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53화 (153/306)

153. 각본. (15)

***

“…느아…! 으븝!! 아, 진짜 놓으라니까!!”

“이수, 네가 진정하면 놓을게.”

“으브븝!!”

대롱대롱 들려 가고 있던 서이수는 고개를 강하게 도리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이재현과 김시원은 그가 여전히 진정되질 않았다는 판단을 내린 터라 도무지 내려 주질 않았다. 그로 인해 서이수의 바짝 오른 성질은 점점 시커멓게 탈 뿐이었으나, 건장한 또래들 세 명의 완력을 이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운동을 하는 김시원이나 덩치가 산만 한 서강이는 몰라도 제 입을 다시 막는 이재현은 공부만 하는 놈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잠자코 있을 서이수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를 장소로 이동하는 내내 지랄맞다 싶을 정도로 거센 반항을 이어 갔다. 덕분에 김시원과 이재현, 그리고 서강이는 당장이라도 이 활어마냥 펄떡이는 생물을 던져 버리고픈 충동에 빠졌지만 꾹 참았다. 이 상태에 있는 그를 길에 그냥 풀어 뒀다간 돌아가서 무슨 사고를 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주위의 이목을 받든지 말든지 학교의 후미진 장소로 빠르게 이동했다.

“…아, 그냥 헤어지라고!”

“흐어어어엉….”

막 적당한 곳에 다다를 즈음이 되었을까, 문득 김시원은 이상한 소리를 포착했다.

“그으으읍…!!”

하지만 이쪽도 만만찮게 이상한 소리와 거센 반항을 이어 가서인지 뒤에 있던 두 사람은 듣지를 못했다.

“야, 잠…!”

김시원은 빠르게 발을 멈춰 보라 제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서이수의 몸이 한번 크게 날뛰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중심을 잡던 그들은 저절로 그 벽에서 튀어나왔다.

“아, 진짜 환장하겠네! 제발 좀 그만 울어…!”

“흐이이익…!”

그리고 김시원과 이재현은 보았다. 자기보다 큰 여성을 벽에 가로막은 채 험상궂은 얼굴로 협박을 하고 있는 작은 여성을. 그리고 그게 그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익숙한 인물임을.

“으갹!! 야,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갑자기 놓…으……면…….”

저도 모르게 충격으로 손에 힘이 빠진 김시원과 이재현은 서이수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난데없이 바닥을 구르게 된 서이수는 그들에게 쌍욕을 날렸으나, 이내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얼결에 목도하곤 자신도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

“훌쩍. 히끅.”

눈이 마주쳤다. 한참을 멍하니 입을 뻐끔거리던 서이수가 겨우 말을 내뱉은 것은 겨우 한 단어였다.

“……누나?”

***

나는 현재 심히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히끅, 흐어어, 어어어엉.”

눈앞에선 문설희가 울고 있는 것도 모자라,

“시발….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흐어어엉….”

동생들에게 쓸데없는 오해까지 받게 생겼다. 게다가 문설희는 쟤네들이 오고 나서 더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아이들에게 가벼이 손짓했다.

“…그냥, 못 본 척하고 가라.”

“이미 봤는데 뭘 못 본 척을 해….”

아오. 저 도움 안 되는 새끼. 나는 살벌히 얼굴을 굳히며 서이수를 노려봤다. 그러자 서이수가 흠칫거리며 뒤로 몸을 슬쩍 빼는 게 보였다. 그러곤 조용히 일어나더니 이재현의 어깨를 턱 잡았다.

“…이수야?”

“재현아, 부탁할게.”

“으, 응?”

“누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이 중에 너뿐이야. 누나의 비행을 막아, 줣!!”

가만히 그 행태를 듣던 나는 참다못해 신고 있던 실내화를 벗어 쓸데없이 비장히 말하고 있는 서이수를 향해 날려 버렸다. 얼굴 정면에 실내화로 강타당한 서이수는 다시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그런 동생 놈에게 콧방귀를 한 번 날려 주곤 다시 문설희를 보았다.

