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각본. (19)
“후으….”
나는 뻐근해 오는 뒷목을 주물렀다.
“철들었다 싶더니, 그럼 그렇지….”
이가 저절로 빠득 갈렸다. 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한도훈에게 성큼 다가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 자식아.”
“어, 어??”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기분이었다. 나는 이를 살벌히 갈며 주저앉아 있는 그의 머리를 강하게 쥐어박았다.
“아악…!!”
한도훈이 머리를 감싸 안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나는 그런 녀석을 한 대 더 쥐어박을까 하다가 혀를 한 번 차곤 최강혁을 돌아봤다. 그는 현재의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는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잠깐 시선을 내려 꽉 쥔 그의 주먹을 보았다. 힘줄이 불거진 그의 손등이 여실히 보이자,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혁아. 대신 사과할게. 도훈이 이 자식이 사람 속 박박 긁는 건 새삼스럽지도 않잖아. 내가 나중에 더 혼내 줄 테니까 지금은 조용히 넘어가 주면 안 될까.”
“엇…. 그냥 쟤한테 맞는 게 더 나은 거 같….”
“입 닥쳐, 한도훈.”
“흐잉….”
차갑게 일축하는 내 말에 한도훈이 우는 소리를 내었지만 싹 무시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분명 최강혁이 한도훈에게 주먹을 날렸을 터였다. 그리고 이번엔 다리 하나로 끝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정말이지 이놈의 차별적인 태도는 아군일 땐 잊고 있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완전 돌변해 버리는 게 문제였다. 이전부터 좋지 않다고 여기긴 했으나 한도훈의 이런 안 좋은 성격이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도 발휘할 줄이야. 조금만 늦었어도 일이 커질 뻔했다.
나는 한도훈에게 짜증스레 머리를 한 번 더 쥐어박아 주곤 현재 이 상황에 멍하니 서 있는 양아치 놈들을 노려보았다.
“더는 긴말 안 할 거니까….”
이 이상 시간을 끌어 봤자 피곤하기만 했다. 또 어떤 사고가 연이어 터질지 몰랐다. 그러니 그냥 서둘러 정보를 빼내는 게 더 나아 보였다.
“너희들 아는 거 전부 다 불어.”
***
양아치놈들은 처음엔 좀 버텼다. 하지만,
“이번엔 도훈이가 잘못했어!”
“하아….”
“…….”
최강혁의 무리가 줄줄이 튀어나올 뿐 아니라,
“내 너 그럴 줄 알았다. 한도훈! 누나, 잘했어! 한 대 더 때려 버려!!!”
“바보.”
“도, 도훈아, 괜찮아…? 근데 이번엔 네가 정말 잘못한 거 같아….”
3반에 숨어 있던 서이수네 아이들이 전부 나오며 한도훈에게 얄짤없는 한 소리를 했고,
“…멍청이.”
반휘혈까지 나타나는 걸 보고 나선 그들은 안색을 푸르죽죽하니 죽이며 항복을 외쳤다.
그리고 그들이 설명해 준 내용은 가히 가관이었다.
“와…. 그러니까 약 두 달 전 쯤에 피씨방에서 놀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접촉해 왔고, 그 자식이 여자애 한 명 괴롭혀 달라고 했다고? 그리고 그 괴롭힘 원인이 최강혁을 때린 게 맞고?”
나는 그 황당무계한 내용에 입을 벌리며 내가 들은 게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네, 네에….”
양아치 보스가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에게 사방에 둘러싸인 그놈들은 기가 팍 죽은 채였으나, 일말의 동정심조차 들지 않았기에 나는 그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 사주를 넣은 사람은 모른다?”
“네에….”
“저, 정말로 몰라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태도에 나는 한도훈을 보았다. 그는 내게 맞아 퉁퉁 부은 볼을 감싸며 뚱하니 고개를 팩 돌리며 툴툴거리듯 말했다.
“꽤 철저한 인간이니 당연히 모르겠죠.”
“넌 안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럼 제가 모르겠어요?”
되레 황당하다는 반응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왠지 뒷골이 당겨 오는 반응에 욱할 뻔했으나, 나는 주먹을 꽉 쥐는 걸로만 그쳤다.
‘아오…! 어른인 내가 참는드아…!!’
자기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삐져 있는 게 참으로 고까웠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간을 문지르며 상황을 곰곰이 다시 되짚어 보았다.
