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74화 (174/306)

175. 집들이. (2)

[…휘혈이, 누나 집 앞에 있어요?!]

“어? 어어.”

그런데 한도훈이 이상하리만치 들떠 보였다. 얼결에 대답하긴 했으나 미심쩍은 기분에 핸드폰을 노려보다 다시 반휘혈을 보았다.

“아.”

눈 마주쳤다. 내가 오는 기척을 느꼈던 걸까? 방금까지만 해도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입을 달싹였다.

누나.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기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는 입 모양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도훈아, 다음에 연락하자.”

[아, 네. 그럼요! 이따 꼭꼭 연락해 주셔야 돼요, 꼭~!!]

…얘 아까부터 왜 이러지? 나는 한껏 들뜬 한도훈의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나를 발견하곤 부쩍 다가온 반휘혈의 모습에 캐물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찝찝하기 그지없었으나, 어쩔 수 없이 통화를 끊고 나 또한 반휘혈에게 다가갔다.

“휘혈아,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집 앞에 있던 걸 보면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보니 무슨 연유일지 궁금했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연락하지 그랬어.”

연락을 줬다면 백장미고 뭐고 간에 곧장 집에 왔을 텐데. 오래 기다리게 했을까 싶어 괜스레 미안해져 난처히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안 기다렸어.”

그런 내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반휘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

“응.”

정말일까…. 왠지 의심이 들었지만, 반휘혈의 태도는 완강했다. 하는 수 없이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무슨 일로 왔냐고 재차 물으려는데,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반휘혈이 나보다 먼저 선수를 쳤다.

“누나야말로 좀 늦었네.”

“응? 아아. 누굴 좀 만나느라.”

“……누구?”

반휘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는 입을 꾹 다물더니 방금보다 살짝 가라앉은 기색으로 물었다.

“고찬영?”

“응?”

“그 녀석이랑 같이 있다 온 거야?”

나는 그 말에 바보같이 눈을 깜빡였다.

‘아니, 왜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오는 건데…?’

난데없는 말에 황당히 입을 벌렸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며 그 말을 부정했다.

“걔랑은 학교에서 헤어진 지 오랜데 무슨 소리야.”

게다가 난 오늘 그 녀석이 같이 놀자고 엉겨 붙었는데도 거절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운동하는 내내 고찬영의 원망 어린 우는 소리가 귀에 아른거릴 지경이었다. 음. 내일은 주말이니 한번 놀아 주는 게 좋으려나. 아무래도 막 연인과 헤어진 참이니 상심도 클 테니 말이다. 반휘혈과 헤어진 후에 연락을 넣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마주친 반휘혈의 낯이 또 달라져 있었다.

“…그래?”

왠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굳었던 낯이 확연히…라고 하기엔 원체 표정이 많이 없는 애다 보니 애매하지만 어찌 됐든 풀어져 있었다.

‘어라, 휘혈이가 찬영이를 별로 안 좋아했나?’

확실히 두 사람은 서로에게 대화를 하는 편이 아니긴 했다. 반휘혈이야 이상할 건 없었지만, 고찬영도 반휘혈에겐 어느 정도 선을 긋는 모양새였다. 아니, 그냥 서로에게 무관심하달까…. 나름 예전에 우연이긴 하나 같이 하교도 하고, 노래방도 같이 갔던 사이인데 말이다.

뭐, 그렇다고 딱히 불화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는 사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반휘혈이 보인 태도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설마, 이건 질투…?’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 지금 고찬영과 나의 사이를 질투하는 건가?

‘하하, 에이, 설마…….’

…라고 하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예전에 화이트 데이 때 고찬영의 계획 때문에 산 오해로 인해 화를 낸 점이라거나, 최근엔 자기 말고 주연희랑 하교를 하겠다고 할 때라든가…. 아무래도 반휘혈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낸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으이구. 역시 애라니까.’

하여간 귀여운 녀석 같으니. 나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우리 반휘혈 씨는 우리 집 앞까지 무슨 일이실까~? 혹시 내가 보고 싶었나? 응?”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반휘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난을 걸었다. 그러자 반휘혈이 눈을 좀 크게 뜨며 당황하는가 싶더니,

“…응.”