“흐이이익….”

문설희는 방금 내가 서이수를 날려 버린 걸 보곤 두려움이 더 커졌는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히 질렸다. 불쑥 이 상황이 귀찮게만 여겨졌다. 잠시 푸르른 하늘을 본 나는 문설희에게 다시 경고했다.

“문설희. 다시 말하지만 난 너 안 때린다고.”

그렇다. 사실 난 문설희를 때린 적이 없다. 억울하게도 이 아이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울음을 터트린 것뿐이었다. 그에 나는 당황해 울지 말라고 달래도 보았으나, 끝내 달래지지 않는 울음에 체념과 동시에 답답함이 들어 본론을 꺼내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저 자식들까지 등장하니 내가 이 상황이 오죽 짜증 나겠는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붙잡았다.

“어, 때리려는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재현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 나는 그 말이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황당히 쳐다 보았다.

“내가 얠 왜 때려. 나 웬만해선 일반인 안 건드려.”

물론 그런 일반인이어도 날 공격하려 들면 자기 방어용으로 반격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에서만 그치지, 크게 제압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 물론 훈육이 필요한 양아치들은 제외다.

“그리고 얠 봐. 이렇게 삐쩍 말라선 때릴 데가 어디 있어?”

나는 문설희의 가는 팔을 가리키며 가볍게 혀를 찼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아주 뼈가 보일 정도로 말랐다. 이런 애는 때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가도 사라진다.

“나는 그냥 가볍게 경고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애들은 가라.”

나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경계하듯 보던 문설희가 코를 훌쩍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 진짜 안 때려…요?”

“너 아까부터 존대인지 반말인지 하나만 정해. 그리고 안 때리니깐 제발 그만 울어. 머리 아프니까.”

이리저리 바뀌는 말투나 그녀의 울음소리가 지겨웠던 나는 질린 낯을 감추지 않았다.

“…근데, 방금 헤어지란 소린 뭐예요?”

그때, 계속 상황을 살피는 듯 가만히 서 있던 김시원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응? 헤어져? 누가?”

“이건 또 뭔 소리래.”

…아오. 쟨 대체 그건 또 언제 들었대.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김시원을 바라보았다. 이재현은 눈을 크게 뜨며 나와 문설희, 김시원을 요리조리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서이수는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지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맨 뒤에 있던…,

‘……쟨 왜 저기 끼어 있는 거지?’

나는 불쑥 눈에 들어 온 거구의 남학생. 서강이를 뒤늦게 발견하곤 동공이 잠깐 떨려 왔다. 그런데 서강이 저 녀석도 자신이 이곳에 왜 있는지 모르겠던지 우주를 떠도는 듯 멍한 기색이었다. …아니, 그냥 졸린 건가?

나는 긴가민가하며 녀석을 보길 잠시, 이내 고개를 돌리며 문설희를 보았다. 문설희는 여전히 겁을 먹은 채로 나를 쭈뼛쭈뼛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때리지 않겠다는 말이 확실히 효과는 있었는지 침을 꿀꺽 삼키다 아이들 쪽을 한번 흘깃 보곤 그녀의 수그러진 자세가 좀 더 펴졌다.

“나, 난 잘못 없어. 그, 그러니까 안 헤어질 거야…!”

‘…어쭈?’

갑자기 태세가 바뀌었다. 아까까지 울던 놈 어디 갔나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결정하며 팔짱을 꼈다.

“잘못이 없어?”

“그, 그래. 내가… 말을 좀 잘못하긴 했어도! 너한테 헤어지란 소리 들을 군번은 아니거든?!”

문설희의 목소리는 살짝 떨려 왔지만 아까보단 당당했다. 나는 그 모습에 눈썹을 살짝 모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 그거 때문에 헤어지란 거 아닌데?”

“뭐, 뭐? 그럼 왜….”

