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70화 (170/306)

170. 장미의 유혹. (10)

***

…라고 다짐을 했던 내가 있었긴 했으나,

“만나서 반가워요. 서이나 양.”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뭔가.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건너편에 마주 앉아 꽃이 만개한 것 같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를 보며 눈을 흐렸다.

“다시 인사드릴게요. 저의 이름은 백장미라고 해요.”

‘그 녀석의 이름은 백장미예요.’

다름이 아니라 이 여자는, 한도훈이 말한 요주의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

지금으로부터 약 두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수업을 마친 오후. 오늘은 금요일이라 야자를 하지 않고 체육관을 가는 날이었다. 요즘 일이 이래저래 바빠서 체육관을 빼먹는 일이 잦았다. 덕분에 근손실이 걱정이 된 난 오늘은 기필코 제대로 몸을 조지겠다며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데, 그런 내 뒤로 고찬영이 들러붙었다.

“친~구~님~! 오늘 나랑 놀아 주라~!!”

“안 돼. 나 요즘 너무 빠졌어.”

“나랑도 최근에 논 적 없으면서!”

“그야 넌 여자 친구 때문에….”

나는 고찬영의 말에 대꾸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문설희랑은 어떻게 돼 가는 걸까. 주연희 일로 정신이 없었다 보니 문설희의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슬슬 헤어져 줬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내 귀에 그가 문설희와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적은 없었다. 마음이야 좀 아프긴 하겠지만… 그 애와 사귀면서 받을 상처가 더 아플 터였으니 되도록 빨리 헤어져 주길 바랐다. 이따가 그 애에게 들려 독촉이라도 해 볼까, 깊은 고민에 빠졌던 중이었다.

“음?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나 헤어졌어.”

“아, 그래…. 헤어졌, 헤어졌어…??”

대체 언제…?! 나는 경악을 담아 고찬영을 바라보았다. 고찬영은 그런 나를 보며 슬픈 듯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래. 나 차였어, 친구님. 그러니까 나 좀 위로해 줘~.”

힝, 하며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찬영을 보며 나는 잠시 말을 잃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헤어지기 싫다고 했던 문설희였다. 꽤나 실랑이를 벌일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그녀는 깔끔하게 약속대로 이별을 이행하였다.

‘…다행이긴 하다만.’

왜 이렇게 찝찝하지…? 문설희가 원래 이렇게 깔끔한 성격이었던가. 내 느낌으론 약간 찌질한 면모가 있다 보니 뒷맛이 구릴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그저 나의 착각이었던가.

“…차였다고? 찬영이가?”

“차였어?”

“고찬영을, 찼다고…?”

한참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반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반을 둘러보니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내는 반 아이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라. 나 이거 본 적 있어. 불과 어제도 목격한 것…, 같은데…?

“……고찬영 헤어졌대!!!!!! 솔로래!!!!!!”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 말은 순식간에 복도 너머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아니, 그보다 저 자식은 대체 무언가. 학기 초 때부터 유구하게 소문 좋아하던 남학생이 부리나케 소식을 쩌렁쩌렁 전달하며 사라지는 걸 보며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이 고찬영 솔로 복귀 사건은 주연희 왕따 사건과 최강혁과의 빅매치…가 될 뻔한 리매치 미수 사건에 이어 교내의 화제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 내 친구라 잊고 있었지만 이럴 때 보면, 고찬영이 학교의 아이돌 중 한 명임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나는 고찬영의 주위로 사실 확인을 위해 몰려든 여성들의 행렬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결국 튕겨 나가고 말았다.

“이나야, 괜찮아…?”

“어어….”

그런 내 곁으로 안경희가 쫑쫑쫑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고찬영의 말에 그리 크게 놀라지 않고 있는 듯한 안경희의 얼굴을 보곤 혹시나 싶어 물었다.

“경희야, 넌 알고 있었어?”

“어? 아, 응.”

역시나. 안경희는 아무렇지 않게 긍정했다. 그러자 이혜인이 깜짝 놀라며 안경희의 어깨를 붙잡았다.

