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각본. (14)
***
“…….”
반휘혈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이 풀렸는지 교정엔 꽃이 피었고, 바람은 선선하며 태양은 뜨겁지 않았다. 누가 봐도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그런 날씨와 다르게 그의 기분은 꿀꿀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어제, 왜 그랬지.’
그는 어젯밤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의 그는 다분히 충동적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그렇게까지 예민하고도 거칠어졌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여자애 한 명 부탁하는 것뿐이었어.’
그 안엔 어떤 의미도 내포되지 않았었다. 그저 그 여자애, 주연희라고 하는 그 아이의 위신을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심장이 조여드는… 아니,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때 동시에 들었던 생각 하나.
누나가 어떻게 나한테….
그는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충동적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곳에 더 있다가는 해선 안 될 말을 할 것만 같았다. 그는 솟구치는, 이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쏟아져 나오길 바라지 않았다. 그랬다간… 그랬다가는….
…그랬다가는, 뭘?
반휘혈은 머지않아 찾아온 둔탁한 충격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고 눈과 손을 방황시켰다.
왜 자신은 이런 감정을,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이 감정은 대체 뭐지…?
혼란스러웠다. 그는 떨려 오는 숨을 느꼈다. 마치 몸이 제 통제를 벗어난 것 같은 감각이었다.
나는, 나는….
지끈, 시야가 흔들리며 두통이 찾아왔다. 목에서부터 숨이 막히는 갑갑한 기분마저 들었다. 무언가 억눌린 억압이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누나, 를….’
“…어쩌고 싶었던 거지.”
저도 모르게 입에서 작은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신의 목소리에 잠깐 놀란 그의 손이 잠시 움찔 튀었다. 하지만 이내 숨을 크게 고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왜일까. 왜 서이나만 생각하면 그 앞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걸까. 마치 무언가가 강하게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그 앞은 아니란 것처럼. 사고를 정지시키는 기분이었다. 방금도 그랬다. 감정이 그녀로 인해 고조된다 싶다가도 좀 더 깊이 파고드는 순간, 실이 끊기듯 사고가, …아니, 감정이 잘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상해.’
작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괜찮았던 건가? 그렇지만 올해부터 무언가 이상한 건 확실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꽤나 최근부터임은 틀림없었다. 그 추상적인 사실이 반휘혈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가 더 안 가는 한 가지.
“아.”
“…….”
문밖에서 가냘픈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그게 누군지 신경도 안 쓸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반휘혈의 목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아, 안녕…!”
왜일까, 그 목소리만은 귀에 박히듯 들려왔다.
“오, 오늘은 혼자네!”
반휘혈은 문 앞에 서 있는 여학생을 보았다. 그녀는 문 근처를 서성이며 온몸을 가만히 두질 못하고 있었다. 마치 긴장한 것처럼.
“…이상해.”
“어?”
참 이상했다. 왜 저 여학생의 몸짓이, 하나하나, 섬세히 눈에 새겨지는지. 마치 그 광경이 제 마음을 배제한 채 머리에 각인되듯 아로새겨지는 감각이었다.
“이상해.”
그래, 너무나 이상하다. 지나치게 이상하다. 어젯밤의 자신도. 지금의 자신도. …아니, 저 여학생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쩌면 자신은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그 어떤 이유가 됐든 자신의 관심 밖에 일이라면 누군가에게 시선이 갈 일이 없기에, 아, 아니면…
…그날 더럽혀진 책상 건을 도와줬을 때부터 자신은 어딘가 이상했었을지도 모른다.
“……!”
그 사실을 깨닫자 반휘혈의 눈동자가 커졌다. 탄성 어린 소리가 그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런가. 이건 너 때문인 건가?”
“어, 저기… 뭐라고?”
멀리 서 있기 때문인지 잘 들리지 않았던 주연희가 되물어 왔다. 그저 혼잣말일지 모르지만 주연희 자신을 빤히 보며 입을 열었기에 저에게 말을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휘혈은 그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
주연희는 당황했다. 평소 거의 무기질처럼 자신을 대하던 반휘혈이 저를 똑바로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며 발을 뒤로 물렸으나, 그보단 반휘혈이 더 빨랐다. 그는 그 기다란 다리를 몇 번 더 뻗더니, 어느새 주연희의 앞에 당도해 그녀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려 줘.”
