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고마워. (1)
***
“…이건 또 대체 무슨 거지 같은 상황이지?”
서이나와 서이수, 이재현이 사라지고 양아치들을 밟는 내내 망연히 서 있다가 사라지는 반휘혈을 보며 한도훈이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한 대 맞고 눈이 망가졌나…?”
아니면 왜 누나가 반휘혈과 주연희의 사이를 이어 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다. 서이나의 거센 주먹을 맞고 뇌를 다쳤다고 생각하며 다시 무시하려는데,
“응? 도훈이, 혹시 몰라?”
이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에 대번에 얼굴을 찌푸린 한도훈은 질색하며 이윤에게서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연이어 나온 내용은 심히 무시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휘혈이가 저 여학생한테 고백했잖아?”
“……뭐?”
한도훈은 순간 자신이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고백처럼 보이긴 했지.”
그런데 다정한까지 가세하자 한도훈은 도저히 그 말을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황급히 주변에 서 있던 김시원을 바라보았다. 김시원은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였으나,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뭐어-?!?!?!?!?!”
한밤을 뒤흔드는 비명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우왕, 도훈이 의외다. 난 당연히 네가 알고 있을 줄 알았어!”
“아니, 시발, 이게 무슨, 아니, 이게 뭔…! 악, 대체 언제?!”
그는 흔치 않게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리 싫어하던 이윤도 밀어내기는커녕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정보를 독촉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윤은 당황스럽긴 하였으나 마냥 싫지 않던지 웃음을 실실 그리며 밝게 대답했다.
“오늘 점심! 내가 똑똑히 봤어!”
그 말에 한도훈은 뚝, 하고 행동을 멈추었다.
“…점심?”
그는 그 단어를 되뇌듯 중얼거렸다. 그러곤 그의 머릿속에서 점심시간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 덕에 한도훈은 자신이 왜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할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한도훈은 붙잡던 이윤의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치우더니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으으으…! 고찬영…!!!”
그 자식 때문이었나!! 한도훈은 절망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며 주위에 있던 책상을 두드렸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돌아갈 수 없었고, 이미 일어난 사건은 변하질 않았다.
“그 자식만, 그 자식만 없었어도…!”
그의 영민한 머리는 지금 벌어진 상황이 고찬영의 탓이 절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이나의 부탁으로 그를 외진 곳으로 끌고 간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장 당당하게 탓할 존재가 필요했기에 그를 욕하기에 서슴지 않았다.
“아악!! 인생에 도움도 안 되는 자식!!!”
물론 그걸로 죄책감을 가질 위인도 아니었고 말이다.
***
문설희는 뛰고 또 뛰었다. 그녀는 혹여라도 자신을 붙잡을까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교문을 나섰다. 문설희는 서이나로 추정되는 이가 한도훈을 공격하자 소란이 일어난 틈을 타 눈치를 보며 도망을 친 뒤였다. 도망을 치다가 서이나의 동생과 시선이 잠시 마주치긴 했으나, 그는 자신에게 눈길만 주곤 무심하게 보내 주었다. 마치 더는 필요 없다는 그 자세에 자존심이 상했으나 자신의 안전이 먼저였기에 그녀는 두말 않고 도망쳤다.
문설희는 어느새 당도한 교문을 넘으며 턱턱, 막히는 숨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하아, 하아.”
도망치는 것에 성공한 듯하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젠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은 안전한 건가?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집에 들어가 이불을 온몸에 뒤집고 숨어 있고 싶었다.
“힘들어 보이네.”
그런데 그녀의 귓가로 왜 익숙한 저음이 들려오는지 모르겠다. 문설희는 숨을 몰아쉬다 말고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거기엔 놀랍게도 그녀의 남자 친구가 서 있었다.
“…찬영아!”
그 순간 문설희는 안도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녀의 아름답고도 강인하며 다정한 남자 친구였다.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나 기다린 거야? 응?”
문설희는 그가 자신이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 야자를 한다고 여겨 자신을 이 시간까지 기다린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응, 맞아.”
그리고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고찬영의 대답에 문설희는 아까까지 느꼈던 두려움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얘는 내 남자 친구야.’
이젠 성주찬 그 녀석도 자신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에게 받아 왔던 명품들이 아쉽긴 하나 눈앞에 있는 존재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어제까지만 해도 그와 비교했던 자신이었지만, 그것은 배부를 때나 했던 소리에 불과했다.
‘얘만 있으면 난 안전해.’
방금 최강혁이나 한도훈을 보고 확실히 깨달은 사실 하나. 자신의 남자 친구인 고찬영은 전이긴 할지라도 사대천왕 중 한 명이었던 강자였으며, 최강혁 패거리나 반휘혈 패거리를 보고도 꿇리지 않는 기백을 가진 이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사실이 거리감 없이 확 와닿았다.
자신이 바람피운 증거라든가 주연희를 괴롭혔다든가 모든 건 조작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그런 조작쯤이야 한도훈에겐 식은 죽 먹기일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그는 그의 친구보단 자신의 말을 믿어 줄 터였다.
“설희야.”
“응? 아, 좀 배고프지 않아? 우리 편의점 가자, 편의점.”
문설희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껴 넣었다.
“…어?”
아니, 껴 넣으려 했다. 문설희는 텅 빈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찬영을 올려다보았다. 마주친 고찬영은 여전히 다정한 눈빛이었으나, 뒤이어 건네 온 말은 지나치게 비정하기 짝이 없었다.
