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55화 (155/306)

155. 각본. (17)

***

혼란스러운 점심은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갔다. 어쩐지 나나 내 친구들이나 어딘가 충격을 먹은 것 같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야자가 끝난 시간이 되었다.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방 안에 있는 마스크와 모자를 꺼내어 쓴 후, 한적한 복도를 확인하곤 밖을 나왔다.

“오, 누나. 그 모습도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되도록 이 모습 다시 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스크를 다시 추켜올렸다. 혹시나 싶어 매번 상비하고 다녔지만, 이렇게 또 쓰일 줄이야. 나는 떨떠름한 낯을 지으며 한도훈에게 말했다.

“음성은 확인했어?”

“그럼~요.”

“어땠어?”

한도훈이 내 말에 씨익 웃었다. 마치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은 듯한 분위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네. 저희는 1반에서 기다리면 돼요.”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그다음부터 소리를 죽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서이수가 제안한 작전이었다. 일명 함정에 걸린 양아치를 포획하라! 라는 간략한 내용이었으나, 그로 인해 나타난 반발도 예상해야 했기에 변장은 필수 불가결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이럴 줄 몰랐는데.’

되도록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만일의 변수를 생각해 둬야 했다. 설마 학교에서까지 싸움에 휘말리다니, 정말 인생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하며 반 문을 열었…,

“오.”

“아.”

“누나!”

“…….”

…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곁에 서 있는 한도훈에게 말했다.

“도훈아, 내 눈이 삐었나? 방금 헛게 보인 거 같아.”

“……실은 저도 그래요.”

한도훈도 나 못지않게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우리는 한 차례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다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누우~나!”

그리고 바로 덮쳐 오는 솜사탕 머리 하나. 나는 그 묵직한 무게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처럼 뼈에 깊숙이 와닿았다.

“저리 안 비키냐, 이윤?!”

이윤이 내 목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리고 있는 모습이 심히 아니꼬웠는지 한도훈의 눈에 불이 켜졌다. 한도훈은 이윤의 뒷목을 잡아당기며 내게서 그를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이윤은 그럴수록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싫어, 싫어! 나도 누나랑 있을래! 도훈이는 욕심쟁이야!”

“시이-발! 꺼져!!”

“…저어기, 애들아, 나 너무 무겁다?”

날 좋아해 주는 건 상관없다만, 나 좀 배려해 주지 않겠니…? 나는 넘어지지 않게 몸에 힘을 주며 버티는 것도 한계였다. 더럽게 힘 센 남고딩들 같으니. 각자의 패거리 중 귀여움을 담당하는 놈들은 그 얼굴과 상반되게 힘이 강하단 걸 이 순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누나 무겁다잖아! 도훈이 때문이야!”

“뭐, 이 새꺄?!”

“도훈이는 키 커서 무거워졌거든요~? 난 도훈이보다 작아서 가볍거든요~?”

…아니, 그렇게 말하는 너도 나보다 키가 더 크잖아. 나는 싸늘히 식은 눈빛으로 날 기만하는 듯한 말을 하는 이윤을 노려봤다.

“이, 이익…!!!”

“헹!”

그런데 그 어이없는 말에 승부가 정해졌나 보다. 한도훈은 이를 갈며 분한 듯 주먹을 쥐더니 이윤의 목덜미를 털어 내듯 강하게 놓았다. 이윤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내게 더 엉겨 붙어 해맑게 미소 지었다.

“누나, 저 누나 도우러 왔어요! 기특하죠? 장하죠?”

“…엥?”

정말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안 그래도 여기에 왜 있냐고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이 답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당히 이윤을 보는데 이윤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강이가 알려 줬어요! 나쁜 놈 처리한다며요!”

……너였냐, 서강이?! 예상치 못한 원인 제공자에 눈을 부릅뜨며 이번만큼은 졸지도 않은 채 조용히 나를 외면하고 있는 놈을 노려봤다. 그러자 다정한이 슬쩍 그 커다란 덩치를 제 몸으로 가리며 내게 조심히 그를 변호했다.

“죄송해요. 선배. 끼어들 생각은 없었는데…. 얘 다그쳐서 알게 된 건 저희예요. 얜 잘못 없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듣던 이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파드득 저었다.

