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각본. (18)
“하, 한도훈…?!”
“왜, 왜, 왜 저 자식이 여기에…?!”
한도훈이 나타나자 양아치들이 꽤 당황한 것처럼 주춤거렸다. 그중 가운데 있던 양아치가 휙, 하고 당장 문설희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돌아봤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네, 네가 저 새끼 부른 거야?!”
“어, 어? 그, 그게….”
문설희는 그런 양아치의 손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거리를 벌리긴 하였으나 선뜻 대답을 망설였다.
“새끼라뇨. 듣는 새끼 기분 나쁘네요. 주찬이 형. 어쩜 도박쟁이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언사가 천박한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런 그들 사이로 한도훈은 느긋이 책상을 끌어 그 위에 걸터앉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 그는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과장하며 입을 벌리곤 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 그깟 도박 하나 때문에 발닦개를 자처하는 짐승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기대하면 안 되죠, 참?”
한도훈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사과했다.
“뇌 빠진 짐승들에게 무슨 기대를 했는지 모르겠네요. 미안해요, 개새끼들, 씨?”
교실 안에 상큼한 목소리가 울렸다. 누가 들어도 속을 박박 긁는 고상한 언사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누가 악당이지?’
아직 교실 안으로 들어간 건 한도훈뿐이었지만, 이미 저 녀석 하나만으로 분위기가 압도됐다. 아까까지 기세등등했던 양아치 놈들은 마치 악마의 계략에 빠진 희생양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이 상태대로라면 굳이 내가 끼어들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아, 아까부터 누가 도박쟁이라는 거야!”
“그, 그래! 우린 그냥 게임 얘기를 한 거뿐…!”
되지도 않는 개소리를. 아까 들은 얘기가 있다 보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대변한 것처럼 틱- 하고 교실에 설치된 TV가 켜지며 그들의 말을 잘랐다. 갑자기 새어 나오는 빛에 뭔가 싶어 살짝 그 안을 살펴보자 사진 하나가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요즘 다크 웹에서 이런 게 유행하더라고요.”
그 사진 속 안에 있는 것은 거북이 그림이었다. 정확히는 세 마리의 거북이가 각자 숫자를 등에 지고 출발선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여기 베팅 당 열 배…. 뭐 이런 미친 배수라고 하던가요? 아무튼 한 번 투자에 성공하면 돈을 긁어모으기 정말 최고긴 할 것 같네요.”
하지만 한도훈은 말하는 내용과 달리 반응이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그, 그래서 이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감흥 없는 설명에 양아치 한 놈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자 한도훈은 픽, 웃으며 턱을 괴었다.
“진정해요. 안 그래도 물어볼 참이니까.”
틱-, 어느새 한도훈의 손에 들려 있던 작은 리모컨의 버튼이 눌러졌고, 동시에 화면이 바뀌었다.
“XX 주점 150만 원. DD 백화점 270만 원. AAA 백화점 380만 원…. 그 외에 모든 유흥비 총지출 금액이 대략 1,200만 원.”
그것은 그들이 이곳저곳 지출을 일삼는 사진들이었다. 그들은 그 사진들을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산층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일반 가정에서 사채도 쓰지 않고 이 정도 씀씀이라… 이 짧은 시간에 참 많이도 해 처먹었네요?”
틱- 또 사진이 바뀌었다. 아까부터 고개를 살짝 빼 상황을 살피고 있던 난 눈을 크게 떴다.
그 사진들은 그동안 주연희를 괴롭히던 장면들의 총망라였다. 나는 망연히 벌어진 입과 함께 얼굴을 굳혔다. 그 괴롭힘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았고, 그 안에 담긴 악의는 가히 심장을 차갑게 만들었다.
“뭐야, 저게….”
그리고 내게 붙어 있던 이윤도 나처럼 놀란 모양인지 얼굴을 굳히며 짧게 중얼거렸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사태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그녀의 삼촌이 운영하는 가게가 뒤엎어진 것은 물론이요, 교내 괴롭힘뿐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난데없는 물 폭탄을 맞은 것처럼 쫄딱 젖었다든지 계란을 맞았다든지 꽤나 짓궂은 괴롭힘이 하루도 빠지지 않은 것처럼 일어난 듯 보였다. 누가 보아도 한 사람을 향한 의도적이고도 뻔한 악질이 분명했다.
“저, 저게 도박이랑 무슨 상관…!”
그러나 이런 적나라한 증거와 정황에도 불구하고 일진 한 명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우리에게 아주 좋은 물주 한 명이 있거든. 정확히는 정보 제공자지만.]
