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65화 (165/306)

165. 장미의 유혹. (5)

“우으…. 정말!”

하지만 주연희는 기분이 썩 나아지지 않았는지 심통 난 듯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새침하니 꽤 귀여워 나도 모르게 상황 분간도 못 하고 웃음이 픽, 나왔다.

“왜 웃어요. 웃지 마요!”

“큽, 크흡, 아, 미안, 미안.”

괜히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나는 바로 사과했다. 주연희는 내 말에 입을 세모꼴로 삐죽이며 나를 흘끗 노려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

“…아~ 정말!”

주연희가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녀는 어딘가 기분이 풀린 것처럼 잠시 눈을 감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역시 나오니까 좀 낫네요.”

“…….”

“혼자가 아니어서 더 좋아요.”

나는 대꾸 없이 주연희를 보다가 이내 그녀를 따라 벤치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 말이 없이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그런 우리 곁으로 잔바람이 곁을 훑고 지나가 더위에 지치지 않도록 열을 식혀 주었다. 나는 그 바람결이 기분 좋아 눈을 감아 그 감촉을 느끼기로 하였다.

“언니.”

그러길 얼마나 있었을까, 주연희가 나를 불렀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주연희를 보았다. 주연희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잠시, 얘기 좀 들어 주실 수 있어요? …아주 조금만요.”

그 모습은 어쩐지 멍해 보였고, 어느 한 편으론 조금 지쳐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벤치 뒤로 손을 둘러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그녀를 따라 하늘을 보았다.

“조금이 아니라.”

그리고 그녀를 향해 편히 웃으며 말했다.

“그냥 네 분이 풀릴 때까지 해.”

그러자 주연희가 어딘가 멍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얼굴이 울듯 조금씩 일그러졌다.

“…흐, 흐핫. 아, 눈에 먼지가. 잠시만요.”

그러나 그녀는 웃음으로 그 눈물을 흩트리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아아.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주연희가 과장스럽게 어깨를 떨어트렸다. 그러다 그녀는 잠시 입을 꾹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전 아직도 제 상황이 믿기질 않아요.”

깍지 낀 그녀의 손톱이 세워지며 양 끝이 반대의 손등을 지그시 눌렀다. 어딘가 불안한 듯 누르기를 반복하는 걸 지켜보던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믿을 필요도 없고, 납득할 필요도 없어.”

고개를 숙이던 그녀의 시선이 들어 올려졌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넌 그냥 피해자야. 더러운 자본의 피해자지. 그게 어떻게 납득할 이유가 되겠어. 넌 충분히 분노해도 되고, 그 녀석들을 용서하지 않아도 돼.”

사실 가해자 중 한 명이었던 문설희를 용서하겠다고 한 건 꽤나 놀라운 결정이었다. 그래서 아까 주연희가 문설희에게 했던 행동은 내게도 그 의미가 잘 전달되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복수를 했던 것일 터였다.

자존심이 있는 문설희에게 절대적인 피해자로 몰아붙인 것. 그리고 그녀에게 죄책감을 더하는 것.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상한 복수였다.

다른 사람에겐 주연희의 행위는 참으로 의로워 보였을지 모른다. 또 성주찬에겐 그녀의 행동이 간사하게 느꼈을지도 모르고, 그녀 자신은 그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였지, 문설희는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그것은 모두 느낀 바가 다 다를 터였다. 하지만 내 눈엔, 문설희를 감싸던 그 순간 내비친 그녀의 눈동자 속에 어린 그 고통을 엿본 나로선, 그것은 자상한 그녀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로만 보였다.

그렇기에 난 그녀가 안타까웠다. 이렇게 착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지도 걱정되었다. 이게 바로 ‘착한’ 여자 주인공의 천성적인 숙명인가, 하는 씁쓸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지만 이런 마음을 전하기엔 내 말주변이 형편없었다. 나는 잘 전달될지 모르겠으나, 얼굴을 굳건히 바로잡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넌 잘못 없다는 거야! 다음도 이런 일 당하면 그냥 그 자식을 패 버려!”

주먹을 불끈 쥐며 말에 힘을 실어 보였다. 주연희는 그런 나를 두 눈 크게 뜨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 흐하하….”

아, 어떡해. 주연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려 노력했으나, 결국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나직이 탄식을 중얼거렸다.

“엄마랑 똑같아….”

…엄마? 나는 난데없는 단어에 눈을 멍청히 깜빡였다. 주연희는 그런 날 보지 못한 채 얼굴을 하늘로 향하며 눈물을 꾹 참아 내더니 이내 손을 치우고 내게 씩 웃어 보였다.

“방금 한 얘기, 저희 엄마랑 정말 똑같았어요.”

***

그녀는 내게 지나온 삶을 알려 주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가 있어서 괜찮았다. 엄마는 아름다웠고 또 현명했으며 인자하신 분이셨다.

하지만 3년 전, 그녀가 중학교 1학년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이후부터 그녀는 삼촌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삼촌에게 보답하고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삼촌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는 일까지…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끊는 일 없이 계속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삼촌이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동생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나라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

“그러다 보니까… 어느샌가 체념, 네, 맞아요. 체념을 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주연희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었는데….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는데…. 전 엄마를 떠나보낸 이후부터 줄곧….”

그리고 그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아픈 미소를, 환히 지었다.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

주연희는 깨달았다.

‘뭐? 그런 걔가 그렇게 말했다고?! 연희야, 그럼 가만히 듣고만 있지 말고 한 대 때려 버려! 어디 모자랄 게 없는 내 자식을 함부로 대해!!’

