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71화 (171/306)

171. 장미의 유혹. (11)

“사귀어…? 최강혁, 걔가…?”

나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소문에 기가 막혀 버렸다. 정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개소문이라니. 그 자식이 현재 백장미랑, 아니 누구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이랑 사귀고 있다면 진짜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내가 겪은 바론 현재 최강혁은 타인에게 얽매여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은 데다가 연애를 하고 있는 흔적도 전혀 안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소문 도는 거 보면 진짜 흑막인 건 확실하네.’

인소 속 남자 주인공에게 엮여 있는 여자는 크게 두 분류다. 첫째는 무조건 여자 주인공이고, 둘째는 그 여자 주인공과 척을 지며 악역의 길을 가는 여자 캐릭터가 있었다. 특히 이 악역이 남자 주인공의 첫사랑이라든가, 그의 약혼자라든가, 짝사랑 중이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여성 악역과 남자 주인공과의 연애 스캔들은 거의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백장미가 그 악역이 틀림없을 터였다.

‘그런데 진짜 왜 온 거지? 최강혁을 보러 온 건가?’

하나 아직까지도 백장미가 우리 학교로 온 연유를 파악할 순 없었다. 악역이 누군지는 파악했으나, 그녀의 행보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나마 가장 유력한 후보가 최강혁 때문에 이 학교에 방문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오늘 최강혁 안 왔던 거 같은데.”

문제는 그 최강혁이 오늘 등교를 거부했던 탓이었다. 딱히 그의 스케줄을 적극적으로 알고 싶던 적은 없지만, 최강혁은 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를 보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널리고 널렸다. 게다가 수업을 잘 참석 안 하는 시너지와 맞물려서인지 그의 등교 소식은 늘 화제였다. 덕분에 난 최강혁이 상습 땡땡이범이라는 쓸데없는 것만 알게 되었다.

‘…이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오늘도 심심찮게 그의 소식이 들려왔던 걸 떠올리고 있자니 백장미의 행동이 더 이상하게만 다가왔다. 나보다 더 잘 알면 잘 알았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한도훈의 말로는 최강혁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는다고 하질 않았던가. 정말 소름 돋는 말이었지만,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었다. 스토킹은 다양한 매체에서 악역이 흔하게 사용하는 방법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용납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럼 역시 다른 목적이 있는 건가.’

혹시 주연희…? 설마 어제 최강혁과 드잡이질을 했던 게 보고가 됐었던 건가…? 그렇다면 진짜 무서운데. 나는 팔에 솟은 닭살을 슬슬 문질렀다.

어우, 역시 엮이기 싫어. 상종하기 싫은 꺼림칙함에 저절로 고개가 내저어졌다. 마침 수업도 끝났겠다. 아무래도 오늘은 정문 말고 후문을 통해서 하교를 해야 될 것만 같았다.

아, 그 전에.

나는 핸드폰을 열어 반휘혈에게 문자를 보냈다.

[휘혈아, 혹시 모르니까 문자 남기는데, 오늘은 집에 따로 가자.]

요 며칠간 같이 하교를 하질 않아 반휘혈은 염두도 안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이전까지 같이 하교를 했던 의리가 있질 않은가. 예의상 연락을 남겨 주며 핸드폰을 끄려고 하는데,

지잉-

보낸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왜]

지나치게 단조로운 한마디였다. 그렇지만 그의 의중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아무래도 내 염려대로 반휘혈은 나와 같이 갈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흠-. 그래도 아직은 누나라 이거지?’

요즘 들어 거리가 조금 벌어진 듯한 기분이었지만, 왠지 이 대답 하나로 마음이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히죽 웃으며 그에게 친절히 답신을 보내 주었다.

[오늘은 그냥 혼자 조용히 가고 싶네~]

반휘혈은 얼굴이랑 분위기가 기똥차게 잘난 놈이다 보니 시선이 안 모아질 수 없을 터였다. 마음만큼은 같이 가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은 피해야 될 것 같았다. 반휘혈과 가면 어딜 가든 이목이 집중될 테고 왠지 그와 같이 있다는 명목으로 백장미가 나라는 존재를 인식할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미연에 방지하는 게 낫지.’

그런데 칼같이 오던 반휘혈의 답장은 그 이후로 오질 않았다. 아무래도 더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인가 보다. 나는 그 무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종례를 위해 반에 들어온 선생님의 모습을 발견하곤 자리에 앉았다.

***

…그런데, 왜.

‘얘가 여기 있는 건데…?!’

