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59화 (159/306)

159. 고마워. (2)

고찬영은 그녀의 정체가 조커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온몸을 꽁꽁 싸맨 듯한 행색도 행색이었지만, 그 전날 불현듯 이현호가 자신에게 조커가 도와주고 갔다고 알려 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는 이 여성의 정체를 조커라 판단했다. 기실 그녀를 병실 안으로 들인 것도 이현호를 도와줬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대화하는 내내 계속 경계를 풀지 않고 그녀를 대했다.

하지만 그녀와 얘기를 나눌수록 그는 낯익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분명 처음 만난 사이일 터인데, 왜 한 번은 만난 것 같을까. 고찬영은 촉이 굉장히 좋은 사내였다. …이렇게 대화하면서 유쾌한 기분을 느낀 건 언제였지? 그녀의 반응이 낯설지 않았다. 건들면 툭툭 반응이 튀어나오는 게 어째선지 최근에 이런 일을 겪은 것만 같았다. 그 낯설지 않은 감각을 곰곰이 되짚다가 문득, 그녀의 분위기가 며칠 전 본 특이했던 인상의 여학생과 비슷함을 떠올렸다.

아.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다름이 아니라 그 정태우와 비슷했던 분위기를 가졌던 여학생을. 한순간이긴 하였으나, 자신이 건들자마자 태세가 바뀌었던 그 여학생이었다. 그때 풍기던 것은 그저 평범한 학생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 당시에 본능적으로 이 여학생이 조커임을 눈치챘다. 그러나 여학생은 제게 틈을 주지 않고 반박하며 자신의 정체를 부인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까, 오히려 그 모습이 고찬영은 호기심이 일게 만들었다는 것을. 물론 그 이후로 그녀의 동생이 나타나 방해해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것을 떠올리자 고찬영의 메말라 가던 가슴에 그 잊고 있었던 호기심이 다시 찾아왔다.

이자는 왜 자신을 찾아온 걸까? 대체 무슨 볼일이 생긴 걸까?

얼마 가지 않아 그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알게 되었다.

동료들의 배신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건 그 차원이 달랐다. 그는 들끓는 살심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억지로 씌우고 있던 유쾌한 그의 가면이 벗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 그 자식들을 짓밟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자신을 진정시키려 들었다.

아, 그래. 네 일이 아니라 이거지.

고찬영은 역시나 이런 상황에조차 자신의 편이 없음을 자조하며 적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한 적 없거든. 그냥 죽지 않을 선에서, 네가 감당할 선에서만 처리하라고.’

그녀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었다. 고찬영은 그 말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깨는 것만 같았다.

‘사고치지 마. 고찬영.’

‘야, 당연히 밟아 버려야지!!’

그가 그간 들어왔던 말들은 제지와 재촉. 이 두 가지 부류뿐이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었다.

‘……허.’

그래서일까,

‘허,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하핰!!’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 진짜 대박이다. 그 녀석들이 싸고돈 이유를 알 거 같아.’

정말이지, 이런 사람이 다 있구나. 이럴 수가 있구나. …이렇게, 아무것도 재지 않고 내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구나. 이러니 그 까칠한 도련님도, 그녀의 동생도 그녀를 싸고도는 거구나.

‘나라도 그랬겠어, 정말. 하하. 진짜 재밌다, 너.’

그리고 그것은 나도 피할 수 없으리라. 이 순간 그는 직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 중 더는 만날 수 없는 흔치 않은 귀인임을. 그래서 그는 뛰는 가슴을 안고 그녀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나이는?’

그의 질문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빠진 듯한 그 모양이 자꾸만 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그녀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표정을 다잡고 말했다.

‘서이나. 나이는 열여덟.’

그 대답에 고찬영은 웃음을 더 짙게 그렸다.

‘그럼 나랑 친구나 할까?’

그것은 난생처음 말해 본 그의 순수한 요청이자 고백이었다.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찬영아.”

문설희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재차 그에게 확인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아, 아니다. 그는 지금 제게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문설희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보였다.

