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62화 (162/306)

162. 장미의 유혹. (2)

***

“흐음~.”

툭툭, 경쾌하게 핸드폰을 두드리던 손이 멈추고 빛나던 액정이 꺼졌다. 검게 물든 화면 너머엔 한도훈이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나오시려나~.”

히죽, 얄궂은 미소를 지은 그는 핸드폰을 품에 넣으며 걸터앉은 창틀에서 가벼이 뛰어내렸다.

“야, 난 이만 간다. 넌 알아서 가든가 말든가.”

방금까지 미소 짓던 것과 달리 시큰둥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거기에 귀찮다는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후….”

천연덕스러운 한도훈의 태도와 달리 그 안쪽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폭력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것은 어두운 밤중에도 찬란한 금발을 지닌 한 사내, 최강혁이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금발을 한 손으로 가벼이 쓸어 넘기곤 무기질과도 같은 시선으로 널브러진 남자들을 내려다보았다.

힘깨나 쓸 것 같은 장정이 여섯에, 그나마 마른 몸을 지닌 남자 한 명. 그들이 처참한 구타의 흔적을 내보이며 쓰러지게 된 원인은 바로 이 가운데 저 홀로 멀끔한 최강혁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왜 이 두 사람은 자정이 다 넘은 이 새벽에 함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왜 일곱이나 되는 남자들이 사무실로 추정되는 장소에 모여 뻗어 있는가. 그것은 약 1시간 전으로 넘어간다.

***

한도훈은 예상치 못한 반휘혈과 서이나의 사이에 이물질이 끼어든 게 좀체 이해가 가질 않아 초조하게 발을 굴리던 중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저 근본도 없는 여자가 반휘혈이랑 그런 교류가 이어진 건데?! 그동안 반휘혈이 주연희에게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걸 모르는 한도훈이 아니었다. 그동안 그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반휘혈이 좋아하는 건 누가 뭐라 해도 서이나니까.

그래서 그 어떤 불순물이 끼어들어도 그리 신경 쓰질 않았던 것이다. 반휘혈 그 자식의 자각이 이렇게까지 더딘 건 예상 밖이었지만 그것 또한 보는 재미가 있었으니 괜찮았다. 어차피 그것은 시간문제였을 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눈 밖에서 이런 말 같지도 않은 흐름이 이어지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휘혈이랑 사귀는 건 당연히 이나 누나여야만 해!’

그 외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이리도 극단적으로 구는 것 또한 심히 간단했다. 좋은 거+좋은 거=엄청 좋은 거, 라는 실로 아주 단순명료한 원칙 때문이었다. 평소 그를 안다면 기함할 정도로 단편적인 생각이었으나 한도훈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그렸던 이상과 멀어지는 현실에 충격을 받아 제대로 된 사고가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다.

방금 자신이 본 상황대로라면 반휘혈은 몰라도 서이나는 확실히 선을 그을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반휘혈이 계속 모호하게 굴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그 말에도 서이나는 충분히 혼란스러워했다. 지켜 본 바라면 서이나는 남자에게 면역이 약했다. 특히 이성적인 접근에서 말이다. 마치 남자의 플러팅을 처음 당해 보거나 남자와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가끔씩 세대를 뛰어넘는 어른스러운 모습에 그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그녀는 열정적이고 감성적인 부분도 있으나 성인과 같은 냉철함도 가지고 있었다. 반휘혈에게 여타 잘될 만한 여자가 없었으면 모를까. 이렇게 새로운 방해꾼이 나타나게 된다면, 그 호구같이 배려하는 면모가 있는 서이나는 당연히 반휘혈을 위해 이성적인 방향으론 거리를 확 벌릴 게 뻔히 보였다.

‘크윽…! 누나랑 여기서 더 멀어져선 안 돼!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안 도와주는 건데!!’

게다가 요즘 반휘혈이 그 이상한 플러팅도 하질 않았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한때의 찰나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크나큰 실수였다. 차라리 시간을 들여 서이수의 작전을 내일로 실행에 옮겼다면, 반휘혈과 주연희의 소문이 제 귀로 들려왔을지 모른다. 아니, 그 시간 동안에 안 들렸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됐다면, 이렇게 그 여자만 좋은 짓 해 줄 리가 없었을 터였으니 말이다. 서이나의 부탁이 있었으니 도와주긴 했을 터였지만 딱 괴롭힘을 멈추는 선에서 그쳤을 거였다. 이렇게 그 여자만 이득인 판을 깔아 줄 리 없었을 거란 뜻이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막아야만 해. 그럼 아예 눈앞에 어슬렁거리지 않게 차라리 없…,’

“야, 또라이.”