“엥…?! 아니에요! 제가 강이 독촉해서 알아낸 거예요! 아까 누나 동생이 끌려간 이후가 너무 궁금해서…. 그래서 제가 말하기 싫어하는 강이한테 억지로 알아낸 거예요. 두 사람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너 이 새끼, 결국 네가 원흉이었잖아!!”

이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한도훈이 옳다구나, 하고 바로 이를 드러냈다. 나는 그런 한도훈에 손을 뻗어 진정하란 제스처를 취한 후, 시선을 어느 한 군데로 돌렸다.

“그래, 그건 어쩔 수 없다 치자. …근데 넌 왜 있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 존재. 바로 최강혁이었다. 다른 놈들은 이윤의 무데뽀에 휩쓸려 왔다 치더라도 쟨 여기 있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모자와 마스크에 가려서 잘 보이진 않을지라도 떨떠름하니 그를 바라보자, 최강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재밌어 보여서.”

“…….”

그래, 그렇구나…. 저 녀석을 이해해 봤자 나만 손실이 큰 기분이었기에 나는 더 파고들 생각을 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그런데 최강혁이 기대던 벽에서 몸을 떼어 내며 뜬금없이 운을 띄웠다. 이번엔 또 뭔가 그를 보자, 최강혁은 긴 다리로 건들거리며 쭉쭉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게 그 유~명한,”

불쑥, 최강혁의 얼굴이 내 얼굴 지척에 다다랐다.

“조커인가?”

그가 히죽, 웃으며 흥미를 보였다.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달빛에 의해 예리하게 빛나는 붉은 눈을 마주 보다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으래. 그 유명한 조커시다.”

나는 대답해 주면서 그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 저 멀리 치워 버렸다. 최강혁은 순순히 밀리면서도 히죽거리는 웃음을 지우질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곰이나 거인 같다고 하던데….”

이 자식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자연스럽게 몸에 긴장이 들어갔다. 그러나 최강혁의 이죽거림은 멈추질 않았다.

“이렇게 꽁꽁 싸매니깐 더 땅콩 같은데? 땅콩 선배.”

“아니, 이 새끼가?!”

“뭐, 인마? 누나가 아무리 작아도 너한테 놀림 받을 이유는 없거든?!”

내가 발끈해 외치자, 한도훈도 같이 거들어 줬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심히 내 편 같지가 않은 게 문제였다. 넌 누구 편이냐고 한도훈에게 버럭 한 소리 하고 있자, 갑자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나는 최강혁을 잠시 노려보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동생놈(으)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아주 숨어있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시지!!!!!!!!!!!]

아차. 나는 뒤늦게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학교에 이 늦은 시간 동안 남아 있는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최강혁의 놀림에 대한 짜증이 사그라든 건 아니었기에 마스크 안으로 얼굴을 와락 일그린 채였다.

“…땅콩?”

그런데 가만히 내게 매달려 이 상황을 관전하던 이윤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너도 놀리게?”

“네? 아뇨, 그게 아니라 그거 혁이가 조….”

“쉿, 왔대요.”

조… 뭐? 타이밍 좋게 끊긴 대답이 신경 쓰였지만, 한도훈의 말에 곧장 관심을 끊고 숨죽인 채 문밖 너머의 복도에 모든 감각을 기울였다.

타박, 타박.

여러 개의 발소리가 복도 너머에서 들려왔다.

“에이씨, 이 시간에 왜 부르고 지랄이야.”

“난들 아냐. 시발.”

“입 좀 다물어, 수위 오면 존나 귀찮아진다고.”

…세 명인가. 나는 한도훈은 바라보았다. 한도훈은 밖으로 주시하며 내게 기다리라고 손을 뻗고 있었다. 곧 남학생들이 2반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열자 한도훈이 그 문소리에 맞춰 문을 열었다.

“우와, 도훈이 스파이 같아요. 짱 멋지당.”

이윤이 그런 한도훈을 보며 눈을 빛내면서 내게 속삭였다. 난 여전히 매달려 있는 이윤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주고 한도훈이 행동을 지켜보았다.

한도훈은 그들이 2반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곤 복도에 잠시 대기했다. 2반에서 여러 명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참신하게 괴롭힐 방법이 뭔데?”

“재미없기만 해 봐. 시발.”