그러니까 가장 큰 문제는 중간책에게 사주한 이였다. 아직까지 그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현호에게 부탁해서 얻었던 결과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야 설핏 눈치챈 사실이지만… 혹시 그건 주연희와 관련되었다기보단 그 사주한 놈과 관련되지 않았을까 싶어졌다. 소문에 빠삭하지 못한 나였기에 그 정체가 밝혀져도 모르는 인물일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했다. 그 존재가 가장 요주의 인물임을.
‘혹시 인소의 악역… 같은 건가?’
여기까지 드러났음에도 그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걸 보며 한도훈도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밝힐 만한 인물은 아니란 뜻일 터였다. 설마 벌써부터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여서 여자 주인공에게 먹일 거란 예상은 못 했었지만…. 원인이 최강혁 때문이라고 하질 않은가. 그것도 최강혁 뺨 한 대 때렸다고 말이다.
“…어, 잠깐. 얜 나도 때렸는데 왜 나는 안 건드리지?”
그것도 학생들 쫙 깔린 복도에서 대놓고 걷어찼다. 그런데 이제껏 나만 조용했던 게 이상하지 않은가.
“하. 누가 감히 미쳤다고 누나를 건드려요?”
한도훈은 내 말을 듣자마자 곧장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꽤나 거만한 태도인 게 참으로 거슬렸으나, 나는 그 자세 덕에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네.”
너 때문이구나. 아니, 덕택이라고 해야 되나…. 나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 잠깐. 보니까 꽤 철저한 사람인 것 같은데 혁이 때문이란 건 어떻게 아는 거야?”
나는 수긍하려다 말고 문득 드는 의구심에 한도훈을 보았다. 그는 입을 삐죽이며 내 눈을 피한 채 새침하게 말했다.
“그 중간책이 멍청인가 보죠.”
“…….”
이 새끼. 아직도 삐진 거 안 풀렸네. 나는 한도훈을 잠시 노려보다가 주연희를 보았다.
“그렇다는데, 연희 너는 어떻게 할래?”
나는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놈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주연희는 이 얘기를 듣는 내내 말없이 양아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질문에 고개를 든 그녀는 앙다문 입술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그녀의 손이 치마를 꽉 붙들었다.
“너무, 너무 화가 나고…. 용서할 수 없는데…!”
주연희는 이를 악물며 울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렇지만, 폭력은 나쁜 거잖아요.”
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렇다. 그녀는 인소 세계의 여자 주인공. 그 성질은 굉장히 유순하고 착한 편일 터였다. 인소 여자 주인공의 호구같이 착한 면모는 꽤 유명하지 않던가. 그녀가 만일 용서하겠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달간 모진 괴롭힘을 당한 건 내가 아니라 주연희였다. 그러니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자리에 일어섰다. 동시에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이들의 화색이 돌던 순간, 주연희가 갑자기 내 앞에 섰다.
짝-!!
그리고 양아치 한 놈의 뺨이 돌아갔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기겁하며 입을 떡 벌렸다.
“여, 연희야…?”
너 아까 용서한다고 하려는 거 아니었어? 당황스러움에 말도 제대로 못 잇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주연희의 이를 악문 음성이 들려왔다.
“그치만,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그런 심한 짓을…!!! 내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얼마나…!!!!”
노기가 가득 담긴 음성이 교실 안에 울렸다.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녀의 주먹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푹 숙인 고개 너머는 보이질 않았다. 나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손만 움찔거리고 있자, 그때 그녀가 숙였던 고개를 팍 들었다.
“그러니깐! 너희들 죽고 나 살자, 이거야!!!”
퍽-!! 그녀의 손이 양아치에게 날아갔다. 이번엔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이었다. 나는 그 호쾌한 모습에 자연히 입을 가렸다.
아니, 여자 주인공에게 쿨 워터의 향기가 느껴져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돌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풋, 푸하하하하하!! 재밌네, 여자!”
그 주인공은 최강혁이었다. 방금 내 제지로 계속 언짢아 있던 그는 주연희의 패기로운 행동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지 웃음을 크게 그리며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렇게 비리비리하게 날리면 쓰나. 주먹은 말이지,”
빡-!!!!!
주연희에게 두 번 맞은 놈이 이번엔 대차게 날아갔다.
“이렇게 쓰는 거야.”
“히, 히이익…!”
“얘, 얘기가 다르잖아…! 저, 전부 말하면 그냥 보내 주는 거 아니었냐고!!”