그렇지만 한도훈은 손짓 한 번에 그들의 말을 일축시켰다.
[정보 제공? 그게 뭔데?]
[너 거북이 경주라고 알아? 경마 같은 건데, 거기서 1등 한 놈한테 베팅하면 돈을 쓸어 모으거든. 내가 그 사이트 관리자랑 아는 사이라 이 말씀이다, 이거야~.]
[그리고 그 인간이 이 여자애 괴롭히면 번호 알려 주기로 했지. 그때마다 용돈벌이 좀 쏠쏠했다? 큭큭.]
[아, 근데 그 여자애 존나 독하더라. 시발. 자퇴 어떻게 시켜야 되는 거임?]
[자퇴…? 자퇴라니, 그게 무슨….]
[아, 자퇴시키면 앞으로 반년 동안 번호 계속 제공해 주기로 했다, 이 말씀이야. 존나 개쩔지 않냐?]
뚝, 한도훈의 폰에서 울리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반 안은 피부를 짓누르는 듯한 침묵이 그들을 에워쌌다. 한도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들을 내리깔 듯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 사람 인생 망쳐 놓은 값은 달았나, 개새끼들?”
그의 오만한 미소가 양아치들에게 향했다. 양아치들은 숨도 못 쉬는 것처럼 어두운 교실 안임에도 불구하고 창백히 낯이 질려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때 사이로 가녀린 미성이 뚫고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뒷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잠시간 잊고 있던 존재에 아차 싶어졌다.
“…연희야.”
저절로 탄식 섞인 소리가 입에서 속삭이듯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주연희가 이곳에 있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것은 서이수의 작전 중 하나였다. 주연희에게 서이수네와 함께 3반에 숨어 덫에 걸린 범인들을 밝히는 것. 그래서 적당한 응징을 내리는 것이 그 작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설마 돈 때문에 이리 상황이 커져 있을 줄 몰랐었다. 그것은 주연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저 자신을 괴롭히는 가해자의 면상을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한도훈한테 미리 설명이라도 들어 놓을걸!’
주연희를 괴롭히는 가해자들이 저 녀석들이란 걸 알고 있다고 해서 대략의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내 실책이었다. 설마 이 앞으로 더한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모든 걸 맡겨 놨더니 이렇게 상황이 심각하게 굴러갈 줄 몰랐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 다 돈… 때문에?”
주연희는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내저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처참히 일그러졌다. 제발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호소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왜, 왜…? 나, 난 내가, 내가 폭력을 써서… 걔 뺨을 때려서, 그래서, 그래서 잘못한 거라고, 그렇게… 그렇게…!”
처절한 목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그 소리에 숨이 턱 막혀 오는 것만 같았다.
“뭐, 뭐 틀린 건 아니잖아! 네가 최강혁 때려서 이렇게 된…! 윽!”
“멍청이 새꺄, 뭐라 지껄이는 거야!!”
어쩌지도 못하고 굳어 있던 그때, 양아치들 사이에서 들려온 말에 나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려 그 양아치를 보았다. 전 일짱은 황급히 말실수를 한 친구를 때리며 말렸으나, 이미 물은 엎지른 뒤였다.
“뭐…? 어, 어, 뭐, 뭐라고?”
그 말에 주연희가 머리가 새하얘진 것처럼 반응이 둔해졌다. 게다가 이번에 반응이 인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내 뒤에서 상황을 관전하던 최강혁이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내 곁을 지나가며 본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허, 시, 시발….”
“왜, 왜 최강혁까지….”
“아, 아냐! 이, 이건 얘가 헛소리를…! 그래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갔다. 그것을 양아치들이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나는 최강혁의 개입에 겨우 정신을 차리긴 하였으나, 아직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잡질 못하고 눈만 굴려 댔다.
“내가, 내가, 때려서 그런 게 맞다고…? 무슨 소리야, 이게?”
“야, 따까리. 설명해. 지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꼴인지.”
주연희의 당혹스러운 음성과 함께 최강혁의 묵직한 목소리가 반에 울렸다. 그런데 최강혁의 타깃은 양아치들이 아니었다. 그는 영민하게도 정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이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최강혁의 분위기가 첨예하게 세워져 반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하.”
그러나 한도훈은 그의 위압에 영향 따위 없다는 것처럼,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비소를 달며 그를 서늘히 보았다.
“내가 왜?”
한도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최강혁에게 다가갔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나는 그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냥 알려 주면 될 것을 왜 저렇게 튕기는 건데? 아까까진 잘만 말하던 한도훈이 날을 세우고 있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난 상황도 잊고 잠시 멍청히 눈을 깜빡였다.