‘그럼 가만히 듣고만 있지 말고 한 대 때려 버려! 어디 모자랄 게 없는 내 자식을 함부로 대해!!’

‘넌 잘못 없다는 거야! 다음도 이런 일 당하면 그냥 그 자식을 패 버려!’

지난날 엄마가 해 준 그 말을 다시 듣는 순간.

‘…너무 참지 마.’

자신을 공감해 줄 사람이 필요했음을.

‘열일곱이잖아. …그러니까, 굳이 참지 말라고.’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주연희는 결심했다.

“언니.”

“…응.”

주연희는 곁에 있는 이를 불렀다. 그러자 차분한 음성이 그녀의 부름에 화답해 왔다. 그녀는 그에 조용히 작게 미소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이제 참지 않을래요.”

나지막한 결심이 울렸다. 주연희는 푸르른 하늘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전 아직 열일곱 살일 뿐이니까….”

그리고 다시 눈을 뜰 때는 여전히 청명한 푸르름이 그녀를 기다렸다. 그것이 마치 자신을 향해 언제나 응원해 주던 엄마의 미소 같아 그녀는 일그러지는 미소를 띠며 그 하늘로 자신의 손을 뻗어 보았다.

“그러니까 더는 참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되지? 엄마. 들리지 않는 질문이 보이지 않는 너머로 향했다. 그것은 엄마가 죽고 나서 처음 던져 본 그녀의 투정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 그 잔인한 현실이 싫어 앞만 보고 죽어라 달렸다. 사실 앞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현실은 답답했고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만 같았다. 그녀의 삶은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엄마가 죽은 그 이후부터 줄곧 말이다.

그러나 이젠 그녀는 체념밖에 없었던 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비록 그 가는 길이 혼자일지 몰라도 그녀는 발버둥 치고 싶어졌다. 적어도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기 그 직전이라도 좋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어졌다.

“그래도 돼.”

멈칫, 주연희는 뻗은 손을 움찔 떨었다. 들려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답이 돌아왔다. 심장이 덜컹이며 요란스레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곁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 곁에는 자신을 줄곧 지켜본 것처럼 차분히 바라보고 있는 서이나가 있었다. 주연희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덧그렸다.

“…네!”

***

주연희의 감정이 어느 정도 추스른 것 같자 우리는 다시 학교로 향했다.

“……헐.”

“어, 어떡하죠…?”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다. 다름이 아니라 후문에 경비가 떡하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벌점용 명단을 끼고서. 아마 사유 없이 무단으로 학교를 나가는 학생을 막기 위해 있던 것이리라. 분명 나갈 때만 해도 없었는데…. 나는 일이 번거로워짐에 혀를 짧게 차다가 곰곰이 학교 구조를 떠올리며 경비 아저씨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몰래 소리를 죽이며 자리를 이동했다.

‘정문은 너무 확 트여서 잘 보이는데…. 보자, 내가 알기로 분명 이쪽 방향에….’

“아, 여기다.”

나는 내 키의 절반 이상은 커 보이는 담벼락을 발견했다. 왜 이곳에 왔는가, 그 이유야 당연하지 않은가.

“넘자.”

“네…? 여, 여길요?!”

“응.”

주연희가 기함한 듯싶었지만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키가….”

“아, 걱정 마. 내가 너 받쳐 줄게. 너 먼저 넘어가.”

우선 주연희를 먼저 보내 놓고 나는 따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안심하란 의미로 그녀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려 주자 주연희는 여전히 불안한지 담벼락과 나를 자꾸만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그래도 되는 걸까요?”

“벌점 먹는 것보단 낫지. 그리고 이것도 추억 아니겠어!”

“하지만 저 많이 무거울 텐데….”

“괜찮아, 괜찮아!”

왠지 묘하게 들뜨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학교 담을 넘어 본 건 처음이라서일까. 어쩐지 조금 흥분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준비됐다는 의미로 허리를 숙여 주연희에게 어서 넘어가라고 재촉해 보였다.

“자, 자. 어서!”

“그, 으럼… 시, 실례하겠습니다.”

주연희가 내 등을 살포시 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 무게에 충격을 먹었다.

‘아니, 뭘 먹었길래 이렇게 가벼워?!’

무겁긴커녕 너무 깃털 같아서 이게 사람의 무게가 맞나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속으로 기함하고 있던 중, 주연희가 막 담을 다 올랐는지 그 가벼운 무게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휴…. 어, 어?!”

그런데 막 다 오른 주연희의 반응이 이상했다. 내가 즉각 고개를 위로 향하자 주연희가 손을 허둥거리더니 순식간에 건너편으로 떨어졌…, 떨어져?!

“꺄악-!”

“연희야?!”

그녀의 비명과 함께 쿵, 하는 소리에 내 심장도 같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한달음에 담벼락과 거리를 벌린 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다시 담벼락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막 다다를 즈음 가볍게 지면을 박차 담벼락의 끝을 두 손으로 받치고 날렵하게 그 건너로 뛰어넘었다.

“괜찮아?! …엥?”

사뿐히 착지를 마치고 그녀의 안위를 파악하기 위해 즉각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데 나는 보이는 광경에 경악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으아아….”

“…….”

다름이 아니라, 고통의 신음을 내뱉고 있는 주연희가 똥 씹은 얼굴을 짓고 있는 최강혁을 깔고 앉아 있는, 그런 기묘한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와우.”

그리고 왜 여기 있는지 모를, 방관자 자세인 고찬영도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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