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73화 (173/306)

174. 집들이. (1)

***

불쌍해, 이 내가…?

까득, 그녀의 잇새로 살벌한 음색이 울렸다. 카페에 덩그러니 남겨진 백장미는 서이나가 남기고 간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감히… 제깟 게…!”

쾅-! 세찬 두드림이 테이블에 울렸다. 하지만 백장미는 그래도 분이 풀리질 않는지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

그럴 때, 그녀의 핸드폰이 작은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백장미는 펴질 줄 모르는 얼굴로 그것을 꺼내 착신의 주인을 확인했다.

[김 비서]

그 순간 그녀의 미간이 펴지며 입가가 샐쭉 올라갔다. 마치 타이밍 좋게 희소식을 맞이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나야. 어떻게 됐어.”

백장미는 당연히 그녀의 비서가 자신에게 긍정적인 소식을 물고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의 비서는 유능했으며, 또 자신에게 충성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최근엔 그녀가 자신을 실망시키는 일이 있었으나, 그녀는 이번 일을 잘 성사시켰다는 그 보고 하나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호오. 니가 그 백장미인가 뭔기가.]

그런데 들려와야 할 김 비서의 목소리가 아닌 낯선 목소리가 건너에서 들려왔다. 백장미는 얼굴을 굳히며 전화 발신자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다시 보아도 비서의 전화번호가 맞았다.

그렇다면 이자는 누구인가. 백장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고 머지않아 그 인물의 정체를 특정해 냈다.

***

[…정태우.]

“오, 바로 알아맞히네?”

이름이 거론되자 정태우가 히죽 웃었다.

“모르는 게 이상한 거겠죠.”

그의 곁에 서 있던 김율이 무심하게 말했다. 정태우는 그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긴, 이리 쓰잘데기없는 짓거리를 했는데 재깍 알아차리지 몬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 더럽지 않겠나, 응?”

“…죄송합니다, 아가씨.”

김 비서는 눈을 질끈 감으며 침통히 중얼거렸다. 이 일은 자신의 선에서 끝냈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정태우의 흥미를 끌고자 사람을 고르고 골라 꽤나 전도유망하다던 격투가나 주먹 좀 쓴다는 싸움꾼 몇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결과는 전패.

노련한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태우는 잠시의 흥미만 비추더니, 곧 나타난 결과에 짙은 실망을 내보였다. 게다가 애매하게 몸이 풀린 것이 꽤나 못마땅했던지 정태우의 싸움의 열기는 곧 김 비서에게로 향해졌다. 김 비서는 그를 달래고자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며 회유하려 들었으나,

‘그딴 거 필요 없고, 니 보스한테나 연락 돌려 봐라.’

정태우는 단박에 그녀의 말을 자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흩트리며 그녀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김 비서는 바로 그 말을 이행할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 정태우가 이내 픽 웃더니,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니는 지금 이게 부탁하는 걸로 보이나.’

그 순간 섬찟한 살기가 그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가는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주위로 성한 곳 없이 널브러진 이들의 육신이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의 협조를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결국 생리적인 공포에 굴복해 버린 김 비서는 차마 자신의 주인이 눈앞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렇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용건이 뭐죠.]

백장미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차분한 음성으로 목적을 물었다. 정태우는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그 고조 없는 목소리에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흐음-. 생각보다 침착하네?”

[…….]

정태우의 말에도 백장미는 별다른 반응을 크게 보이질 않았다. 그는 그런 심심한 백장미의 반응에 어깨를 크게 으쓱이더니 김율을 보았다.

“어째 상상이랑 쪼매 다르다?”

“도련님께서 어떻게 상상했을진 모르지만, 세간의 평으론 그녀는 매사 차분한 여성입니다.”

“아, 그랬나? 난 또 엄청난 히스터리일 줄 알았다.”

“히스테릭입니다.”

“아무튼. 꽤나 성깔 있을 아가씨일 줄 알았는데 의외네?”

사실 정태우는 그녀에 대한 보고를 김율에게서 받은 적이 있었다. 백화 제단의 장녀. 백장미. 그녀는 명실공히 요조숙녀라는 평을 받고 있는 듯했으나, 정태우가 김율에게서 들은 바는 조금 달랐다.

바로 그녀가 자신과 척을 두는 지차용의 배후에 서 있는 인물이며, 그를 수족처럼 부리는 이라는 것. 또 그녀가 지차용을 심부름시킬 땐 거의 남자에 관한 것이었음을. 게다가 보고로 들은 그 수위가 보통 남다르던가.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태우에게 있어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한 성깔 하는 부잣집 아가씨로 굳혀 있었다.

