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각본. (12)
***
화났다.
반휘혈이.
그리고 나는 현재 침대에 누운 채 뚱한 얼굴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엄청 화낸 건 아니었다. 내 부탁을 듣자마자 당혹스럽게 굳어 버린 그에게 사정을 간략히 설명해 주자, 그는 나를 복잡한 시선으로 보더니 입을 꾹 다문 채 내게 한 차례 강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곤 내 곁을 무시하듯 빠르게 지나쳤다. 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서둘러 그를 쫓아가니,
‘따라오지 마.’
하고 나를 잘라내 버렸다.
‘대체 어떤 부분에서 감정이 상한 거지.’
그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내 눈이 떨떠름하니 가늘어졌다. 그냥 주연희를 부탁한 것뿐인데 그런 반응이라니. 나는 그 전에 했던 대화를 유심히 떠올려 봤다.
‘한동안 나 말고, 연희랑 같이 다녀 주지 않을래?’
‘…뭐?’
‘아니, 별건 아니고… 음. 별건가? 아무튼 난 더 이상 이렇게 에스코트 안 해 줘도 돼.’
‘왜… 갑자기 그런 말을.’
‘요즘 연희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고 있지? 근데 그게 좀 불안해서. 일이 좀 커질 것 같거든. 근데 네가 나서 주면 조금은 잠잠해질 것 같기도 하고, 걔한테도 네가 가장 편할 것 같고. 아, 얘기는 들었어! 네가 요즘 연희 조금씩 도와주고 있다며?’
‘…….’
‘그리고 난 어차피 이런 거 필요 없었잖아? 며칠 걸리진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동안 걔 좀 부탁할게. 아, 이거 부탁했다는 건 연희에게 비밀로… 어? 휘혈아?’
…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감정이 상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당장 떠오르지 않는 해답에 두 손으로 양 볼을 뭉개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애체에 뭐얼까아-.”
침대 위를 뒹굴뒹굴해도 마땅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곁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음? 누구지?”
이 야심한 시각에 누가 전화했나, 손을 뻗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한도훈]
그 정체는 한도훈이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아, 누나. 아직 안 잤어요?]
“어어. 무슨 일이야. 뭐라도 알아낸 거야?”
혹시라도 당장 알려 줄 정보가 있나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도훈은 그런 내 기대를 아주 사뿐히 치워 버렸다.
[알아낸 거야 있지만 아직 알려 주긴 이르죠. 그보단 고찬영 친구 건은 어떻게 됐어요?]
나는 그 말에 한도훈이 내가 할 일을 잘 수행했나, 확인차 연락했음을 깨달았다. 어쩐지 맥이 빠졌다. 나는 도로 침대 위로 털썩 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오늘 찬영이 친구랑 운 좋게 연락해서 부탁해 놨어.”
[운 좋게? 아, 그럼 고찬영한테는 말 안 했어요?]
“…응.”
그걸 어떻게 말하겠는가. 더욱이 고찬영의 과거 여성 편력까지 알게 되니 더 입이 안 떨어지기 시작했다.
[흐음-. 뭐, 누나가 그렇게 정했다면 그런 거겠죠.]
다행히 한도훈이 이 부분을 그리 크게 짚고 넘어가질 않았다. 나는 그 대답에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기 도훈아. 찬영이가 여친의 바람 사실을 모른 채로 좋게 좋게 헤어지는 방법은….”
[있을 리가요.]
역시 그렇지. …그렇겠지. 단호한 그의 음성을 듣자니 보기 싫은 현실이 더 꼴 보기 싫어졌다.
[걔가 멍청이도 아니고 잘 사귀고 있는데 남이 그냥 헤어지라고 해서 듣겠어요?]
“…야. 그래도 찬영이가 네 선배인데 걔가 뭐냐, 걔가.”
그의 말을 들을수록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눈동자를 조용히 굴리며 말을 돌리자, 한도훈이 혀를 차를 소리가 들려왔다.
[…뭐,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에요.]
“어…?”
나는 생각지 못하게 들려온 말에 눈을 부릅떴다. 한도훈은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귀찮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 여자가 헤어지자는 말을 하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워….”
그 답변에 나는 망연히 입을 벌렸다. 그러다가 침을 꼴깍 삼키며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 한도훈을 보듯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한도훈, 너…. 진짜 똑똑하다….”
[당연한 소릴.]
저절로 새어 나오는 감탄을 막지 않고 곧장 건네주자 한도훈이 콧방귀를 뀌며 으스댔다. 나는 그 말에 반박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 눈을 반짝였다. 당장 사건이 해결된 것도 아니었으나, 뜻밖의 명쾌한 답을 듣고 있자니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 듯한 기분이었다.
“어, 그럼 내일부터 당장 헤어지라고 해도 돼?”
마음 같아선 곧장 해치우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한도훈의 큰 그림에 해가 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묻자, 한도훈은 시큰둥히 대답해 줬다.
[그건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그 여잔 별로 필요도 없거든요.]
“어, 그런 거야?”
[네. 그냥 어설프게 껴 있던 거라 상관없어요.]
오호라. 나는 그 말에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직 당장 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헤어지게 만들 생각에 벌써부터 답답했던 가슴속이 시원해졌다. 필요하다면 위협도 조금 가할 생각이었다. 증거는 없지만 조커라는 내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다는 건 이미 당연한 사실이었고, 또 내겐 반휘혈과 그 친구들이라는 아주 듬직한 빽이….