“장…난 그만해~. 내가 오늘 연락 자주 안 해서 그런 거야? 아, 미안해, 미안해! 이제 됐지?”

“…….”

고찬영은 그녀의 말에 그저 침묵했다. 그녀는 그 모습에 역시 장난이라 여기며 그렇게 넘어가려 했다. 그래서 그에게 다시 다가가려 한 발자국 다가갔으나.

“어….”

그는 그만큼 다시 멀어져 갔다. 문설희는 어정쩡히 뻗은 손을 내리지도 못한 채 멍하니 그를 올려 보았다.

“…설희야,”

고찬영이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그 모습은 평소와 같이 다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낯을 마주하니 자꾸만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어쩐지 그 미소 안에 담긴 후련함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을 두고, 그 혼자 마음을 정리한 것처럼.

“나 이제 그만하려고.”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영문 모를,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말에 문설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었다.

“아니, 아니야…. 아니야아…. 아니지? 찬영아, 아니잖아…. 응? 진짜 헤어지고 그러는 거…. 내, 내가 뭘 잘못했어? 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문설희는 비명을 지르듯 내뱉다가, 불현듯 멈칫하며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에 급히 매달리며 우악스럽게 물었다.

“아, 혹시 그년한테 들은 거야? 서이나, 그년이 벌써 꼰지른 거야? 그래서 헤어지자고…!”

탁, 그녀의 손이 차갑게 쳐 내어졌다.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걔, 네가 그렇게 불러도 될 사람도 아니고.”

고찬영은 차가워진 표정을 갈무리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입 안에 쓴맛이 감도는 기분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업보였다. 그동안 인정에 목말라, 사랑에 목말라 해 왔던 어리석은 행동의 산물이었다. 자신의 친구님을 만나면서 일말의 애정을 받아 본 그는 묻어 두던 악습이 발휘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와 같이 있는 게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선이 넘을까 봐. 그게 두려워 눈앞에 있는 이를 택해 일시적으로 도망쳤다.

“아, 아하…! 그래, 그런 거였어. 그런 거였네! 너, 그년이랑 바람난 거지? 그렇지 않고선…!!”

그 결과가 이거다. 쾅!! 문설희는 강하게 울리는 타격음에 꺄-!! 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말을 멈추었다. 고찬영은 벽에 뻗은 주먹을 마치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강하게 짓눌렀다.

“설희야.”

벽을 타고 선홍빛 피가 흘러내렸다. 문설희는 그 흔적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입조심하라고 했잖아.”

주먹이 스르륵 풀리며 벽에서 떨어졌다. 그는 잠시 숨을 내쉬더니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어?”

“다 안다고. 너 바람피운 거.”

그저 조용히 헤어지고 싶었으나, 친구를 모욕하는 발언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고찬영은 그녀가 바람피우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다. 짐작은 몇 주 전부터, 그리고 정확히 알게 된 건 지난주였다. 그것은 정말로 맹세컨대,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청소를 마치고 반으로 돌아가던 그때, 그날은 괜히 평소와 다른 길로 가고픈 마음에 건너편 복도로 향했다. 그러다 자신의 친구님이 후다닥 창고로 쓰이는 반으로 들어가는 걸 발견했다. 고찬영은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 들어가려다가 들려오는 내용에 발을 멈추었다.

‘어, 저기, 잠시 찬영이가 자리를 비워서 대신 받았는데….’

…대신 받았다고? 그렇다고 치기엔 굉장히 목적이 뚜렷한 발걸음이었다. 눈치 빠른 그는 곧 그녀가 무엇을 목적으로 이곳에 발걸음을 내디뎠는지 알아챘다.

그래서 오늘 내내 이상했던가~.