나는 체육관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화려한 붉은 머리를 보곤 눈을 비볐다. 하지만 눈앞에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었지만, 결 좋게 굽이치는 풍성한 장발과 화려한 색은 누가 봐도 나 심상치 않은 인물이오. 하고 광고를 하고 있을 정도라 통성명을 하지도 않았는데 누군지 바로 알아볼 지경이었다.

왜, 왜 쟤가 여기 있어…?

이 근방에 무슨 볼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이 부근은 최강혁이 자주 다니는 길목도 아닌 데다가 주연희의 집과도 거리가 꽤 있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왜 저기 당당하게 서 있는 건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망연하게 그 자리에 서 있길 잠시,

“아.”

붉은 머리의 여성이 내 인기척을 눈치채곤 몸을 돌렸다.

“워….”

미쳤다.

그리고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하곤 멍하니 입을 헤 벌리며 감탄하고 말았다. 백장미는 그녀의 이름과 걸맞게 장미가 만개한 것처럼 화려하면서도 고혹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미인이었다. 그저 몸을 돌리는 단순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칼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안착하는 그 모습이 화보를 찍는 줄 알았다.

세상에, 정말 이런 미인이 다 있다니. 지금 이 순간 왜 학교 아이들, 특히 남자아이들이 그리 요란 법석을 치며 백장미를 보려고 앞다투어 나갔는지 십분 이해가 갈 정도였다.

“서이나 양, 맞으시죠?”

게다가 저 살며시 웃는 미소를 보아라. 아주 존재만으로 사람 홀리게 생겼다. 나도 모르게 넋을 보게 만드는 충격적인 미모다 보니 순간 그녀가 무엇을 말했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서이나 양?”

“예? 아, 네?”

정신을 차린 건 그녀가 재차 나를 불렀을 때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정확히 나를 바라보며 부르는 이름에 나는 반사적으로 답하다가 불현듯 기이함을 느꼈다.

“내 이름을 어떻게…?”

문득 내 등 뒤로 오싹함이 쫙 퍼졌다.

‘설마….’

왜 저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가. 아니, 아니다. 왜 그녀는 내 눈앞에서 마치 나를 기다린 것처럼 서 있는가.

설마, 목적이… 최강혁이 아니라, 나…?

“드디어 만났네요. 서이나 양. 만나서 반가워요. 전 백장미라고 해요.”

불길함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비켜나지 않고 들어맞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감에 내 입에선 저절로 침음을 내뱉었다. 한순간에 골이 아파졌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아 정신을 다잡은 후, 바로 본론을 물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죠.”

가타부타 않고 직구를 날리자 백장미의 눈이 잠시 커졌으나,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성격이 꽤 급한가 봐요. 우리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어디 들어가서 차분히 얘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미친…. 내 눈이 이상해진 건가. 그녀의 주위로 만개한 꽃들과 함께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멍청하게 있으면 안 된다! 저 꽃 같은 미모와는 상반되게도 행동은 음습하기 짝이 없질 않던가.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에요. 이나 양.”

…하는데, 왜 나는 카페에 있는 걸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깐 어느새 백장미와 마주 앉은 채였다.

이건 진짜 무슨 상황인가. 아니, 나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군말 없이 따라왔는가. 미쳤느냐, 서이나.

별별 미인들은 다 봐서 내성이 생긴 줄 알았건만, 그것은 남자에게만 국한된 사안이었나 보다. 주연희도 꽤나 미인이었지만, 그녀는 밝은 분위기와 미소로 뭇 남성들의 심장을 설레게 만들었다면, 백장미는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 홀리게 만드는 고혹적인 미인이었다. 성적 지향이 여자로 향해 본 적이 없던 나조차 괜히 이 상황이 긴장될 정도였다.

왠지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소개팅도 아니고 이게 뭔 짓인지. 바짝 마른침에 나는 주문한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흠, 흠. 저기… 진짜 무슨 일로 절 찾아온 건데요.”

그래도 저 미모에 속아선 안 된다. …솔직히 지금도 좀 알쏭달쏭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예쁜 여성분이 그런 악독한 짓을…? 정말 믿기 힘든 괴리였다.

“후후. 이나 양은 정말 성격이 급하시군요.”

백장미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아주 행동 하나하나가 기품이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이게 바로 있는 자의 여유인가…. 나로선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자태였다. 한번 그녀처럼 행동하는 상상을 해 보는 것과 동시에 저 멀리 치워 버렸다. 너무 안 어울려서 스스로도 토악질이 치밀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학교에 온 것도 저 때문이었나요?”

