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장미의 유혹. (9)
***
얜 대체 왜 날 부른 걸까.
짐짓 심각한 얼굴로 날 보고 있는 한도훈을 보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마침 귀찮아진 타이밍이라 반갑긴 했다만….’
사실 이전 쉬는 시간에 고찬영과 함께 들어가자마자 모든 학생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하던지 심란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잊힐 정도였다. 반 아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정확히는 고찬영에게 몰려들었다. 그러곤 하나같이 묻는 말.
‘누가 이겼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갑자기 몰린 인파에 어지럽던 정신을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최강혁이 우리 반에 쳐들어왔었댔지. 학교에서 핫한 두 사람이 서열 싸움을, 그것도 사대천왕이란 자리를 가져갔으면서도 재차 고찬영에게 리매치를 거는 최강혁의 모습은 뜨거운 가십거리가 되기엔 충분했다.
‘아, 그건….’
‘어, 근데 상처가 없네?’
‘헐…. 서, 설마 상처 없이 이긴 거야…?!’
‘대애애애박---!!!!!’
‘미친! 찬영아, 난 널 믿고 있었어!! 역시 사대천왕 짬밥 어디 안 가는구나!!!’
‘그래-! 지난번에 쉽게 졌다는 말, 난 안 믿었어!’
게다가 상처 없이 멀끔한 고찬영의 상태로 인해 금방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 기세가 너무 열광적이라 그런 게 아니라는 고찬영의 대답이 묻힐 정도였다. 다만 그 이후 바로 수업이 시작되어 상황은 잠깐 잠재워졌지만, 문제는 이번 쉬는 시간에 나타났다.
수업 내내 그 생각만 한 건지 아이들이 다시 떼로 몰려들어 고찬영에게 눈을 빛내며 이것저것 캐물었다.
‘이나, 너 찬영이랑 같이 왔잖아! 뭐 본 거 없어?’
‘맞아! 두 사람 싸우는 거 본 거지? 그렇지???’
더군다나 같이 반에 들어왔다는 죄목으로 나까지 엮여 버렸다. …왜 얘기가 저렇게 되는 건지. 내가 그냥 우연히 복도에서 만난 거면 어쩌려고 저리 단정 짓는가. 도대체 난 이들에게 무슨 이미지인지 원….
불쑥 근심이 어리고 있던 그때 연락이 온 게 바로 한도훈이었다. 그 호기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는 곧장 급한 볼일이 있다며 떠났다. 내 등 뒤로 ‘친구님?!’ 하고 당황과 원망이 혼재된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이후에 무슨 소릴 들을지 걱정이 좀 되었으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숨을 돌리며 애들과 자주 만나는 창고에 들르자, 보이는 건 바로 이 심각한 한도훈이었다.
‘대충 뭔 일인지 짐작은 간다만….’
한도훈이 움직이는 경우는 반휘혈이나 나 아니고선 거의 없으니만큼 확신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게 이전 쉬는 시간에 만난 건 반휘혈도 포함되지 않았던가. 더불어 그 대단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는 광경도 포착했고 말이다. 설마 나를 제외하고 반휘혈이 ‘여자’라는 생물에 관심이 있는 걸 지켜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여간 낯선 게 아니었다.
‘아니, 뭐…. 당연한 일이지만.’
이미 예정된 일이었고, 그로 인해 기분이 이상해질 것도 없었다. 개학 초부터 꾸준히 각오했던 일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이렇게 심란한 건….
‘내가 속이 좁은 탓이지, 뭐.’
아무래도 한 사람에게 관심이 집중당하는 기분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나 보다. 예상했던 일일지언정 직접 다가오니 기분이 보통 꿀꿀한 게 아니었다. 그의 행복을 응원한다고 해 놓고서 이렇게 이율배반적이라니. 지나치게 이기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마음에 더 거슬리는 건 그거뿐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를 떠나기 전 보았던 그의 얼굴. 반휘혈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줄 몰랐던 것처럼. 평소에 날 만나면 좋다고 따라다닐 땐 언제고 그렇게 얼굴을 굳히는지…. 불현듯 예전에 여자 친구 소개시켜 주기 싫다고 들은 게 떠올랐다. 어쩌면 난 눈치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서 반휘혈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 것이 아닐까. 어쩐지 서운해지려는 마음에 입이 저절로 삐죽여졌다.
“휘혈이 때문이야?”
반으로 돌아간 반휘혈이 여간 기분이 나빴나 보지. 괜히 기분이 꿍해져 볼멘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아-! 역시 맞구나!”