“아, 그러고 보니 휘혈이….”
[네? 휘혈이요?]
돌연 방금 그와 의도치 않은 갈등을 빚었다는 게 다시 떠올랐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한도훈이 난데없는 반휘혈의 이름에 의아한 낌새를 띠며 물어 왔다. 나는 잠시 뒷목을 주무르다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인 그 사건을 한도훈에게 알려 줬다.
“…이런 일이 있었거든. 이거 내 잘못인가?”
말하면서도 연신 고개가 기울여졌다. 한도훈은 듣는 내내 말이 없었고, 지금도 말이 없었다. 내가 다시 도훈아? 하고 불렀음에도 그는 잠시 동안 침묵하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게 뭔지.]
“왜, 이거 내 잘못 아니지? 그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이 아닌 것 같았지만, 한도훈의 반응에 왠지 모르게 지레 찔리는 감각이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한도훈은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어쩐지 염증이 인 것처럼 짜증스레 말했다.
[네. 이건… 그래요. 이건 그 자식 업보라 치죠.]
“엥, 업보?”
[네. 업.보.]
음절을 끊듯 단호한 말이었다. 나는 멍청히 눈을 깜빡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뭔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보다 똑똑한 녀석이 하는 말이니 맞는 말일 것 같았다. 물론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말이다. 더 파고들어 봤자 얘기해 줄 것 같지도 않기도 해서 나도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할 얘기는 다 끝난 건가?”
[네…. 뭐어, 그렇죠.]
어쩐지 한도훈의 목소리가 떨떠름해 보였다. 아무래도 방금 들은 반휘혈의 이야기가 그에게도 꽤나 어처구니없었나 보다. 나는 그 사실에 쓰게 웃다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늦게까지 고생한다. 잘 자고 내일 보자.”
[…네. 누나도 안녕히 주무세요.]
한도훈의 인사를 뒤로하며 통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숨을 돌린 후, 손으로 이마와 눈을 덮었다. 잠시 피로한 눈을 문지른 나는 곧 볼을 가벼이 두드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밝히던 불을 껐다.
***
한도훈은 통화가 끊은 후, 들고 있던 폰을 책상 위에 힘없이 떨쳤다.
“아-. 진짜, 반휘혀어어얼……!!”
그는 얼굴을 두 손을 덮고는 작은 소리로 절규하듯 외치며 책상 위로 쓰러졌다. 그 덕에 책상 위에 흩어진 종이 더미가 더 산산이 어지럽혔지만 한도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짜증스러운 심경을 감추지 않은 채 머리를 흩트리며 눈살을 찌푸렸더니, 책상 위 한 편에 놔둔 액자 하나를 노려봤다.
“이 바보야, 너 대체 뭐 하는 거야?”
액자 안에 담긴 것은 반휘혈의 사진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재보다 훨씬 더 어린 그와 한도훈 자신이 찍힌 사진이었다. 한도훈은 잠시 액자 너머의 어린 반휘혈을 노려보다가 입을 쭉 내밀며 툴툴거렸다.
“이건 저언~부! 다 네 탓이라고. 나도 이젠 몰라!”
탕, 하고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자 종이 하나가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한도훈은 소리 없이 바닥을 향한 그 종이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보인 내용물에 그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떨어진 종이엔 큼지막한 그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거북이 세 마리가 각각 1, 2, 3 이라는 숫자를 달고 있는 그림이었다. 한도훈은 잠시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른 종이를 살폈다.
다른 종이엔 사람이 찍혀 있었다. 그 인물의 수는 다양한 듯했지만, 초점은 어느 한 남자를 정확히 겨냥한 것 같은 사진이었다. 남자가 가방을 든 채 은행에서 나오는 사진, 그리고 여자와 함께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사진, 또 유흥 주점에서 흥청망청 놀고 있는 사진 등 다양한 사진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한도훈은 그것을 그리 감흥 있게 바라보질 않았다. 그보단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치 마음에 차는 게 없는 것 같은 표정을 짓던 그는 혀를 크게 차며 머리를 흩트렸다.
“…하여간 존-나 철저하다니까, 그 백여우.”
대체 어디서 그 망할 꼬리를 감추고 있는지. 한도훈은 귀찮다는 듯 몸을 뒤로 뉘었다.
“뭐, 그래도 시간문제지만.”
그의 입꼬리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승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오만의 미소였다. 그는 일찍이 이 싸움의 결과를 예견하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자-. 우리의 새로운 보석께선 어떻게 진행되고 계시려나.”
지잉-. 그의 말과 동시에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한도훈은 도착한 메시지의 발신인을 확인하곤 미소를 더 깊게 만들었다.
[보석 같은 경희 누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는 코를 흥얼거리며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하, 하핫!!”
그는 벌려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찢어질 듯 벌어진 입은 쉬이 감추기 어려웠다. 그는 자꾸만 씰룩이는 입가를 참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진짜… 최고잖아?”
황홀한 미소로 젖은 그의 얼굴이 얼핏 액정에 비추었다. 그리고 그 액정 너머에 고고히 새겨진 글귀 하나가 있었다.
[찾았어.]
그것은 한도훈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지임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