아무래도 아까 반에서 내 뒷담화를 한 것 때문에 내가 이런 줄 착각한 모양이다. …물론 그게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화가 났다. 화가 났지만, 그것은 내 결심에 박차를 가해 주는 요소가 되었을 뿐 주된 원인은 되질 못했다. 나는 체육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사진 세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거 보면 답 나올걸.”

“그게 무슨… 헉.”

그도 그럴 게 그런 뒷담화론 그 사진 속 외도의 현장을 이길 순 없었으니까 말이다. 겨우 뒷담화 정도였다면 고찬영에게 여친 인성 잘 보고 사귀라고 직접 말했을 거다. 그녀 본인을 찾아올 게 아니라.

나는 숨을 들이켜며 손을 떠는 문설희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파들파들 몸을 떨더니 이내 털썩,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이걸 어, 어, 어떻게….”

“문설희.”

나는 그 앞에 몸을 같이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게 말할 때 헤어져.”

이것은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으며, 아직은 어린 그녀를 향한 배려였다. 더 상황이 늦기 전에 발을 빼 주길 바랐다. …적어도 고찬영이 상처를 덜 받기를 원했으니까.

“…시,”

싫어.

하지만 나직이 새어 나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펴려던 몸을 굳혔다. 끝내 고찬영과 헤어지기 싫어하는 그녀의 이기심에 염증마저 일 지경이었다. 나는 얼굴을 싸늘하게 가라앉히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야. 넌 이 상황이 장난 같아?”

좋게 말하니깐 아주 끝도 없네. 문설희의 심보에 나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하, 하지만…!”

“문설희.”

나는 한숨을 내쉬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발끈하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난 진짜 찬영이를 좋아…! 꺄악!!!”

문설희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감쌌다. 그녀의 머리 위로 투둑, 하고 잔 먼지가 떨어졌다.

“야.”

나는 주먹을 벽에 꽉, 눌렀다. 순간적으로 강하게 내려친 벽은 움푹 파여 들어가 먼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입조심해.”

감히 그 말을 입에 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 입에서 듣고 싶지도 않았다. 듣는 순간 난 정말 진심으로 이 자식을 때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문설희는 내 경고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곤 홀린 듯 나를 보는 그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곧 눈물을 참듯 이를 꽉 깨물었다.

“주, 찬이랑 헤, 헤어졌었어…. 헤어졌었는데…. 나, 나라고 찬영이를… 찬영이를 배신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그 말을 채 다 듣지도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어쩌라고.”

그래 봤자 네가 바람을 피운 건 변하지 않는다. 설령 어쩔 수 없었다 쳐도 나는 바람을 그따위 명분으로 가려 버리는 게 달갑지 않았다.

“하, 하지만 걔, 주, 주찬이가 헤어지면 나보고 죽이겠다고…!”

“그럼 더더욱 찬영이한테 상의를 했어야지-!! 아니면 사귀지를 말든가!!!”

나는 그녀의 변명을 채 다 듣지도 않고 잘라 버렸다. 당장이라도 다시 주먹을 갈기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아픈 건 내 주먹이라 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리고 변명도 적당히 해. 문설희.”

나는 아까와 다른 주머니에서 꺼낸 사진을 던지듯 그 앞에 뿌렸다. 그 사진은 오늘 아침 안경희가 내게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엔 문설희가 그 주찬인가 뭔가 하는 놈과 함께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엔 여러 개의 명품 로고가 그려진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또 주연희의 책상을 더럽히고 있는 것도 말이다.

“이, 이건….”

문설희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더 이상 빠져나갈 퇴로를 잃은 듯한 그녀를 나는 질색하며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 경고야. 문설희.”

나는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단호히 말했다.

“당장 헤어져. 네 입으로 직접.”

안 그러면 그다음은 내가 나설 테니까. 나는 마지막 경고를 그녀에게 때려 박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뭐야, 이건?”

…아니, 그러려고 했다.

갑자기 우리 사이에 끼어든 서이수, 내 동생 놈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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