“여기까지 불러내 놓고 별거 아니면 죽는다.”

…저 중에 전 남친, 즉 현재 문설희랑 바람피우고 있다는 놈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꽤나 입이 건 양아치놈들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 말하기 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너희들 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나는 거야? 이 여자앨 괴롭혀서 나오는 게 뭔데? 그거랑 관련 있는 거야?”

미리 2반에서 대기를 타고 있던 문설희의 목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문설희는 그들의 말에 잠시 주춤했지만,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들은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원래 계획 안에 포함되었던가? 나는 그냥 오자마자 잡을 거라 생각했기에 지금의 상황이 얼떨떨했다.

“킥, 알아서 뭐 하게?”

“왜~. 나도 어떻게 보면 너희들 일원인데. 좀… 얻어 가는 게 있어야 되지 않겠어?”

그리고 그녀는 잠시 공백을 두곤 은근한 뉘앙스로 말했다.

“또… 너, 찬영이한테 한 방 먹이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내 조력이 필요할 텐데, 어때?”

“흐음….”

그 말에 양아치 한 놈이 고민하는 것처럼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았다.

“좋아. 드디어 말귀를 알아 처먹으니 좋네.”

“야, 그거 말하게?”

“그럼. 얘가 고찬영 약점 불어 준다잖아. 시발. 내가 걔 족치고 만다.”

“킥킥, 미친놈.”

듣기만 해도 짜증이 이는 목소리였다. 나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한도훈을 콕콕 건드렸다.

언제 쳐들어가?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발을 살짝살짝 들어 올리며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언제든 들어갈 준비 만만인 걸 보여 주자 한도훈이 잠깐 눈을 크게 뜨다가 곧 작게 숨죽이듯 입가를 가리더니 진정하라는 것처럼 손바닥을 보였다.

조금만 더요.

그 대답에 김이 푹 새는 것같이 몸에 힘을 빼며 입을 삐죽였다.

‘저걸 더 들어야 하다니….’

여자를 낮잡아 보고, 여자는 거기에 수긍하며 아양을 떠는 목소리를 듣기가 더는 싫었다. 그냥 불쾌하다. 빨리 한도훈의 지시가 내려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길 잠시, 내 귓가로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에게 아주 좋은 물주 한 명이 있거든. 정확히는 정보 제공자지만.”

…물주? 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한도훈을 보았다. 그리고 내 눈에 비친 한도훈의 표정은 아까완 확연히 다른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포착한 위협적인 미소였다.

“정보 제공? 그게 뭔데?”

“너 거북이 경주라고 알아? 경마 같은 건데, 거기서 1등 한 놈한테 베팅하면 돈을 쓸어 모으거든. 내가 그 사이트 관리자랑 아는 사이라 이 말씀이다, 이거야~.”

“와, 저걸 진짜 다 부네. 미친 새끼.”

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저 내용은 즉…,

“…도박?”

내 귓가로 이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낯이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인간이 이 여자애 괴롭히면 번호 알려 주기로 했지. 그때마다 용돈벌이 좀 쏠쏠했다? 큭큭.”

“아, 근데 그 여자애 존나 독하더라. 시발. 자퇴 어떻게 시켜야 되는 거임?”

“자퇴…? 자퇴라니, 그게 무슨….”

문설희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나 또한 선을 넘은 그들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 자퇴시키면 앞으로 반년 동안 번호 계속 제공해주기로 했다, 이 말씀이야. 존나 쩔지 않냐?”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바로 울컥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바로 반으로 뛰쳐 들어갈 뻔했다.

“큭큭큭….”

바로 옆에서 터진 한도훈의 웃음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설마.”

나는 그제야 한도훈이 원하던 바가 그들의 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한도훈은 치솟는 입가를 감추지 않은 채 그대로 앞문을 열었다.

“이야, 이거 재밌는 소리를 하네요. 주찬이 형.”

짝짝짝. 그의 손에서 경쾌하지만 느긋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뭐, 뭐야, 시발?!”

“누구야!!”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은 2반 교실 안에 있던 이들로 하여금 기함을 안겨 주었다. 한도훈은 그런 그들을 여유롭고도 유쾌한 미소를 활짝 그리며 화답했다.

“아, 이런. 실례. 도박쟁이라고 불러야죠,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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