“언제? 언제부터 알았어? 아, 아니, 대체 언제 헤어진 거야, 저 두 사람??”

아, 그러고 보니 이혜인은 아무것도 몰랐지. 내가 주연희의 사건 해결을 도와줬다는 사실에 언제 그런 일을 했냐며 놀라게 만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왠지 혼자만 따돌리는 양상이 되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엮여 봤자 곤란하기만 할 뿐이고… 또 위험했으니 말이다.

“으음. 그, 화, 화요일 저녁…이려나?”

“응?”

나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화요일?? 며칠 됐잖아! 고찬영, 저 녀석 우리한테 한마디도 안 하고-!!”

이혜인은 그 말에 얼굴을 확 찌푸리며 성질을 냈다. 아무래도 고찬영이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은 것에 꽤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였으나, 그보단 그가 헤어진 날짜가 어쩐지 석연찮았다.

‘화요일… 화요일이면….’

그날이 아니던가. 주연희의 왕따 가해자들 잡은 날이자, 고찬영이 어딘가 이상했던 밤.

“아, 그래서 그때 그랬구나.”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막 차이고 난 직후다 보니 그의 기분이 안 좋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감성적이게 젖어서 내게 그런 이상한 고백을 했나 보다.

‘보기와 달리 꽤 유약한 구석이 있네.’

하긴. 그렇게 좋아했는데 차이면 상처를 안 받을 수가 없지. 그래도 헤어져서 다행이긴 하다만… 어라. 근데 그 당일에 헤어지자고 말했다고…? 문설희가?

“으음??”

뭔가 굉장히 이상하게 꼬인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문설희를 잘못 본 건지,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큰 문제가 있었던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다가 이내 풀어지지 않는 답안이란 걸 깨닫고 미련 없이 털어 내기로 하였다.

뭐, 헤어졌으면 된 거지.

나는 그렇게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문득 내게 두 쌍의 시선이 몰렸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특히 이혜인의 시선이 아주 집요했다.

“뭐, 뭐야?”

“…요거 요거. 너 가만 보면 관심 없이 굴면서 아-주 주변에 관심이 많단 말이야~?”

“무, 무슨 소리야…?”

이혜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콕콕 찌르며 흘겨봤다. 그 말에 찔린 나는 슬쩍 그녀의 눈을 피해 모른 척을 하자, 이혜인은 콧소리를 내며 불신의 시선을 박차를 더했다.

“아주 혼자만 다 알고 있다, 이거지~? 응?”

“그,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내가 그렇게 한창 모르쇠를 일관하자 이혜인은 심통이 난 듯 입을 삐죽이다가 이번엔 그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경희 너도 그래. 가만 보면 둘이 어? 나 빼고 쑥덕거리고 말이야. 둘이 나 따돌리는 거지?”

“어, 어???”

안경희는 이혜인의 심술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게 남 일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 그런 거 아, 아닌데….”

“흥. 됐어. 둘이서만 놀고….”

말하다 보니 정말 속이 상했나 보다. 이혜인의 눈가가 조금 붉혀진 걸 확인한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위로하기 급급했다.

“혜인아, 정말 그런 거 아니야. 여기엔 다 사정이…. 그, 왜, 사람에겐 쉽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이란 것도 있고… 딱히 널 따돌릴 목적은 없었어….”

“그게 나만 모르고 너흰 다 아는 얘기인 거잖아.”

이혜인이 속상한 듯 고개를 숙이며 입을 삐죽였다. 내 눈도 마주 보려 하질 않아 나도 같이 울상이 될 지경이었다. 이거 어떻게 하지, 하고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리며 안경희를 보았으나, 그녀도 나와 별다를 바는 없었다.

‘어쩌지.’

‘어떡하지.’

시선이 맞부딪히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되는지 조급해지려 할 때, 돌연 안경희가 눈을 빛냈다.

“아, 맞아! 혜인이 너도 나랑 비밀 하나 있어!”

“어?”

“…음?”

