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68화 (168/306)

168. 장미의 유혹. (8)

최강혁의 분위기가 한층 진정된 것이 여실히 보였다. 그는 언제 흥분했냐는 듯 능청스럽게 웃으며 쥐던 주연희의 멱살을 가벼이 들어 보였다.

“아, 그렇지-. 너, 이 여자 알고 싶다 했던가?”

“어? 자, 잠깐, 그건…! 윽…!!”

곧장 반박하려는 주연희의 입을 최강혁이 막았다. 아까보다 더 강하게 붙들린 멱살에 주연희가 괴로워하며 신음했다.

쟤 진짜 멱살 쥐는 거 엄청 좋아하네! 나는 그 행동에 인상을 구기며 이번에야말로 진정 막기 위해 가려는데, 고찬영이 또 날 놔주지 않았다. 그래서 진짜 화가 난 내가 그에게 따지려는데, 고찬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반휘혈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기 힘든 그의 진지한 모습이어서일까, 나는 또 벗어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럴 때 최강혁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거슬렸냐? 반휘혈.”

최강혁의 빈정거림이 반휘혈에게 정확히 향했다. 평소라면 반휘혈에게 그런 말은 씨알도 안 먹힐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주연희라면.

“그래.”

역시. 나는 그 말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동시에 최강혁의 비웃는 게 명백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그 소리를 무시하며 방금 들었던 최강혁과 반휘혈의 대화를 곱씹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알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소문으로만 접했을 때는 너무 당황했기에 놀라기만 했을 뿐이었는데, 막상 현실을 눈에 직접 담게 되니 뭐랄까…. 더 놀랍다고 해야 되나…? 아니, 그보단 조금, 뭔가…

알쏭달쏭한 기분에 고개가 저절로 갸웃거려졌다. 하지만 계속 두 사람의 대치를 방관하고 있을 순 없다 보니 내 입을 막고 있는 고찬영의 손을 강하게 치워 냈다.

“엇.”

방심하고 있던 고찬영이 아차, 하는 틈을 타 재빨리 그 품에서 벗어났다. 나는 고찬영을 뒤로한 채 최강혁에게 다가갔다.

“둘 다 그만 싸우고 넌 연희나 놔주지?”

“흠.”

이젠 적당히 하라는 경고를 때리자 반휘혈에게 고정되어 있던 최강혁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졌다. 그는 잠시간 날 지켜보더니 다시 반휘혈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그는 만족스러운 무언가를 본 것처럼 짓궂은 미소를 달며 쥐던 멱살을 드디어 놓았다.

“앗…!”

나는 다리에 힘이 빠진 듯한 주연희를 곧장 부축했다.

“괜찮아?”

“어, 어, 네…. 그, 근데 언니, 그…!”

“괜찮으면 됐어.”

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안심하란 듯 웃어 줬다. 그러자 주연희가 말을 멈추며 입만 멍하니 벌린 채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시선을 들어 올려 3층에 있는 창 쪽을 보았다.

그곳엔 뒤늦게 나를 발견한 모양인지 눈을 부릅뜨고 날 보고 있는 반휘혈이 있었다.

흔치 않게도 반휘혈은 내 등장에 꽤나 놀란 기색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내가 있는지 몰랐던 건가. 아무래도 내가 내 위치에서 반휘혈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 또한 고찬영의 덩치에 가려진 나를 발견 못 했던 것 같았다.

나는 그 멍하니 굳어진 듯한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품에 있는 주연희를 보았다. 주연희는 왠지 모르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눈을 초조하게 굴리고 있었다. 어쩐지 피식, 하고 입가에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최강혁을 바라보았다.

“최강혁, 너도 적당히 해. 그동안 도와준 게 있어서 나도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기분 나쁘단 이유로 손이 너무 쉽게 올라가는 그의 행태가 아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싸늘히 그에게 최종 경고를 때리자, 최강혁이 픽 웃으며 말없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가자, 연희야, 찬영아.”

“어, 어? 아, 네…!”

“…….”

주연희는 내 부름에 즉각 대답했다. 그런데 고찬영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처럼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뭐 해? 안 가고.”

“…음? 아. 그래.”