내 질문에 백장미가 단아한 미소를 말없이 지어 보였다. 그것은 긍정의 의미였다. 나는 그 자세에 얼굴을 스르륵 굳혔다. 백장미는 얼마간 나를 지켜보다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덧그린 채 말을 이어 갔다.

“피차간, 알 만한 건 다 알 테니 말을 돌리진 않을게요.”

그것은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알 만한 건 다 안다, 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 하나 그 말로써 이 아름다운 여성이 그 믿기지 않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건가. 좀 안타까웠다.

“저는 서이나 양. 당신께 제안드릴 게 있어 찾아왔답니다.”

그런 내 기분과는 별개로 백장미는 그녀가 말한 그대로 바로 본론을 꺼내 주었다.

“제안?”

난데없는 말이었다. 그녀가 내게 제안할 만한 일이 대체 무언가. 그것도 같은 학교인 최강혁을 보는 것도 제치고 나를 찾아올 정도의 중요 사안이 무엇일까. 의아함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저기, 우리 오늘 처음 본 사이 아니었던가요?”

나의 뭘 보고 갑자기 제안을 꺼내는가. 정말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백장미는 내 말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죠. 저희는 처음 본 사이이죠.”

하지만. 그녀가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렇다고 제가 당신을 알지 못할 방법은 없죠.”

“…….”

깊이 그려 내는 그 미소가 오싹했다. 동시에 내포된 의미에 내 머리가 싸늘히 식었다.

“후후,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역시 그 위명에 걸맞네요. 서이나 양. …아니.”

백장미는 말을 잠시 끊고는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눈을 휘어 보였다.

“조커… 양?”

172, 장미의 유혹. (12)

나는 그 말에 서늘히 얼굴을 굳어졌다.

‘이 녀석….’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이 느낌 어딘가 익숙하다. 분명 이런 식으로 조커라는 걸 들키는 건 고찬영이나 최강혁도 마찬가지였지만, 둘과는 달랐다. 두 사람은 짐승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리한 직감으로 때려 맞추는 것이라면, 이 기분은….

‘한도훈이랑 비슷한데.’

마치 모든 정황을 꿰뚫고 있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와 분위기. 이것이 한도훈과 흡사했다. 설마 악역은 여자 한도훈인가…. 그렇다면 꽤 골치 아파지겠는데.

‘뭐, 그래도 한번 떠보긴 해 볼까.’

나는 생각을 정리하곤 능청스럽게 모른 척을 해 보았다.

“왜 다들 그렇게 착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전 조커가 아닌데요. 사람 잘못 봤어요.”

정확한 물증도 없이 이러면 곤란하다, 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겨 냈다. 그러나 백장미는 별 타격도 없는지, 아니, 오히려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미소를 더 깊게 그렸다. 나는 그 순간 무언가 잘못됨을 직감했다.

“아버님이 전 아시아 챔피언이시던가요?”

그런데 백장미는 이 상황과 맞지 않는 말을 꺼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아빠 얘기를…. 긴장된 마음에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노려보았다. 백장미도 내 대꾸 따윈 기대도 안 했다는 것처럼 능청스레 말을 이어 갔다.

“프로 선수로서 프라이드도 높으시어 꽤나 외골수시던 거 같던데… 맞나요?”

끝맺음은 물음이었지만, 이미 그 안에서 답을 정하고 있는 말이었다. 여기서 틈을 내주어선 안 된다는 본능의 경고가 요란스럽게 울려 댔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별 고조 없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인지.”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본론이나 꺼내라는 압박을 싸늘하게 가했으나, 되레 백장미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상관있고말고요.”

툭, 백장미가 테이블 위로 작은 종이 하나를 올렸다. 그러곤 내 쪽으로 슥, 하고 밀더니 들춰 보란 듯 작게 손짓했다.

“…….”

불길하다. 이 종이를 뒤집으면 뭐가 나올지. 불안한 심장이 쿵쿵 뛰었으나, 내색은 하지 않도록 이를 꽉 깨물며 손을 들어 그 종이를 집고 차분히 넘겼다.

“……!”

그리고 나타난 정체에 나는 페이스를 잃고 한순간에 눈을 키웠다. 반사적으로 백장미를 보자 그녀는 내 모든 행동이 하나의 유흥인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걸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분의 따님이… 길거리 싸움에 연루된 걸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실는지.”