아니나 다를까 한도훈이 내 질문을 바로 물었다. 그는 대뜸 얼굴을 들이대며 몰아붙이듯 내게 다가왔다.
“누나, 진짜 거절한 거예요?!”
“음?”
기세에 질려 잠시 낯을 구기던 나는 귀에 포착된 이상한 단어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거절? 뭘 거절해?”
내가 뭔가를 거절했던 일이 있었던가…. 그것도 반휘혈한테…? …없는 거 같은데?
“엥. 아니에요? 하지만 휘혈이가….”
“난 뭔가를 거절한 기억이 없는데… 휘혈이가 왜?”
어째… 기묘하게 말이 엇나갔다. 아무래도 한도훈이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도훈도 대화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인지 표정이 달라졌다.
“……누나, 혹시 휘혈이한테 들은 거 없어요?”
“없는데.”
아까도 거의 얼굴만 보고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도훈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 주자, 그가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며 이마를 붙잡기 시작했다.
“으읏, 그럼 대체…! 걔는 방금 쉬는 시간에 뭘 하다 온 건데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인지 한도훈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 서려 있었다. 나 또한 한도훈이 말한 그 거절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이것은 이따가 차차 묻기로 하며 그의 질문에 답해 줬다.
“음…. 연희 구해 준 거?”
“예…?”
내 대답을 들은 한도훈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마치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같은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친절하게 지난 쉬는 시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 아악…!!! 또, 또…!!!”
그러자 얼마 안 가 한도훈이 주변에 있는 책상을 쾅쾅 치며 요란을 떨기 시작했다. 그가 감정을 이렇게 여실히 보이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간 발광하는 한도훈을 구경했다. 한도훈이 진정된 건 잠시 후였다. 그는 진정하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곤 억지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함인지 빡친 얼굴 그대로 환히 웃어 보였다.
“…그래요. 아무튼, 휘혈이는 거절당한 게… 아니다, 이거죠?”
“어어. 뭔진 모르겠지만 거절한 적은 없어.”
그의 질문에 긍정으로 대답해 주자 한도훈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더니, 이번엔 정말 완벽한 미소를 활짝 피어 냈다.
“그럼 괜찮아요!”
오…. 무언가 그 안에서 정신 승리를 한번 한 것 같았다. 대체 뭔 일 때문에 저러는 건가. 이 자식이 벌이는 일은 언제나 요주의다 보니 괜히 긴장이 되었다. 나중에 일이 커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물어보는 게 좋을까. 반휘혈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를 것 같긴 하다만…. 아까 만났던 그의 태도 때문인지, 섭섭한 마음이 들어 왠지 그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워졌다.
…무엇보다 반휘혈이 정말 나 때문에 상태가 이상했던 걸까?
한도훈의 예상과 달리 반휘혈의 이상은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연희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침 그 자리엔 주연희도 함께 있었고, 그가 막 주연희를 도와준 직후였다. 뭐 때문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모르지만 주연희와의 관계 때문에 최강혁이랑 갈등이라도 빚어서 그저 그냥 기분이 나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휘혈은 예민한 구석이 있긴 하나 그것을 표출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한도훈이 기분이 나빠진 반휘혈을 보고 극성 모드가 된 것도 납득이 갔다.
‘얘도 참… 휘혈이 좋아한다니까.’
새삼스럽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참 특이하다고 느껴졌다. 반휘혈은 한도훈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아서 더 그랬다. 물론 지나치게 차별이 심한 한도훈과 좀 다른 게 있다면 반휘혈은 누구에게나 한결같다는 점이었지만 말이다.
뭐, 이건 둘째 치기로 하자. 지금은 반휘혈 생각해 봤자 기분만 꿀꿀해졌다. 그보단 한도훈을 보면 가장 묻고 싶었던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럼 이젠 나도 좀 묻자.”
“뭔데요?”
눈을 깜빡이는 그 얼굴을 마주한 채 진지하게 물었다.
“너, 배후가 누군지 알지?”
지금과 상관이 없는 말이긴 하였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가 남아 있었다. 주어를 생략한 내용이었지만 한도훈이라면 충분히 알아먹었을 거라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한도훈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짓궂은 미소를 달았다.
“흐~음~. 하도 안 묻길래 까먹고 있었나 싶었는데, 아니었네요?”
그가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휘었다.
“정신없어서 타이밍을 놓친 거뿐이거든? 아무튼 누구냐니까.”
장난기가 다분한 그의 표정에 나는 질린 시선을 아끼지 않고 툴툴거렸다.