“뭐, 됐다. 그기 중요한 기 아니지.”

백장미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신경 쓸 사안은 아니었다. 정태우는 왜 굳이 김 비서에게 그녀를 연결하라 지시했는가. 그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그 대단하신 백화 재단의 장녀님아. 내한테 볼일이 있으면 니 발로 직접 날 찾아온나. 이상.”

그저 자신을 향해 이래라저래라 꼴같잖은 짓거리를 하는 백장미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누구보고 오라 가라인가. 그녀가 수족처럼 부리는 건 지차용과 그 똘마니들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하나 그럼에도 김 비서를 관대히 용서하며 넘어가 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기회에 지차용 그 새끼의 덜미를 잡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슬슬 자신의 졸업도 다가왔다. 자신이 조직을 손에 거머쥐는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태우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김 비서를 지나치다가 무언가가 발에 치였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려갔다. 정체를 확인하니 그것은 어쭙잖은 실력을 가졌던 아무개였다. 정태우는 그것에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잊어 가던 그 형편없는 싸움의 기억이 다시 상기되어 버렸다.

“아. 그렇지. 야, 니.”

짜증이 났다. 감히 이런 놈들 때문에 낭비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정태우는 눈을 차갑게 내리깔며 김비서에게 경고했다.

“이 비리비리한 것들, 또 데려오면 그땐 진짜 뒤진다?”

정태우가 툭, 하고 발에 걸리는 한 놈을 건드리며 재차 강조했다. 이따위 놈들로는 차라리 안 싸우느니만 못하였다. 어정쩡하게 풀린 몸이 거슬렸던 그는 신경질을 유감없이 내보이며 그 몸을 가차 없이 걷어차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향한 것만같이 느껴졌던 김 비서는 안색을 창백히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율아.”

“네.”

두 사람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그 장소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김 비서는 굳어진 몸을 쉬이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니 겨우 안도감이 들던 찰나, 그녀를 향해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김 비서.]

“!”

안심할 새도 없이 들려오는 주인의 목소리에 김 비서의 몸이 움찔 떨려왔다. 백장미는 화를 잔뜩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명령했다.

[당장 내 앞으로 튀어와, 당장.]

뚝-.

말이 맺어짐과 동시에 통화가 끊겨 버렸다. 김 비서는 망연한 자태로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흐음….”

나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채 신음을 작게 내뱉었다.

‘역시 말이 너무 심했나.’

현재 나는 방금까지 있었던 백장미와의 조우 사건을 곰곰이 되짚으며 후회를 맛보는 중이었다. 역시 너무 감정적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괜히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것 같단 말이지….”

하필이면 불쌍하다가 뭐냐. 불쌍하다가. 그 악역이 앞으로 어떤 보복을 해 올지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기분 나쁜 걸 어떡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막말을 했을 거란 건 변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만큼 나는 극도로 멘탈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런 상태에선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 다짐을 해도 무색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마음을 정확히 통찰한 것 같은 말을 하는 상대를 향해 어떻게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었고, 그렇기에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백장미의 등장은 갑작스러웠고, 그녀의 제안 또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 상태에서 마음까지 들춰지니 정말 환장의 콜라보가 아닌가.

“으음-.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후회해 봤자 이미 물은 엎지른 뒤였다. 우선 이 만남을 한도훈에게 말해 두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백장미와의 정보전에서 믿음직한 조력자가 누군가. 바로 한도훈이 아니겠는가. 안경희도 정보 쪽으론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손 위에서 굴리는 기량은 차이가 있었다. 물론 안경희가 믿음직하지 않단 소리는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마음먹은 김에 전화해야겠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곧장 한도훈의 연락처를 찾았다.

[네~. 누나의 사랑스러운 귀염둥이 도훈이에요~.]

신호음이 가고 얼마 되지 않아 한도훈의 경쾌하고도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긴 했지만 익숙한 음성을 듣자 왠지 마음이 놓이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아까의 그 긴장감이 덜 풀렸었나,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아, 도훈아. 시간 돼?”

[그럼요. 없어도 누나를 위해선 당연 빼야죠~.]

…짜식. 재치 있고 흐뭇한 말에 나는 내 입가에 저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긴장으로 뭉친 어깨를 달래며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 별건 아니고 아까 내가 누구를 만났냐면….”

그리고 잠시 후,

[…….]

무거운 침묵이 핸드폰 건너에서 전해져 왔다. 많은 걸 내포된 듯한 그 정적에 나는 뺨을 긁적이며 괜히 딴짓을 하였다. 그러고 있길 잠시, 한도훈이 입을 열었다.