‘설마, 최강혁이 명령조로 말했다고 저러는 건 아니지…?’
그렇지만 설마가 사람 잡을 것 같았다. 왠지 그 가설이 진실일 것 같은 감각에 나는 등골에 때아닌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 그치만 날 부른 건 너희잖아! 그럼 알려 줘야 되는 거 아니야?”
주연희는 한도훈의 갑작스러운 날 선 반응에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곤 그에게 항변했다. 나도 그녀의 말에 동조하듯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이건 내 작전이 아니라 서이수 작전이었는걸. 원래 내 작전엔 넌 있지도 않았어.”
아오, 저, 저, 저 고약한 성질 머리 좀 보소? 한도훈의 지랄맞은 성격에 나도 모르게 욕을 중얼거렸다.
“저 개만도 못한…!”
그것은 복도에서 대기 타던 서이수도 마찬가지였는지 결국 모습을 드러내며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그런 서이수 뒤로 이재현이 서이수의 팔을 황급히 잡으며 말렸다.
“진정해, 이수야. 도훈이 성질 머리 못된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이재현, 너 그거 무슨 소리야!”
이재현의 만류를 듣던 한도훈이 버럭 성질을 냈다. 곧 죽어도 자기 욕 듣는 거 싫어하는 애새끼의 모습에 나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미, 미친…. 쟤네들도 있는 거야?”
“뭐야, 시발. 이거 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하나둘씩 숨어 있던 녀석들이 나타나자 교실 안에 있던 양아치들이 겁을 먹고 웅성거렸다. 나는 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방향에 머리를 싸맸다. 주연희를 바라보니 그녀는 한도훈의 성질 머리를 직접 맞닥뜨리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잔뜩 억울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네.’
이번 두통의 주요 원인은 무조건 한도훈이다. 이번엔 좀 조용히 구경하나 싶더니, 결국 내가 나서야 하는 건가. 급작스럽게 몰려오는 피로감에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내가 바보지. 내가 병신이지. 고찬영과 문설희가 빨리 헤어지길 바라는 마음과 주연희가 하루빨리 괴롭힘에서 해방되길 바라 성급히 움직인 내 잘못이었다. 서이수도 다른 아이들도 아는 수준이 나와 비슷했을 터였다. 저 양아치들이 주연희를 괴롭히고, 고찬영의 여친이 그 괴롭힘에 가담하면서 전 남친과 바람을 피운다. 그러니 저들도 드러난 깊은 수렁에 꽤나 당황했을 터였다. 뒤늦은 후회가 물 밀듯 밀려들어 왔으나 이미 늦었다.
“……큭.”
그런 와중에 최강혁이 돌연 실소를 흘렸다.
“아- 그래, 맞아. 넌 이런 놈이었지? 잠시 내가 잊고 있었네.”
“그걸 잊고 있었다니, 넌 여전히 멍청하구나?”
한도훈은 지지 않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이죽거렸다. 하지만 최강혁은 별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드밀며 한도훈에게 다가갔다.
“넌 여전히 겁도 없이 까불지. 예전에 다리 부러진 곳 다시 부러트려 줘?”
언제 한번 최강혁에게 이렇게 개기다가 다리 부러진 적 있나 보다. 그런데 왜 그럴만 했다고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네…. 나는 잠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 정말이지. 폭력밖에 모르는 무뢰배의 수준 참 거기서 거기다, 그치? 힘도 있고 빽도 있으니까 참 겁이 없어.”
그렇지만 역시 가만히 있을 한도훈은 아니었다. 그는 최강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같이 노려보며 조소를 그려 댔다.
“그러니까 남이 길을 만들어 주는 것도 모르고 멋대로 사는 거겠지만.”
우뚝, 최강혁의 몸이 굳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묻자. 그런 삶을 사는 건 무슨 기분이야? 응?”
…미친. 나는 반사적으로 욕을 뇌까렸다. 이 순간 머릿속 경고등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하자,
‘누군가가 써 놓은 각본 위에 놀아나는 기분…이라고 하면 알려나.’
그와 함께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위험하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것은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 그대로의 본능이었다.
“말해 봐. 최강혁. 꼭두각시 같은 삶은 어떤… 얿!!”
한도훈이 날아갔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의 몸이 교실 안을 누볐다. 한도훈은 아릿한 충격에 고개를 잠깐 털더니 죽일 듯한 시선으로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하나 그 얼굴이 아연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누, 누나…?”
왜냐하면, 그를 때린 게 최강혁이 아닌 나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