안심하고 있던 양아치들은 가만히 있던 최강혁이 가세하려 들자 기겁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우린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
그런 양아치들의 반항에 태평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이윤이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양아치들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그 상큼한 목소리 안엔 일말의 동정 따윈 없었다. 그것을 눈치챈 양아치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분 더러웠는데 이거 잘됐어. 여자, 이번만 특별히 도와주지.”
“…여자 아니고 주연희야, 주연희!”
주연희가 최강혁의 말을 정정해 주었으나, 최강혁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스산히 얼굴을 기울이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아까 한도훈에게 당했던 화를 계속 억누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갑자기 고조된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으, 으아아…!!”
그러자 위기 본능이 작동했는지 그들이 도망가려고 발버둥 쳤다.
“어이쿠. 어딜 가시나.”
그러나 퇴로는 전부 막힌 지 오래였다. 서이수가 그중 한 사람을 붙잡곤 사악히 웃었다.
“으, 으…. 제, 젠장!”
남은 한 놈이 급히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내 주머니에서 나온 물건을 보곤 나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접이식 나이프였다. 더는 뒤가 없음을 눈치챈 그가 흥분으로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그가 바라본 목적지를 확인했다.
아뿔싸, 그곳엔 주연희가 있었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어 주연희에게 경고했다.
“연희야, 피해!!”
“…네?”
동시에 양아치가 움직였다. 서둘러 막고 싶었으나 나보단 그의 거리가 훨씬 가까웠다. 짙은 낭패감에 얼굴이 저절로 굳어지려던 순간,
“!”
“으, 크읏…!”
“…….”
“음?”
양아치의 손목이 비틀리며 책상 위로 엎어졌다. 양아치를 제압한 건 주연희의 곁에 있던 최강혁뿐 아니라…
“어, 휘, 휘혈이…?”
반휘혈도 포함이었다. 그 사실에 놀란 주연희가 어리벙벙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반휘혈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주연희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정쩡하게 움직이다 말고 멈춰 서며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말 생각도 못 한 그림이 튀어나왔다. 무엇보다 가장 예상치 못한 반휘혈의 도움이었다. 그는 원래부터 남을 돌같이 보며 누군가를 선뜻 도와주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직접 나서 주연희를 도와준 거였다.
‘반휘혈이 아까 어떤 여학생에게 고백했다고….’
잊고 있던 짝꿍의 말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내 입에선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내가 부탁할 필요도 없었나.’
지난날, 그에게 주연희를 부탁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 광경을 보니 이 순간 완전한 확신이 들었다. 운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노라고. 그리고 굳이 내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어쩌면 반휘혈은….
“누나?”
“……어, 어?”
고개를 돌리자 이재현이 나를 의아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 멍하니 눈을 몇 번 더 깜빡이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그의 어깨를 밀었다.
“아, 이, 이제 우린 볼일 다 봤으니깐 이젠 가자! 재현이 너도 늦게까지 남아 있느라 수고했어!”
“어, 네?”
이재현은 얼떨떨해하면서 내가 미는 대로 순순히 밀려 나갔다. 나는 반문을 나서기 전,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외쳤다.
“너희들도 적당히 하고 들어가! 뒷수습은 맡길 테니까!”
내 말에 반응하듯 반휘혈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양아치를 제압하던 손길을 푼 그는 나를 따라오려는 것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휘혈이 너는 연희 데려다줘.”
“…….”
반휘혈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주연희에게 외쳤다.
“연희야, 얘가 집까지 데려다줄 거야! 잘 마무리하고 조심히 들어가!”
“어, 어, 네? …네!”
주연희도 놀란 듯 보였지만 곧 고개를 황급히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간 쳐다본 후, 반휘혈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럼 나 먼저 가 볼게.”
“…잠깐.”
반휘혈이 당황한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모른 척 피하며 그를 향해 씩 웃었다.
“내일 보자. 휘혈아.”
“…….”
반휘혈의 입이 멍하니 벌려졌다. 그의 입이 잠시 달싹여졌으나, 기다려도 그곳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서이수, 너도 나와!”
“…어, 어.”
괜스레 서이수에게 소리치듯 부르자 잠깐 얼떨떨하게 굳어 있던 서이수가 단걸음에 뛰쳐나왔다. 서이수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나와 반휘혈을 보았으나, 곧 입을 다물고 내 뒤를 따라 나왔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는 내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