긍정의 답변을 내놓았다. 지나치게 진지한 그 대답에 나는 순간 자세를 삐끗하며 휘청였으나, 이내 다시 중심을 잡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흠흠. 그, 그렇구나.”

아오. 진짜 장난을 못 치겠네.

반휘혈의 화법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니까. 당황스러움에 볼이 조금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지만, 모른 척하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도 맞지만… 할 말이 있어서.”

우뚝, 멋쩍게 머리를 헝클이던 손이 멈춰졌다.

“할 말? 나한테?”

“응.”

대체 무슨 일인 걸까. 나는 반휘혈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도훈이가 이런 비슷한 말 하지 않았나?’

분명 한도훈이 반휘혈의 말을 거절했네, 뭐네 하면서 투정을 부렸던 것 같은데…. 설마 이게 그 얘기인 걸까?

‘어, 잠깐.’

그럼 아까 한도훈이 묘하게 들떠 있던 것도 혹시 이것 때문? 내가 거절했다고 여겼을 때 그렇게 성질을 부렸던 걸 보면, 이 사안은 한도훈에게도 중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방금 통화했을 때 꼭 다시 연락 달라고 했던 말도 어쩌면 반휘혈의 볼일이 그에게 있어서 꽤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을지도.

‘도대체 무슨 말이길래…?!’

한도훈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흥미를 유발시킬 만한 일이 무엇인가. 아직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긴장되었다. 그가 내게 있어서 듬직한 조력자임과 동시에 아끼는 동생인 것과는 별개로 귀찮은 성정을 가진 것까지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그런데 서두를 꺼내는 반휘혈의 온몸이 긴장한 듯 경직되어 있었다. 정말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렇게 긴장하는 건지. 보기 드문 그의 모습 때문일까, 나도 덩달아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반휘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나, 내일….”

“어머! 휘혈이 아니니?”

…내일? 내일 뭔데?! 한참 호기심이 고조될 즈음, 그런 나를 비웃을 모양인지 때맞춰 방해가 들어왔다. 그러나 이 익숙한 목소리…는 분명.

“엄마?”

우리 엄마인 이정화 여사님이었다.

엄마는 오랜만에 보는 반휘혈이 꽤 반가웠는지 얼굴을 환히 밝히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반휘혈은 그런 엄마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휘혈이 오랜만이다~. 한… 두 달 만인가?”

“네.”

“자주 놀러 오지 그랬어. 그래도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갑네~.”

반휘혈을 마주친 게 기분이 좋았던 모양인지 엄마가 얼굴을 상기시키며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곤 나와 반휘혈을 번갈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어머님. 그 수상쩍다는 눈빛을 거둬 주십시오. 그것도 흥미로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불길하게 다가왔다.

“그냥 얘기 좀 나누고 있었어.”

의심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부러 시큰둥하게 말했다. 엄마는 그런 내 반응이 실망스러웠는지 부쩍 아쉬운 얼굴로 삐죽였다.

“난 또 뭐라고. 그래도 이왕 온 거 휘혈이 저녁 먹고 갈래? 아줌마가 고기 맛있게 볶아 줄게.”

하지만 회복이 빠른 편인 엄마는 재차 얼굴에 미소를 덧그리며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게다가 이전에 내가 엄마에게 ‘휘혈이가 엄마가 해 준 불고기가 좋대.’ 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불고기 해 주려고 할 때마다 은근히 내게 ‘휘혈이는 언제 오니?’ 하고 물은 정도였다. …정말 해 먹이질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건….”

반면 엄마의 반응과 다르게 반휘혈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엄마, 얘도 일정 있을지 모르는데 그렇게 권유하면 부담스럽잖아.”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그를 돕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엄마는 내 말을 듣곤 그제야 아차 싶었던지 미안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아, 내가 너무 부담스럽게 했나 보네. 휘혈아, 오고 싶을 때 편하게 와도 돼. 아줌마는 괜찮으니까.”

“그래, 그래. 너 시간 되면 오고 싶을 때 놀러 와.”