사진 속 정체는 내가 누군가를 무릎으로 가격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것도 꽤 선명하여 얼굴 하나 가리지 않은 상태로. 이걸 대체 어디서 얻은 거지? 당혹스러움에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고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협박인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목적이 무엇이 됐든 날 협박하고자 하는 의도는 확실히 전달됐다. 빠득 이가 세차게 갈리었다. 실로 분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꽤나 내 목덜미를 잘 겨냥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빠는 선수로서 자존심이 굉장히 높은 분이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길거리 싸움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큰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이목을 받는 것보다도 길거리에서 이름이 떠도는 것이 싫어 그랬던 게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것이 아빠에게도 들린다? 이것은 나를 키워 낸 아버지이자 스승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곧 나의 모욕이었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명예를 짓밟는 행위였다.

“뭘… 원하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냉정해져야만 했다. 여기서 그녀의 의도대로 흘러가면 안 되었다. 당장이라도 저 입을 닥치게 만들어 상황을 무마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감정에 휩쓸리는 것도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었다. 힘없는 일반인을 향해 주먹을 내뻗을 순 없었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면 대화로 해결해야만 했다. 나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테이블 아래서 주먹이 하얘지도록 강하게 말아 쥐었다.

“흐음.”

백장미는 초조한 나와는 상반되게 여유로운 자태로 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다시 찻잔을 놓았다.

“무엇일 것 같나요?”

“하….”

놀리는 게 명백한 그 말과 웃음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 사진은 대체 어디서 난 겁니까.”

분명 한도훈이 내가 조커로 보일 만한 물증들은 다 막아 줬을 터였다. 심증은 있을지언정 나를 보며 다들 대놓고 말하지도 못하고 쉬쉬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다 한도훈이 손을 써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대체 이 사진을 언제….

‘잠깐, 11월?’

문득 사진의 말단에 표기된 날짜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작년 11월에 찍었음을 알리는 표시였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뒤늦게 떠오른 기억에 이마를 짚었다.

‘아, 젠장. 그땐가…!!’

기억났다. 분명 그때, 이재현의 급한 SOS 콜로 위험에 빠진… 아니, 당연히 우리 애들이 이겼겠지만! 아무튼 위험에 빠졌던 한도훈과 김시원을 도와 패싸움에 합류했던 그날이었다. 확실히 그날은 급하게 뛰어가느라 아무 가림새 없이 싸웠던 게 기억났다.

하지만 석연찮은 부분은 있었다. 그 공터는 전등이 하나밖에 없어서 내 얼굴을 거의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찍혔다 한들 인식조차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였을 게 뻔했다.

‘그럼 이건 뭔데.’

눈앞에 있는 사진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나를 정확히 노려 찍었…,

“어?”

잠깐. 설마 이 자식….

“당신, 설마 내 뒤를 쫓았던 거야? 이때부터…?”

믿기지 않은 현실이었다. 당황스러움에 목소리까지 떨려 왔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가정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부인하고픈 사실에 경악을 담아 그녀를 보았으나, 그녀는 어떠한 부정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혁이가 왜 당신의 학교로 온지 아나요?”

“아니,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아까부터 자꾸 말을 돌리네? 사람 화병 나게 하고 싶나. 그렇다면 절반은 성공한 거다. 나는 난데없이 나온 그 이름이 황당해 지금 이성이 끊기기 직전이었으니 말이다. 여유가 없어지니 말도 자연스럽게 말이 짧아져 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느낄 새도 없이 백장미의 짙어진 미소에 다시 첨예하게 날을 세웠다.

“그야 당신 때문이니까요.”

……뭐? 그런데 돌아온 대답에 나는 황망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백장미는 아랑곳 않고 대답을 이어 갔다.

“혁이가 당신한테 흥미를 느꼈거든요.”

“뭐?”

“자신의 권태를 달래기 위한 장난감으로.”

“뭐…?”

뭐, 뭐. 같은 말만 하는 기계 같아진 기분이었으나, 정말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최강혁이 나 때문에 이 학교로 입학했다는데 누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내가 그 최강혁의 흥미 유발 버튼이란다. 뭐든 재미없다고 하는 놈이 말이다. …이거 진짜 실화인가?

‘아, 아니지, 아니야. 그보다 장난감은 대체 뭔데?! 너 최강혁 이 새끼, 그동안 날 그렇게 봐 온 거냐?!’

백장미의 도발이거나 과장된 화법일 수도 있었으나, 그간 최강혁이 날 볼 때마다 번번이 장난기가 가득했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지 마냥 틀린 말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렇다곤 해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자연스럽게 내 눈에 의심의 빛이 박차를 가했으나, 백장미는 그런 내게 쐐기를 박았다.