“어, 어? 뭐, 뭘?”
그리고 하는 말이 앞뒤 잘라먹은 두서없는 내용뿐. 주연희는 평소와 달리 부쩍 다가온 반휘혈의 얼굴에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고 눈을 방황시켰다. 반휘혈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에 대해서.”
***
“허…업.”
탄성이 저절로 튀어나오던 입이 타인의 손에 덥석 막히었다. 이윤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입을 막은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다정한이었다. 그러다가 옆에서 소리 없이 발버둥을 치고 있는 이에게 곁눈질을 했다.
“!!…!!!…!!!!!!!”
“조, 조용히…!”
눈이 뒤집혔는지 씩씩거리며 보이지 않는 코너를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서이수였다. 그 입을 틀어막고 있는 건 이재현이었으며, 그 몸을 붙잡고 있는 건 김시원이었다. 또 그 근처엔 서강이가 벽에 머리를 박고 졸고 있었다.
“와, 이건 또 걸작이네.”
게다가 이 상황이 우습다는 것처럼 흥미롭게 바라보는 최강혁까지.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가. 그들이 그저 밥을 먹으려 식당으로 향하던 길에 우연히 마주친 멤버라면 믿겠는가. 놀랍게도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근처에서 들려온 소리에 서이수와 이재현이 반휘혈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목도한 현실에 굳어 버렸고, 한발 먼저 정신을 차린 이재현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는 서이수를 막아 세웠던 것이다. 더불어 김시원도 말이다.
“음….”
“…어쩌지, 정한아?”
이윤과 소리를 죽이며 다정한에게 속삭였다. 다정한은 그 말에 난처한 웃음을 그렸다. …사실 저희뿐이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미, 미이친….”
“허어어….”
곳곳에서 들려오는 탄식 소리. 게다가 누군가는 털썩, 쓰러졌다. 그렇다. 문제는 이 복도엔 자신들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있던 탓이었다. 즉 반휘혈의 고백…, 고백 맞나? 아무튼 그 비슷한 것을 꽤 많은 학생들이 듣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 여자앤 뭐 트러블 메이컨가, 그거야? 가만 보면 아주 사건을 몰고 다니네?”
하지만 그 상황은 최강혁에겐 관심 밖이었나 보다. 그보단 방금 반휘혈에게 고백을 받은 것 같은 여학생을 보며 흥미를 띠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지금, 혁이 저 녀석, 저 여자애를 기억하고 있어.’
다정한은 당혹스러운 정신을 다잡으며 지금 상황을 냉정히 살폈다. 그리고 즉각 보인 현실에 쓴침을 삼켜 냈다. 흔치 않은 최강혁의 관심이었다. 평소라면 권태에 젖은 그가 흥미를 띠는 것에 조금이나마 달가워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불길한데….’
평소 이런 복잡한 인간관계에 끼어들 일은 없을 거라 여겼으나, 지금만은 논외였다. 다정한은 그의 관심이 저 가련한 여학생에게 미치질 않길 바랐다. 더욱이 그게 방금 반휘혈이 관심을 표한 여학생이라면 말이다.
“혁아,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말아 줘.”
다정한이 난처히 웃으며 그를 말렸으나, 안타깝게도 최강혁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다.
“ㅇ…! 읍……!!!!”
그리고 근처에서 거센 반항을 이어 가는 한 마리의 짐승…이 아니라 한 사람. 서이수는 치솟는 울화를 견디질 못했는지 손이며 발이며 발버둥을 치려 노력했지만, 이재현과 김시원에 의해 다 막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힘이 점점 감당하기 힘들었던 김시원은 잠시의 틈을 이용해 벽에 기대어 자고 있던 서강이를 차서 깨웠다.
“……?”
난데없는 폭력에 의해 깨어난 서강이는 어리둥절해하며 졸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점차 정신이 들었는지 주위의 소란을 이제야 눈치챈 것처럼 느릿하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아.”
이내 서강이는 이윤과 다정한, 그리고 최강혁을 발견했다. 그는 아는 사람을 발견하곤 소리를 작게 내며 알은척을 해 왔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이윤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잘 잤어, 강아?”