생각이 불순한 방향으로 뻗던 중, 다행히 그런 한도훈의 만행을 막는 음성이 울렸다. 한도훈은 머리를 싸매던 손을 슬며시 떼며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그를 부른 이를 보았다.

“뭐, 개새끼.”

한도훈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최강혁은 조무래기들을 처리하는 게 질렸는지 대충 손을 털며 그에게 다가왔다.

“아까 했던 얘기는 제대로 하고 가.”

“무슨 얘기.”

시큰둥한 목소리가 귀찮은 기분을 여실하게 보여 줬다. 최강혁은 그 태도에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목적이 있기에 한 번은 참기로 마음먹었다. 그답지 않은 인내심이었으나 그만큼 이 사안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다.

“나보고 꼭두각시라고,”

…그것은 그의 인생에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직면하는 문제였으니까. 최강혁의 다리가 성큼 한도훈에게 다가왔다. 차갑게 굳은 붉은 눈이 한도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했을 텐데.”

그러니 똑바로 설명해. 최강혁의 명령조가 한도훈에게 강하게 꽂혔다. 한도훈은 그 고압적인 자세에 낯을 서늘히 굳혔다.

“네가 뭔데 나한테…,”

한도훈은 자신의 어깨를 꽉 잡는 손길에 말을 멈췄다. 눈동자만을 굴려 그 정체를 확인하자 거기엔 김시원이 있었다.

“뭐야.”

불쾌한 티를 숨기지 않은 저조한 음성이었다. 하나 김시원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덤덤히 입을 열었다.

“싸우려 들지 마.”

“하-.”

한도훈은 그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고깝다는 미소를 그렸으나, 그 눈은 지나치게 시렸다.

“너도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김시원?”

김시원은 그 더러운 성질머리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마저 이 상황에 휩쓸려서는 안 될 노릇이었기에 침착히 그를 말린 이유를 전했다.

“네가 만일 여기서 이 녀석이랑 싸워. 그럼 어떻게 될 거 같아.”

“…무슨 소리야.”

설마 여기서 이기고 지고를 논하는 건가. 한도훈이 최강혁보다 약하긴 하나 그렇다고 호락호락하게 질 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시원도 알 것이었다. 그렇지만 김시원은 굳이 그런 부분으로 싸움을 말릴 녀석도 아니란 것도 맞았다. 그는 강함을 동경하기에 강자들과의 싸움을 즐겼고, 또 관람하는 것도 좋아했으니 말이다. 지금 상황은 어떻게 보면 서열 싸움과도 직결된다. 그러니 이것은 김시원이 좋아할 만한 요소였기에 이렇게 직접 간섭해서 말리는 일은 안 할 터였다. 즉, 지금 그의 행동은 어딘가 이상하단 뜻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한도훈의 날카로운 시선이 조금 내려갔다.

김시원은 한풀 신경이 누그러진 한도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시선을 조금 옮겨 그의 볼을 빤히 보며 말했다.

“잘 생각해. 누나가 널 보고 뭐라 할지.”

“…!!”

한도훈은 그 말에 정신이 퍼뜩 든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 김시원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자신을 말려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최강혁과 싸웠다가는…

‘미쳤냐, 한도훈? 어? 진짜 내 손에 뒤질래, 한도훈? 내가 가고 그새를 못 참아서 쌈박질을 해? 내가 한 말은 아주 들을 가치도 없다, 이거야? 어?!’

‘아, 아니, 이번엔 제가 아니라 최강혁 그 자식이…!’

‘듣기 싫어, 이 자식아! 또, 또 가만히 못 넘기고 시비 걸었겠지!!’

다음 날, 서이나의 불호령을 맞이할 게 틀림없었다. 자신은 억울하게 항의를 해 보겠으나 화가 잔뜩 난 서이나는 제 머리에 또 주먹을 선사할 게 눈에 훤히 비쳐지는 기분이었다.

“네 성질머리 때문에 나까지 피해 입히지 마.”

게다가 같이 있던 김시원도 싸움의 방관자로서 연대 책임을 피할 수가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 자신을 말렸던 것이다.

“아, 젠장!”

한도훈은 그 사실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었다. 이대로 넘어가기엔 기분이 너무 나빴으나 그렇다고 서이나에게 혼나고 싶지도 않았던 그였다. 그리고 한동안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억울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재현은 보란 듯이 누나 옆자리를 차지하겠지!’

꼭 자신이 구박받을 때마다 당당하게 서이나의 예쁨받는 남동생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재현이 그렇게 아니꼬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자식, 꼭 그럴 때마다 자신을 더 놀리듯 구는 게 더 재수 없어! 평소엔 순한 양 그 자체이다가 자신을 놀릴 때만 양의 탈을 쓴 여우 같은 놈이 되어 버리는 이재현을 떠올리며 한도훈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야! 개새끼, 따라와!!”

