 인영에 그의 말은 점점 흐려졌다.

“너, 너…!”

이내 그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멍청하니 입을 벌렸다.

“왜, 왜… 네, 네가….”

“반갑네, 김현철?”

조명 하나 제대로 켜지지 않은 어둑한 골목 아래, 구름이 걷히고 달빛에 의지한 인영이 드러났다.

“이, 이, 이현, 호….”

김현철이라고 불린 남자는 그의 등장에 벌벌 떨며 일어설 생각을 못 한 채 주저앉아 있었다. 어떻게 잊을까. 불과 2개월 전, 고찬영과 함께 자신을 묵사발로 만든 이를. 그리고 자신을 농락했었던 이를.

“이거 참…. 여기 오면 알 수 있다고 하더니….”

이현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풀썩 그 앞으로 몸을 숙이며 웃음을 깊게 지었다.

“진짜잖아?”

잠시나마 비추던 달빛이 다시 구름에 가리었다. 불빛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은 주변은 오로지 녹슨 철문 너머에서 비쳐 오는 집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빛이 다였다. 김현철은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이에게서 벗어나 집 안으로 숨어들고픈 충동에 빠졌다. 그러나 두려움에 힘이 빠진 다리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 잠시 얘기 좀 나눌까, 김현철?”

사신과도 같은 속삭임이 김현철의 귓가에 나긋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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