그 모습이 의아해 그를 부르자, 고찬영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몇 걸음 걸었을까, 고찬영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발을 멈춰 세웠다. 나는 이번엔 또 뭔가 싶어 그를 보자 그는 뒤를 돌며 최강혁에게 외쳤다.

“야, 역시 싸움은 네가 이긴 걸로 해! 내가 기권할게!”

“…뭐?”

“엥?”

나와 최강혁은 그 말에 고찬영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고찬영은 여전히 태평하기 그지없는 낯짝이었다.

“나 이젠 진짜 그런 거에 관심 없거든.”

“잠깐. 그럼 왜 밖으로 부른 거지.”

고찬영의 말에 최강혁이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그야 너 따라오게 한 건 반에서 괜한 소동이 일어날 것 같아서고. 원래부터 싸울 생각 없었어. 그럼 난 간다~.”

고찬영은 그 말을 내뱉곤 유유자적하면서도 빠르게 그와 멀어졌다. 최강혁은 그런 고찬영의 뒷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황당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뒤늦게 정신이 차리곤 황급히 고찬영을 쫓았다.

“야, 같이 가!”

“저, 저도…!!!”

괜히 있다가 더 골치 아프게 엮이기 싫었던 내 걸음이 빨라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허….”

최강혁은 세 사람이 사라진 곳을 잠시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그의 얼굴은 짜증스레 굳어졌으나 이어 들려온 인기척에 그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흐음?”

그는 눈에 담겨 오는 것에 흥미롭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곳엔 여전히 짜증 나는 반휘혈이 있었다. 하나 그 자세가 평소 그 꼿꼿한 자세와 남달랐다. 반휘혈은 평소 그 포커페이스를 어디다 던져 버렸는지 창틀에 비틀거리듯 기대며 이마를 두 손으로 짚고 있었다. 최강혁은 그 모습이 낯설었으나 그와 별개론 꽤나 유쾌하게 다가와 방금까지 기분 나빴던 것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병-신.”

거기에 최강혁은 그를 더 골려 주기 위해 조소를 가득 담아 그를 비아냥거렸다. 반휘혈이 그 소리를 듣고 몸을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그 덕에 최강혁의 기분이 더 풀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는 만족스레 웃으며 반휘혈을 향해 한 번 더 비웃어 준 후, 몸을 돌렸다.

“흐흠~.”

자신을 강하게 노려보는 반휘혈의 시선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최강혁은 흔치 않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더는 볼일이 없는 이곳을 떠나려 했다.

빡-!!

“아익……!!!……이, 개새끼가…!!”

그의 뒤통수에 필통을 날린 반휘혈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그는 깨질 것 같은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쌍욕을 갈겼다. 그렇지만 반휘혈은 그를 차갑게 내려다본 후,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남은 자리엔 고통을 참아 내며 이만 박박 갈아 대는 최강혁만 있을 뿐이었다.

***

“음? 왔어? 누나랑은 잘 얘기했어?”

반으로 다시 돌아온 반휘혈을 맞이한 건 심심한 듯 손 위에서 펜을 굴리고 있던 한도훈이었다. 반휘혈은 대답 대신 영혼 없는 눈동자로 한도훈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뭐야…? 너 반응 왜 이래. 누나랑 무슨 일 있었어?”

누가 보면 그냥 평소와 같은 냉대였겠지만, 그를 오랜 시간 봐 온 한도훈은 아니었다. 평소와 달리 초점이 없는 눈동자와 묘하게 힘이 빠진 듯한 걸음걸이. 한도훈은 반휘혈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기민하게 눈치챘다.

“누나가 싫대? 그럴 리가 없는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진짜….”

“…….”

한도훈은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 반휘혈은 여전히 힘이 빠진 상태로 침묵만을 고수했다. 그 모습에 한도훈은 사태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거절당하기라도 한 거야…?’

평소보다 눈에 띄게 설렌 기색을 가득 담아 떠났던 그다. 그래서 돌아올 땐 더 기분이 좋을 줄 알았건만 막상 돌아온 모습은 마치 차인 사람처럼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뭔데…. 진짜 뭔데…!’

한도훈의 눈동자가 당황스럽게 흔들렸다. 도대체 몇 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심히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분 전. 과학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반휘혈은 어딘가 멍한 상태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아침부터 어딘가 정신을 빼먹기라도 한 모양인지 평소보다 무기력해 보였다.