“헤어지자.”
***
고찬영은 불안정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줏대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위태롭긴 하나 스스로를 어느 정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겐 고치지 못하는 하나의 고질적인 악습이 하나 있었다.
‘찬영아, 제발 이상한 여자 좀 그만 만나.’
이것은 언젠가 그의 친구가 그에게 해 온 말이었다. 고찬영은 그런 그에게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상하긴 어디가. 그냥 조금 부족할 뿐인걸. 나도 그렇고 말이야.’
아무것도 모른 것처럼 말하는 그의 태도 때문일까, 그를 줄곧 선망하던 친구는 흔치 않게 화를 냈다.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지 마! 너 그렇게 멍청한 녀석 아니잖아!!’
‘그런가? 나는 모르겠던데.’
하지만 고찬영은 그런 친구의 걱정을 무구한 눈치로 넘어갔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였으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사귀는 여자애들이 전부 이상했음을.
그것은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고찬영 그라고 해서 매번 이상한 사람을 애인으로 두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타인에게 충분한 애정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의 애정을 바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그 사실에 체념하며 현실에 수긍하기를 택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건 자신으로부터 주는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내가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주겠어.
그래서일까, 그는 자연스럽게 풍족한 이들보단 어딘가 심리적으로 결여된 이들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고백을 받게 되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막연히 바랐다. 자신이 사랑을 주다 보면 언젠가 그 공백이 메워지길. 그리고 내게도 보답이 오기를. 그렇기에 그 헌신은 이루 말할 데 없이 흠잡을 수 없었다.
‘차, 찬영아! 이, 이건 오해, 그래, 오해야!’
‘너, 너의 모든 걸 가질 거야. 다른 사람에게 눈길도, 관심도 주지 마. 너, 너는 나뿐이면 되잖아? 응? 찬영아.’
‘사, 사랑해서, 사랑해서 그랬어! 너 없으면 나 죽을 거야!’
‘넌 최고야, 찬영아! 너만, 너만 있으면 나, 나는 부자가 될 수 있어…! 그러니깐 도와줄 거지? 넌 날 사랑하잖아, 그치?’
그러나 그의 사랑은 언제나 예기치 못하게 배신을 당했다. 고찬영은 불안한 사람일지언정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들과 단호히 헤어졌다. 안타깝지만 세간에선 이 사실을 모른다. 그저 자신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만이 이 사실을 알 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조차 고찬영을 그저 한량이자 바람둥이라고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그의 자세 또한 한몫했을 터였지만 말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신경이 점점 예민해져 가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럴 때, 그는 역대 최악의 승부를 맛보았다. 압도적인 패배감은 그를 궁지로 몰아갔다.
인정받고 싶다. 존중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신경이 마모되어 가고 주위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폭력에 굴복한 이들은 자신을 숭배했다. 위태롭게 무너지던 자존심을 그렇게 얼기설기 붙어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최강혁이랑 반휘혈이 이번에 고등학교 입학을 한다더라.’
‘와, 그 차기 사대천왕 후보?’
그 소문이 그의 귀에 밟힌 건 손에 피가 마르지 않는 어느 날이었다. 그의 이름보다 미친 들개나 싸움광이란 별칭이 더 익숙해진 것도 그럴 시기였을 터였다. 고찬영은 그 소문에 눈을 들었다. 인정에 목마른 그가 수소문해 최강혁을 찾아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동료들의 배신이었다.
병실에서 정신을 차린 고찬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체, 어째서?
영민한 그의 머리는 상황을 냉정히 분별하고 있었다. 증거는 없으나 분명 자신이 마신 음료수가 원인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 음료수를 준 것은 자신의 동료이자 학교의 삼짱인 김현철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허무하게 자신이 쓰러질 리가 없었다. 그 정태우와 싸울 때도 이렇게 허망하게 지진 않았다.
내가 뭘 했다고? 어째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막연한 불안, 좌절, 배신감과 공포가 병실에 누워 있던 고찬영을 뒤덮었다. 유일하게 자신을 지지해 준 건 그의 친구인 이현호뿐이었다. 하지만 불안한 것은 고찬영, 그뿐만이 아니었기에 온전히 의지할 순 없었다.
‘하, 하하….’
허무했다. 너무나도 허무했다. 그동안 자신에게 붙어 왔던 호의는 모두 가식뿐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안에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일말의 애정은 일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난 그동안 뭘 한 거야…?
짙은 권태가 그를 짓눌렀다. 고찬영은 이제 모든 게 귀찮아졌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혼자가 될 바엔, 그럴 바엔 차라리 온전히 혼자인 편이 나았다. 모든 사람이 꼴 보기가 싫었고, 더 이상 상종하고 싶지도 않았다.
총기가 가득했던 그의 눈은 그렇게 차츰 완전히 빛을 잃어 가려 했다.
‘으음….’
그때, 병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고찬영은 멍한 눈을 깜빡이다가 그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병실 창문 너머로 한 인영이 주변을 서성이는 게 보였다.
뭐지.
그는 생각했다. 저건 또 나를 귀찮게 하러 온 인간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행동이 굼뜨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 병실에 볼일이 있는 건 맞지만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는 것 같아 보였다.
그 순간, 왜일까. 그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보이지 않는 줄이 자신을 당기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무시할 법도 했으나, 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실 문을 연 뒤였다.
‘…….’
‘…….’
그리고 그곳엔 모자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작은 여자아이 한 명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