끄덕, 서강이가 대답했다. 다정한도 그에게 손짓으로 인사해 주자 서강이가 세 박자 늦게 손을 들어 마주 인사해 주었다. 다정한은 여전한 듯한 서강이를 보며 하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야, 이 곰탱아…! 정신 차렸으면 이 자식 들어!”
잠시나마의 평화가 유지된 건 한순간이었다. 김시원은 코너 너머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서강이에게 윽박을 질렀다. 흔치 않게 그가 화를 내는 순간이었으나, 품 안에서 거센 반항을 하고 있는 서이수를 막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음.”
서강이는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점점 소란이 커지는 듯한 복도의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남녀 할 것 없이 기함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제 쪽에 있는 친구들을 보았다. 그들은 다른 곳에 비해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굉장히 짧은 거리에서 느껴지는 그 긴박함의 간극이, 둔한 그조차도 참 이질적으로 보였다.
“서.강.이…!!”
한창 이 혼돈스러운 장소는 대체 뭔가, 싶었던 서강이의 귀로 인내심이 한계에 치달은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서강이는 그제야 김시원이 제게 무언가를 말했다는 걸 떠올렸다. 그는 벽에 기대던 몸을 떼어 내곤 둔한 것 같은 움직임으로 그들에게 향했다.
“억…!”
서강이는 발길질로 떠오른 순간을 노려 서이수의 하반신을 순식간에 가로채 붙들었다. 한순간에 파고든 그 억센 힘에 서이수는 흥분한 것도 잊고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재현에 의해 가로막힌 입은 신음조차 제대로 내뱉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강이, 잘 가~. 밥 맛있게 먹어~.”
“응.”
서강이는 그렇게 김시원, 이재현과 함께 서이수를 연행한 채로 떠났다.
“강이가 잘 지내고 있어서 참 다행이야, 그렇지?”
“그러게. 좋은 친구를 사귄 거 같아.”
이윤이 흡족하게 웃으며 다정한에게 말하자, 다정한도 공감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나도 친해지고 싶…, 어?”
이윤은 말하다 말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다정한은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의아하게 이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에 띄게 커진 이윤의 동공은 어느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 안 가 그의 입이 달싹여졌다.
“--ㅍ….”
“응? 뭐라고?”
“…어, 어? 내가 뭐라 했어?”
초점이 없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왔다. 이윤은 눈을 크게 깜빡이며 다정한을 보았다. 다정한은 그런 이윤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말도.”
그의 귀로 들려온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그 어떤 말도 안 한 게 맞을 것이다. 다정한은 간혹 보이는 친구의 기이한 현상을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모른 척하기로 하였다.
***
[잘 판단했단다. 현명한 아이야.]
그리고 그런 다정한은 모르는 새 형체가 불분명한 무언가가 그의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갔다. 그 정체 모를 신비한 존재는 어떤 덩어리의 형태로 방금 자신을 봤던 이윤의 머리도 한번 쓰다듬은 듯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이는 뚜렷한 형상은 없으나 어쩐지 웃고 있을 듯한 온화한 분위기였다.
그는 언젠가 서이나와 마주했던 신비한 존재, 시프였다. 보이지 않은 신체 가운데 중 유일하게 색을 띠던 금빛 한 쌍이 잠깐 일렁였다.
[운명의 사슬이 움직이는구나.]
그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팽팽히 그들을 옭매는 쇠사슬. 아니, 주박과도 같은 운명. 다정한과 이윤에게도 있는 그것이었으나, 고문과도 같이 강하게 얽매여 있는 것은 단 세 사람.
특히나 한 사람에게선 경고하듯 팽팽히 당겨져 온 그 사슬은 허튼수작을 부리고자 한다면 당장이라도 목과 온몸을 파고들 듯 강하게 옥죄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시프의 금안이 가늘어지듯 작아졌다.
[뻗어 가는 방향은 다를지라도 그 운명의 중심은 같다.]
그 종착역은 과연 이전과 같을지, 다를지…. 시프는 조용히 눈을 감다가 툭, 하고 누군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서이나(徐利拿). 기회를 붙잡는 자여. 그대는 종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그 말을 끝으로 그의 형체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