그녀의 목적은 자신의 핸드폰이 틀림없을 터였다. 어쩐지 계속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이상하다 싶었더랬다. 그는 툭, 하고 성의 없이 벽에 기대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하도 이상한 사람만 만났더니 사람 보는 눈이 이상해진 걸까? 설마 그녀가 이런 뒤가 구린 듯한 행동을 할 줄 몰랐다. 보통 핸드폰을 가져가 뒤지는 건 그 주인의 정보를 파헤치려 하거나 통제하려고 할 때였다. 그간 봐 온 그녀는 털털하고 타인의 일에 무심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서 간혹 자신만 그녀를 아끼고 생각하나 싶어 쓸쓸하고 서운한 적도 더러 있었다.

설마 아닌 척하면서 자신을 통제하려 했던 걸까. 난생처음 제대로 사귀어 본 친구조차 자신을 배신하려는 걸까. 그는 어쩐지 가슴이 묵직하니 내리 누르는 불쾌한 감각이 서서히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저기 현호 학생?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 걔 애인 아냐.’

‘아니, 난 진짜….’

그런데 왠지… 수상쩍게 전화를 받은 사람치곤 굉장히 절절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찬영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곁눈질로 문을 바라보았다.

‘난 걔 친구라니까…?!’

잠시 후, 끝내 성질이 폭발한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은 마치 답답한 걸 토로하듯 외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친구.

고찬영은 그 단어를 되뇌며 입매를 더듬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듣기나 해 볼까. 그녀는 무슨 속셈으로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갔는지. 보아하니, 그녀의 목적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할 의도보다는 그 건너의 주인이 목적인 듯 싶었다. 그 건너의 당사자는 이현호일 터였고, 그는 자신의 주변 여자들을 질색해 했으니 아마 좋은 소리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또 자신의 친구님은 볼일이 없었으면 그냥 단칼에 반격하며 끊어 버렸으면 끊었지, 욕을 가만히 듣고 있을 성정은 아니었다.

냉정히 상황을 살피자 문득 고찬영은 친구님이 무슨 볼일로 이현호와 대화하려는지 궁금해졌다. 만일 그의 의심대로 자신을 통제하려하거나 정보를 파헤쳐 볼 생각이라면 이현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층 마음을 가벼이 하며 그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부탁할게.’

그럴 때, 그의 귀에 파고들듯 진지함 음성이 들려왔다.

‘안 그래도 요즘 찬영이가 사귄 여친이 이상한 애인 거 같아서 걱정돼서 그래.’

‘찬영이 여친이 바람을 피웠단다, 글쎄.’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말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탄식이 섞인 그 목소리는 그를 멍하게 만들었다.

…이걸 위해서?

이걸 위해서 이렇게 수상쩍게 움직였다고? 그는 그녀의 말이 연이어 들려올수록 혼란만 가중되었다. 그녀의 의도는 너무나도 투명했다.

그녀는 이현호와 통화하는 내내 고찬영, 그가 여친으로 상처받지 않기를. 그러니 협조해 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 타인에게 무심한 성정을 지닌 자신의 친구님이 말이다.

그것을 깨닫자 그는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러지 않는다면 커다란 무언가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풀리려는 다리를 붙잡으며 더 이상 그곳에 서 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고찬영은 비틀거리며 반으로 향했다. 하지만 반으로 도착하고서도 그의 멍한 정신은 계속되었다.

그의 여자 친구가 바람피운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짐작했던 일이니까. 무엇보다 그는 사람을 쉬이 믿는 성격이 아니었다. 또한 그가 여자 보는 기준은 처참했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의 친구님이 한 행동은 눈치 빠르고 감이 좋은 그조차 예상치 못했던 범위였다.

‘평소엔 그렇게 무심하면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시끄러웠던 교실 안에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 어떡하지.

그는 턱을 괸 손으로 입을 감쌌다.

나, 너무 기쁜데.

하지만 그 미소는 감추려해도 감출 수 없었다.

무심한 걸 알기에 그녀의 사소한 관심이 좋았다. 그녀의 무심한 배려가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자신을 위해 귀찮음을 무릅쓰는 걸 본 이상,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러니까 헤어지자.”

지금 그는 자신의 친구를 배반치 않기 위해 이별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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