“그러게요~? 과연 누굴까요~? 누나는 짐작 가는 사람 있어요?”
하지만 한도훈은 내 애를 제대로 태워 먹을 작정인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돌릴 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않았고, 덕분에 내 인내심을 바닥을 맛보았다.
“좋게 말할 때 말해라.”
“으아아-!! 아파요! 아파-!!”
내 손에 의해 볼이 쭉쭉 늘어진 한도훈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통을 호소했다. 내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보며 마지막 기회라며 놓아주자, 한도훈이 코를 훌쩍이며 나를 째려보았다.
“씨잉…. 좋게 말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 말에 다시 조용히 손을 들자 한도훈이 척, 하고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내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어휴…. 그래서 누구냐고.”
얘랑 이런 대화만 하면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찬영이랑 연희, 다 관련된 거 아냐.”
“음? 알고 있었네요?”
그럼 모르겠냐…. 너무 내 수준을 얕보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연희가 당한 일도 그렇고, 현호가 보내 준 음성 파일도…. 이 정도면 그림이 안 그려지는 게 더 이상하다.”
이현호가 보내 준 파일을 듣게 된 건 성주찬 일행을 만난 그날이었다. 성주찬 일행을 잡은 그 밤. 그때 있었던 이야기와 이현호가 보내 준 음성 파일의 방향이 같았다. 이현호가 잡아 캐물은 김… 누구더라. 아무튼 김 뭐시기도 성주찬과 마찬가지로 그 거북이 경주인가 뭔가 하는 도박에 빠져 있었다. 그로 인해 누군가 자신에게 번호를 알려 주겠다며 접선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 조건으로는 고찬영에게 알 수 없는 액체를 건네주고 마시게 한 후, 최강혁에게 시비를 걸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돈에 눈이 멀었던 김 어쩌고와 그 녀석이 주는 콩고물에 넘어간 놈들은 고찬영을 배신했다.
2개월 전, 나는 그들의 배신을 고찬영에게 전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무겁기 그지없던 진실이었으나, 더 깊은 수렁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이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게도, 주연희도 고찬영도 아닌 최강혁이 바로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물증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내 수중에 그 음성 메시지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증언만으로 충분했다. 지금 이 모든 판은 악역으로 추정되는 이 한 명이 모두 벌인 계획이었다. 왜 이런 짓을 벌였느냐, 하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겠지.
최강혁을 사랑해서.
인소나 여느 로맨스 소설에 여성 악역이 등장하면 대부분 한 남자에게 미쳐서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짓을 저지르긴 하나 직접 보니 정말 머리가 아파 올 정도였다.
그걸 다시 떠올리고 있자니 또 두통이 이는 기분이었다. 주연희나 고찬영에겐 아직 이 사실을 얘기하질 못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말하겠는가. 또 피바람 불 일 있나. 고찬영 자의로 리벤지를 원하는 게 아니고선, 이런 한탄스러운 현실로 또 좌절을 겪게 하며 분노에 젖어 싸움을 걸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슬프지 않은가.
“아무튼, 그래서 누구야. 그 녀석.”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정말 알아야 할 때가 왔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던 그 중심에서 최강혁이라는 미끼를 물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피해가 발생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언젠가 최강혁이 자신의 삶이 누군가가 조종하는 각본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땐 운명의 흐름을 느끼는 건가 싶었다. 이것도 틀린 말이 아닐 수 있겠으나 어쩌면 내막은 더 단순할지도 모른다.
“흐음-. 궁금해요?”
“그래.”
“이젠 누나랑 상관없잖아요. 또 내가 그렇게 할 거고.”
한도훈이 미소를 지운 채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였다. 꽤나 듬직한 소리라 하마터면 감동할 뻔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짙게 드리워진 탐색의 기색 때문에 다 말아먹어 버렸다. 나는 이 와중에도 나를 시험하려는 듯한 그의 자세에 속에서 혀를 찼다.
“사람 일 모르는 거다. 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당하기 싫거든.”
단호한 나의 대꾸에 한도훈이 무언가 못마땅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낯을 찌푸렸다. 하나 내가 말을 물려 줄 기미가 전혀 없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요. 누나가 정 원하면 알려 줄게요.”
드디어. 나는 그 대답에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젠 정말 더는 무를 수가 없었다. 운명의 바람은 더 거세진 게 느껴졌다. 곧 이 바람은 태풍이 되어 발로 꼿꼿이 버티고 서 있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 녀석의 이름은….”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아가야만 했기에, 나는 이 발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