사실 이것은 며칠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서이나가 주연희의 괴롭힘 사건의 보호자 겸 조력자로서 이것저것 도와주다 보니 그녀가 반휘혈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부쩍 줄어들었다. 또 하교도 주연희의 안전을 위해 같이 해 주는 바람에 서이나와 만날 기회가 더욱 없었다. 그 탓에 반휘혈도 그에 따라 나날이 낯빛에서 색이 사라져 갔다. 남들 눈에는 어떨지 몰라도 그것은 한도훈의 눈엔 확실히 비쳐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 모두 오늘로 끝이라며 다시 함께 다닐 수 있을 것이라 위로는 해 줬으나… 글쎄. 얼마나 소용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반휘혈은 하교를 같이 못 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나, 하고 그를 위해 고민해 주고 있을 그때였다. 반휘혈의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수업 시간이었으나 두 사람 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반휘혈은 무심하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러곤 그의 눈이 한 차례 커졌다.

눈에 띄는 변화에 한도훈도 그것을 주목했다. 반휘혈의 옆에 앉아 있던 한도훈은 주인의 허가 따윈 무시한 채 고개를 불쑥 내밀어 확인했고, 화면의 비추어진 내용에 한도훈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형]

[이번 주 토요일. 데려와도 좋아.]

드디어…!

한도훈은 입을 틀어막았다. 드디어 반휘석의 집들이 허가가 떨어졌다. 원래는 그냥 강행하려 했던 반휘혈이었지만, 반휘석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자신이 없을 때, 아무리 친한 누나여도 단둘만 있는 건 안 된다고. 아니면 그 외에 다른 친구들도 부를 거 아니면 절대 안 된다며 말이다. 그래서 반휘혈과 반휘석이 그 사건으로 잠시…, 아니, 실은 지금까지 냉전이라고 알고 있던 한도훈이었다.

드디어 상견례를 하는 건가…!

누가 들었으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바로 태클을 걸었을 생각이었지만, 한도훈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반휘혈의 어깨를 짚고 말했다.

‘수업 끝나자마자 나갈 거지? 그렇지? 누나한테 말하러 갈 거지?’

한도훈의 볼은 상기되었고, 그의 눈은 크게 깜빡였다. 그 모습이 여간 사랑스러운 게 아닌지라 과학실에 있는 모두가 그 모습을 귀엽다고 여길 정도였으나,

크크큭. 이제야 그 계집이 끼어들 타이밍이 사라지겠군.

그의 속내는 달랐다. 그의 마음속에선 흉계를 꾸미는 것 같은 사악한 미소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그 눈엣가시 같던 주연희를 냉큼 떨쳐 버릴 찬스가 왔다. 이젠 사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반휘혈과 서이나 단둘만의 문제만 남았다. 반휘석이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는 제 사람에겐 꽤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자신의 남동생에겐 말이다. 그러니 그는 반휘혈을 위해서라도 두 사람만 함께 있을 타이밍을 잡아 줄 게 분명했다.

또 평소라면 이쯤에서 저리 치우란 듯이 냉정하게 손을 쳐 내는 반휘혈의 손길이 느껴졌을 터였지만,

‘…응.’

파아아, 하고 봄날의 꽃처럼 점점 색채를 더해 가며 화사하게 피어나는 그의 분위기로 인해 한도훈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기쁜 듯한 반휘혈의 모습은 꽤나 압권이었다. 덕분에 한도훈을 포함해 반휘혈을 흘깃거리던 모두가 잠시 넋을 놓았다. 하나 한도훈은 금세 정신을 차리곤 반휘혈을 향해 열심히 응원했다. 반휘혈도 그의 응원을 마다하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을 정도였다.

반휘혈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는 바로 짐을 들고 쏜살같이 나가 버렸다. 그게 불과 10분 전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진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침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가. 한도훈은 초조하게 침을 삼키다가 이내 결심했다. 어차피 이 상태의 반휘혈에겐 답변을 털어도 안 나올 터였다. …그러니 이럴 땐 역시 그 수밖에 없었다.

“…왜 불렀냐.”

바로 서이나, 본인에게 직접 묻는 방법밖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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