“아니면 반휘혈이나 그 변…, 한도훈이 있는 동네엔 눈길도 안 줬을 터였으니 말이죠.”

…그것도 그렇네. 그간 봐 온 경험으로 최강혁은 반휘혈과 한도훈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두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게 꽤나 앙숙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 그렇다 쳐. 근데 왜 나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건데? 다른 이유로 이 학교를 고른 걸 수도 있잖아.”

“당신, 보는 바와 같이 단순하네요.”

이 새끼가…. 순간 치미는 울화에 나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아까까진 참 예뻐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부턴 아니었다. 저렇게 느긋하게 웃는 낯짝이 이리도 재수 없을 수가. 저 가는 뼈대를 치면 부러질까? …부러지겠지. 안 부러지면 한 대만 치고 싶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묻죠.”

“어?”

한참 때리고 싶다는 충동과 격렬히 싸우고 있는데, 백장미가 당돌하게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 동네에, 반휘혈 그룹을 제외하고 여타 흥미로운 소식이 있던가요?”

“…….”

…………없지. 매우 없지. 정말 속이 쓰릴 정도로 맞는 말이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완벽히 이해해 버린 나는 머리를 싸매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속으로 절규했다.

‘젠장. 진짜 여자 한도훈 맞잖아…!!’

이 손바닥 위에서 농락당하는 감각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와, 적으로 마주하니깐 진짜 골 때리네.’

한도훈이 적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고 여긴 순간은 많았지만, 지금 이 순간 절실히 깨달았다. 정보로 노는 놈들을 마주 상대하면 그만큼 기분이 더럽다는걸! 특히 내가 머리 쓰는 게 젬병이다 보니 상대하기 더 까다로워 곤란했다.

‘입을 잘 놀려야 돼….’

여기서 절대 틈을 보여선 안 된다. 그동안 한도훈을 지켜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혹시라도 적으로 만날 시, 그들에게 빈틈을 공개해선 안 된다. 내가 가진 모든 걸 이미 들켰을지라도 낯짝만큼은 뻔뻔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들을 당혹시키기라도 할 수 있으니까! 진즉에 많은 빈틈을 허용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지금부터 내 낯짝은 철판이다, 철판!

겨우 고등학생 상대로 뭐 하는 건가 싶을 거다. 그러나 이곳은 보통의 세계가 아닌 인소 세계였다. 그 인소 세계 보정인지 몰라도 한도훈 같은 타입을 상대로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어리다고 인지하여 깔보는 그 순간부터 바로 끝이었다. 한도훈은 오히려 그럴수록 더 집요하게 정보를 파내어 사람을 나락으로 보내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똑똑한 놈들을 상대로 내가 머리 굴려 봤자 효과는 미미하겠지만, 어차피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그것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눈앞에 있는 존재가 나의 어디까지 조사했는가, 였다. 정확히는 이 세계 서이나의 인생을 말이다.

사실 나도 서이나의 인생을 잘 모른다. 기억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다른 세계에서의 내 기억인지 혼란스러울 뿐, 과거의 모든 순간순간이 내 기억 같았다. 유일한 구분법은 그 기억 속에 서이수의 유무…인데….

‘아, 젠장…. 하필 이럴 때.’

그간 잊고 있었던 울렁임이 잠시 시야를 흔들었다. 나는 잠깐 이를 꽉 깨물곤 눈을 지그시 꾹 감았다가 떴다. 다행히도 흔들리던 시야는 다시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나는 그에 안도하며 숨을 고른 후,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거랑 당신이 날 찾아온 이유가 뭔데.”

“말씀드렸잖아요? 제안이 있다고.”

“그러니까 그 제안이 뭐냐고.”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두드리며 위협을 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무너진 이성을 보이는 것은 정말 이런 타입에겐 먹이를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있는 인내심, 없는 인내심 박박 긁어 모으고 있던 중, 백장미가 그토록 원하던 답을 해 주었다.

“좋아요. 알려 드리죠.”

마치 선심 쓰는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이 참 사람 속을 긁어 대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백장미는 그런 내 언짢은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명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사람이 되세요.”

“아, 내 사…, ……응?”

그 태도가 띠꺼워 설렁설렁 대답하려던 나는 반사적으로 말을 뚝 멈췄다.

“방금, 뭐라고…?”

내가 느끼기에도 지금 현재 내 표정은 가히 멍청하리라. 이 자식,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당혹스러움이 여실히 묻어났다. 이미 철판 같은 낯을 유지하자는 맹세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백장미는 그런 나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여유롭게 대답을 되돌려 주었다.

“나의 사람이 되세요. 서이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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