내가 엄마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휘혈은 그런 우리를 물끄러미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래. 아, 둘이 얘기 중이었지? 내가 주책맞게 방해한 거 아닌가 몰라. 그럼 나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얘기하고 와. 휘혈이도 나중에 보자.”

“네.”

“어어. 먼저 들어가.”

엄마는 우리의 인사를 받으며 아파트 안으로 사라졌다. 어쩐지 기분이 멋쩍어졌다. 엄마를 만나서인지 아까까지 느꼈던 긴장감이 확 풀리고 말았다.

“아, 그래서 내일 뭐라고 했지? 혹시 같이 놀자는 거야?”

비록 흐름이 끊기긴 했으나, 이야기는 마무리 지어야 되지 않겠는가. 방금 ‘내일’이라는 단어를 들었던 걸 보면, 만나서 같이 놀자. 뭐, 이런 말 아닐까 싶었다. 내일이 주말이니만큼 가장 확률도 높고 말이다.

“…응.”

역시나 반휘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이 들어맞으니 잔재했던 긴장감이 싹 풀려 버렸다.

‘정말이지, 도훈이 그녀석도 유난이라니까.’

겨우 노는 거 하나 가지고 이러다니. 어쩌면 둘이 약속을 해 놓고 나와 같이 놀려고 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마 어제도 그 기대감으로 실망도 크게 나타난 걸지도. 조금 의외인 점이 있다면 평소 이런 제안은 한도훈 스스로가 하는 편일 텐데, 반휘혈이 해 온 것 정도일까.

“좋아. 그럼 어디서 볼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니 반휘혈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 말 하려고 나를 기다렸다니. 차라리 전화나 문자를 보내도 됐을 텐데. 그의 순진한 반응이 귀여웠던 나는 픽 웃음을 흘렸다.

‘아, 그럼 이 기회에 찬영이도 부를까?’

어차피 외로운 고찬영을 달래기 위해 놀 생각이었으니 이번에도 같이 놀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 노래방 재밌었으니까, 혜인이랑 경희도 불러서… 아니, 다른 애들도 부르는 게 좋으려나? 다 같이 놀면 재밌겠는데.’

“아, 나도 다른 애들 불러도 되지? 도훈이랑 같이 세 명이랑 노는 것도 재밌기야 하겠다만… 최근에 찬영이가 여친이랑 헤어졌거든. 그래서….”

생각난 김에 의견을 꺼내 보았다. 물론 다들 시간이 돼야 한다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다 모이면 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될 것 같았…. 어, 잠깐. 정정한다. 상상만으로 기가 빨리는 기분에 다시 인원 감축을 고려하기로 했다.

“…뭐?”

그런데 돌연 황당해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반응은 잠겨 있던 나를 급부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어?”

이, 이게 아닌가? 당황스러움에 눈동자가 다 떨렸다. 하지만 마주친 반휘혈의 낯은 기분 나쁜 걸 들은 것처럼 굳어 있었다.

‘뭐지. 내가 뭐 실수했나…?’

하지만 방금 같이 놀자고…. 다 같이 놀기 싫었나? 그런데 너도 도훈이랑 같이… 가는… 거…….

‘어, 잠깐만.’

불현듯 잊고 있던 한도훈의 기행이 떠올랐다. 틈만 나면, 나와 반휘혈을 엮어 주려 못해 안달이 났던 그의 행적이 말이다. 게다가 방금 전 통화 내용을 떠올려 보건대 그는 관계자가 아닌 방관자처럼 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설마 한도훈이랑 같이 셋이서 놀자고 하는 건 내 착각?

‘나랑… 단, 둘이…? 하지만, 그건….’

불현듯 눈앞에 주연희의 잔상이 지나간 듯한 감각이 들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그건 아니지. 나는 단둘이 놀고 싶어 하는 그를 달래 보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휘혈아, 그건….”

“…전에 약속했던 거.”

“어?”

그러나 반휘혈의 난데없는 말에 다 내뱉지도 못하고 잘렸다. 전에 약속했던 거? 그게 있었나? 떠오르는 의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반휘혈이 숨을 한번 크게 내쉬더니 곧 자세를 다잡고 말했다.

“우리 집에 와. 누나, 혼자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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