그래서 그는 결정했다. 그런 눈꼴사나운 장면을 볼 바엔 차라리 이 자식의 말을 들어주고 말지! 한도훈은 척, 하고 최강혁에 한 번 삿대질을 하곤 그대로 밖을 나가 버렸다. 김시원은 그런 한도훈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어, 뭐야. 나도 갈래!”

그때 가만히 두 사람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이윤이 눈을 반짝이며 따라가려는 듯 몸을 내밀었다. 그러자 다정한이 그의 뒷덜미를 반사적으로 붙잡으며 만류했다.

“…이번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어떨까, 윤아. 시간도 늦었고.”

다정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지켜 본 바로 한도훈이 알고 있는 그 사실은 꽤나 커다랗고 은밀한 무언가, 였다. 무엇보다 애매하게 끼어들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이 이상 간섭했다간 묵직하고 부담스러운 현실만 직면할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오지 마.”

그리고 그것은 최강혁도 바란 일이었다. 최강혁은 무심하게 한 마디를 내뱉고 한도훈을 따라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었다.

“우~! 하지만 난 네 친구잖아! 듣고도 그냥 외면할 수 없다고!”

“…….”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에 이윤은 볼을 퉁퉁 부풀리다가 이내 풀이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이었다.

“…혁이는 역시 내가 귀찮은가 봐.”

“윤아….”

다정한은 그런 이윤은 안쓰럽게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손을 들어 슬며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아….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던 김시원이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다정한과 이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에게 향했다. 김시원은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지르며 어느 한쪽을 휙, 하고 가리켰다.

“저거, 어떻게 할 거야.”

“아.”

“아.”

다정한과 이윤은 가리킨 그 너머를 보곤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그곳에 있는 건 처참한 몰골을 한 양아치들이었다.

“…어떡하지.”

“어엇….”

“…….”

…본래라면 한도훈이 알아서 처리해 줬겠으나, 지금 그는 이곳에 없었다. 세 사람은 잠시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서로를 감싸며 피부를 짓눌렀다.

“…젠장.”

김시원이 짧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신경질적인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짧은 머리가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김시원은 그대로 자리를 옮겨 의자 하나를 걷어찼다.

“일어나, 곰탱이.”

“…어.”

이 산만한 와중에도 잘 수 있다니, 정말 놀랍게도 굵은 신경이었다. 아니, 그만큼 둔한 건가. 김시원은 책상에 엎어져 졸고 있던 서강이를 질린 시선으로 보곤 고개를 어느 한쪽을 향해 까딱였다.

“짐 나르는 거나 도와.”

“…짐.”

“……잠깐, 그 뜻은.”

다정한이 쓴 미소를 지으며 미간을 좁혔다. 김시원은 그 말을 무시하며 이리저리 흩어진 책상과 의자들을 대충 정리한 후 한 놈을 척 짊어졌다.

“근방 쓰레기장이나 공터에 버리면 되겠지.”

그러곤 성큼성큼 뒷문을 향했다. 이윤은 그런 김시원을 멍하니 바라보다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보기보다 되게 성실하구나!”

“시끄러.”

칭찬이야, 뭐야. 그는 짜증스레 대꾸하며 아직도 멀뚱히 있는 놈들에게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데. 곧 수위 아저씨 올 거야.”

한도훈이 손을 써 예정했던 시간의 끝이 다가왔다. 곧 있으면 그의 말대로 수위가 들이닥쳐 이 꼴을 마주할 터였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수위에게 빼도 박도 못하고 가해자로 몰릴 터였다.

“아, 그렇지. 어서 가자, 정한아!”

“어, 응. …음?”

다정한은 반사적으로 대꾸하다가 눈앞에 지나가는 커다란 덩치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서강이가 묵묵히 널브러진 한 놈을 짐짝 짊어지듯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시원의 뒤를 따라가는 그 모습이 마치 잘 조련된 곰…같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다정한은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다가 이내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잘 지내고 있나 보네.’

이윤의 말대로 서강이는 확실히 잘 지내나 보다. 원래도 군소리 없는 편이긴 했으나, 저렇게 말을 잘 듣는 걸 보면 김시원이 그를 살뜰히 잘 챙겨 주고 있다는 방증이 틀림없을 터였다. 혼자 떨어져 잘 지내나 걱정했었지만, 걱정하지 말라는 이윤의 말대로 필요 없는 일이었었나 보다. 그는 안도의 미소를 띠며 이윤이 짊어진 남자의 반대 팔을 붙잡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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