[그 사진, 언제 찍혔다고요?]

“어어. 11월쯤에…. 그 왜, 기말 끝나고 태산고 돼지 때려눕혔던 적 있잖아. 그때인 거 같던데?”

기억을 더듬으며 설명하자 한도훈의 짜증스러운 신음이 작게 들려왔다.

[아, 젠장. 하필이면 그때….]

무언가 짐작이 가는 말투였다. 내가 의아함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한도훈이 한숨을 푹 내쉬며 근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누나…. 그때는 제가 누나 정보 막을 생각이 없었던 때라… 태산고 돼지랑 싸웠을 때면… 그즈음이면 지망 고등학교 적어 낼 시기랑 겹쳤을 거예요. 백여우는 그 정보를 놓칠 리가 없었을 테고…. 하아…, 아무튼 그거 알고 난 후에 누나를 따로 조사한 것 같아요.]

…그때는? 그럼 그 이후에 뭔가 생각이 바뀐 계기가 있었던 건가? 문득 호기심이 일었지만, 기분이 확연히 저조해 보이는 한도훈이 걱정돼 잠시 이 의문은 저 멀리 치워 두기로 하였다.

“아냐, 사과할 필욘 없어. 괜찮아.”

그도 그럴 게 한도훈은 지금도 과분할 정도로 나를 많이 도와주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건 아마 원래 인연이 없었을 반휘혈이나 아이들에게 개입해서 생긴 일로 인한 나비 효과일지도 모른다. 설마 백장미가 여자 주인공이 아닌 나를 먼저 인식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한도훈에게 도움을 받았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백장미 일과는 별개로 그는 언제나 도움이 되었다. 오히려 한도훈이 없었다면, 아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그의 존재는 내게 꽤나 든든하게 다가왔고 말이다.

“아, 그런데 도훈아. 너는 왜 나를 도와주는 거야?”

[네?]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다 문득 한도훈은 왜 나를 도와주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것도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쏟아붓는 그 자세는 참으로 기이할 정도였다.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 얼굴을 보는 횟수가 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게 되었는데, 그중에 가장 돋보였던 건 한도훈은 자신의 관심 밖의 사람에겐 가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흥미를 끌어도 그것은 잠깐이었다. 그 흥미가 식으면 그는 또 가차 없이 그 사람을 무시한다. 참 이런 부분에선 한결같은 놈이었지만, 그의 차별 혜택자엔 반휘혈과 같이 나 또한 언제나 포함되어 있다는 게 참 신기하게 다가왔다.

[으음~, 그야… 누나니깐?]

“뭐야, 그게?”

그런데 그의 대답은 실로 단순했다. 나는 황당한 마음에 되묻자 한도훈은 여상히 대답을 해 왔다.

[하지만, 누나는 누나잖아요? 누나니까 특별해서? 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이라는 거네. 딱히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었다. 물론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주관적이긴 하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대답이었다. 얘는 영민하게 굴다가도 가끔 이렇게 지극히 단순한 대답을 내놓더라…. 더 물어봤자 거기서 거기인 대답만 나올 것 같은 기분에 결국 난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흘렸다.

“알았다, 알았어. 참 영광이네요. 한도훈 씨.”

[후후. 그럼요. 제 사랑을 받는 건 영광인 게 마땅하죠… . 아, 근데! 그보다 누나, 저한테 또 할 말 없어요?!]

“응?”

평소처럼 자화자찬 모드에 들어가려던 한도훈이 불쑥 소리치며 내게 물어 왔다. 나는 이게 난데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할 말은 이미 다 끝났는데…. 더 할 말이 남았던가?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지만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아니! 그, 왜, 그…! 가령 누구랑 얘기를 나눴다든가…?]

“방금 백장미랑 대화했다니까?”

[아, 그거 말고요!]

…얘 대체 왜 이래? 답답해 죽으려는 한도훈의 태도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나 더 할 말 없어. 나 슬슬 집에 다 왔거든? 너도 할 말… 없…으면….”

시큰둥하게 한도훈에게 말을 걸다 말고 어미가 점점 늘어졌다. 우뚝, 어느샌가 내 발걸음은 멈춰 버렸다. 아파트 현관에 다다르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아갈 생각을 못 하고 눈을 부릅뜬 채 서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야, 도훈아.”

[네?]

“왜 휘혈이가 우리 집 앞에 서 있냐….”

반휘혈이 당당히 우리 아파트 현관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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