비밀? 둘만의 비밀? …그게 무슨 소리야? 순간 바로 파악이 되질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혜인은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은 얼굴이었으나,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낯이 희게 질렸다가 곧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경희야! 그, 그건 안 돼!”

“어, 어…? 나 뭔진 얘기 안 했는데….”

“그, 그게 아니라…! 이나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거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안경희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이번엔 이혜인이 초조한 것처럼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둘이, 나한테 숨기는 거 있었어?”

“아냐! 진짜 별거 아니라서 그래!!”

“흐음….”

나는 이혜인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소외감이 확 들었다. 요즘 들어 내가 이리저리 쏘다니다 보니 두 사람이 자주 다니는 경우가 있긴 했으나, 설마 비밀 이야기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니. 그것도 나한테는 절대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아졌다. 이혜인이 이런 기분이었나 싶어 미안해지는 한편으론 역시 속상한 마음도 커서인지 표정이 쉬이 펴지질 않았다.

“이나야,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이라니까…?!”

“누가 뭐래.”

“진짜야~. 믿어 줘~.”

그런 내 표정을 보며 이혜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 팔에 매달리며 울상을 지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괜찮다며 얘기해 줬지만, 이혜인은 불안한 모양새를 쉽게 버리질 못해 몇 번이나 일러 줘야 할 정도였다. 어차피 나도 그녀에게 말 못 할 비밀이 많았으니 충분히 이해하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혜인보단 내가 더 많은 비밀을 품고 있기에 더 꽁해져 있기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러니 내가 속 좁게 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그렇다. 그렇다니까? 참나.

“진짜 괜찮으니까 그만하고 저기 찬영이나 구출….”

슬슬 이 쓸데없는 말씨름은 그만두고 헬프 요청을 잔뜩 보내오고 있는 고찬영을 구해 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반의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며 소문 좋아하는 그 남학생이 들어왔다.

“대박-!!!! 밖에 백장미 옴!!!!!”

“백장미?!”

“시발. 그 여신 백장미?!?!”

…백장미? 난데없는 인물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장미라면 분명 어제 도훈이가 말했던….’

한도훈이 내게 알려 줬던 설명은 이러했다.

‘백화 제단의 맏딸이고요. 지이인짜 여우예요. 자기가 원하는 건 아주 수단 방법 안 가리는 거 같다니까요? 이번 수법이 어쩐지 묘하게 기분 나쁜 게 이상해서 파 보니깐 아니나 다를까, 딱 나오던 거 있죠?’

그가 말하기론 백장미의 사주로 조폭이 연루되어 있는데, 그 조폭이 다크 웹을 이용해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그 자금의 물주가 백장미라고 했다. 또 그 조폭은 백장미의 목적을 위해 도박에 빠진 사람을 이용해 수족처럼 부려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바로 내 예상대로 최강혁이었다.

그녀는 최강혁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판단한 모든 걸 배제했다고 한다. 그것은 당사자 모르게 진행될 정도로 치밀하였고, 교묘하였다. 최강혁이 위화감을 느낀 건 순전히 그의 감이 뛰어나서일 확률이 높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왜 이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면서, 지금 그녀가 교문에 나타난 것인가.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반에는 남학생이나 여학생 할 것 없이 그 소문의 미인을 보기 위해 교문을 향해 달려간 지 오래였다. 그래도 고찬영의 팬들은 고찬영만 보이는지 백장미는 하등 관심 없다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새삼스럽게 감탄하고 있는데, 불쑥 이혜인이 곁에서 중얼거렸다.

“와, 백장미라니. 이 학교에 왜… 아, 설마 진짜 그 소문 사실인 건가?”

“소문?”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모양새에 저절로 흥미가 일었다.

“뭔데 그래?”

“아, 별건 아니고… 아니, 별건가? …별거구나.”

골똘히 스스로의 말에 고민하던 이혜인은 답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뭔데 저렇게 뜸을 들이나 답답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인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혜인은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여상히 대답해 줬기 때문이었다.

“왜, 백장미랑 최강혁이 사귄다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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