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75화 (175/306)

176. 집들이. (3)

혼자서만, 혼자서만, 혼자서만….

뇌가 정지하고 혼자 우주 속을 떠도는 것만 같았다.

‘어라,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하하. 아무래도 귀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다. 내일 아침 일찍 이비인후과부터 찾아가야….

“못 들은 척하지 말고.”

……미치겠네. 내 생각을 기가 막히게 읽어 버린 반휘혈의 예리한 간섭에 나는 반사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덕분에 현실 도피는 피했다만 당면한 현실이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저기, 휘혈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놀러 온다며.”

“어?”

“놀러 온다고, 약속했잖아.”

“……내가?”

내가 그랬다고? 내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런데 반휘혈도 그런 내 말에 단단히 속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얼굴을 구기며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먼저 초대해 달라고 한 건 누나였잖아.”

“뭣.”

내가 그런 미친 소리를? 대체 언……,

‘휘혈아. 나, 너한테 또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너희 집, 집들이해도 돼?’

…제 했구나. 했네, 했어. 예에전에 애들이랑 같이 노래방 간 날 분명 반휘혈 화 풀어 준답시고 그따위 말을 했던 기억이 막 돌아왔다. 왠지 눈앞이 아찔해지는 감각에 질끈 눈이 감겼다.

‘아악-!! 서이나, 이 미친놈아!!’

너부터 말조심해, 이 자식아!! 반휘혈에게 말을 가려서 하라는 군번이 되질 못한다는 스스로의 현실을 파악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나도 설마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몰랐지. 그때는 주연희와 진척이 전혀 나가질 않았던 상황이기도 했고, 또 반휘혈의 플러팅인지 아닌지 모를 발언들에 나까지 전염이라도 됐었는지 아주 뚫린 입이라고 별말을 다 했었다.

“…그래, 했네. 내가 말했구나…. 그렇게….”

하지만 제 무덤을 제가 판 현실은 뒤바뀌질 않았다. 면목이 없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머리 위에서 반휘혈이 새침하게 코웃음을 치는 소리까지 들리니 땅까지 파고 싶어졌다.

“그래서, 올 거야?”

당연히 오겠지? 라는 강압적인 뒷말이 덧붙여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나는 눈을 흐리며 잠시 딴청을 부리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이, 이수랑 같이 가는 건?”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대로 혼자 갔다가 나중에 주연희와 반휘혈이 이어지면? 내 의지와는 별개로 타인이 보기엔 이상한 삼각관계로 비추어질지 모른다. 뭐, 아직 사귄다고 공표는 안 했지만… 반휘혈이 주연희에게 관심을 내비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그럼 이미 거의 끝난 얘기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싫어.”

그런데 반휘혈은 내 마지막 희망마저 아주 손쉽게 부숴 버렸다.

“그래도 너랑 이수가 같은 천장 아래서 몇 번 뒹굴어 잔 적도….”

“싫다고.”

아, 그래. 싫구나. 엄청 싫구나. 반휘혈이 낯을 어둡게 굳히며 정색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서이수, 너 그동안 뭐 했어. 일짱이랑 친해지고 싶다고 한 놈 어디 갔어! 내가 친히 판까지 깔아 준 적이 몇 번인가. 그동안 반휘혈의 호감을 제대로 사지 못한 서이수를 향한 원망마저 들 지경이었다.

“쓰읍….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아오. 내 입으로 직접 한 약속이라 무르기도 힘들다. 결국 두 손 들고 항복을 외치며 체념한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문자로… 주소 찍어서 보내 줘.”

반휘혈은 내 말에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내렸다. 승낙을 얻긴 했는데 이걸 좋아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복잡한 듯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떨떠름하게 대답했나 싶어졌지만,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이대로 계속 거절했다간 서로 감정만 상할 것 같았… 아니, 지금 충분히 상했나? 그의 얼굴이 좀체 펴지질 못하는 걸 보면 맞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간 집들이고 뭐고, 그냥 한동안 무시당하는 거 아냐?’

전적이 있다 보니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렸다. 그에 나는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수습을 위해 입을 열었다.

“어흠흠! 그, 그러고 보니 저번에 형이랑 오피스텔에 산다고 했지? 생각해 보니 나 고급 오피스텔 가는 거 처음이니까 좀 기대된다. …어, 잠깐. 그러고 보니.”

나… 집들이 자체가 처음인가? 어? 진짜 그러네? 말하고 보니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집들이를 하는 것이 처음임을 깨달았다. 불현듯 찾아온 그 깨달음에 잠시 멍해지자, 반휘혈이 그런 내 반응이 이상했는지 나를 불렀다.

“뭔데.”

“응?”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냐고.”

반휘혈은 아직 감정 상한 게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저조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내 걱정은 또 된 모양인지, 뒷말을 묻는 걸 보면 완전히 삐진 건 또 아니었나 보다. 나는 그 갭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으며 별거 아니란 식으로 말했다.

“아, 그냥 나 누구 집들이하는 거 처음이구나 싶어서.”

“……처음.”

“어. 처음이라 뭘 해야 될지 모르겠네. 혹시 필요한 거 있어? 사 들고 가게.”

보통 집들이하면 그거겠지. 집들이 선물. 부족한 거 없는 집이긴 하겠다만 빈손으로 가기엔 좀 그렇지 않은가. 되도록 필요한 걸 사 주고픈 마음에 반휘혈을 다시 보자, 어쩐지 그의 낯이 좀 멍해 보였다.

“휘혈아?”

“아.”

내 부름에 정신을 차렸는지 반휘혈이 탄성과 함께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곤 손을 들어 올려 잠시 입매를 쓰는가 싶더니, 슥 하고 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딱히… 그냥 와도 돼.”

“에이, 그래도.”

음. 정 필요가 없다면 역시 두루마리 화장지라도 들고 갈까. 그게 정석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설마 쓰는 브랜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있으면 어떡하지. 급 불안해졌다. 역시 의견을 다시 물어봐야겠단 생각에 입을 열던 찰나였다.

“누나면, 충분해.”

불쑥 들려온 그의 속삭임에 나는 하려던 말도 잊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반휘혈은 그런 나를 잠깐 힐긋 보곤 혀를 차는가 싶더니,

“아무튼, 내일 봐.”

고개를 팩 돌리며 등을 돌려 버렸다.

“어? 어어. 어, 그, 그래.”

갑작스러운 그의 작별 인사에 반사적으로 답했다. 얼떨떨한 마음에 손을 흔들기를 잠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반휘혈은 내 앞에서 빠르게 사라진 뒤였다.

‘방금, 뭐였지….’

왠지 뒤통수를 한 대 거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내가 뭘 들었는지 모르겠다.

‘저게… 저게 그 좋다는 의미가 아니, 아닐 텐데….’

분명, 그럴진대… 왜 한순간 나는 또 착각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잠시 동안 속에서 솟구치는 복잡한 감정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아, 이나야. 이제 들어왔니?”

“응. 다녀왔어.”

집에 들어서자 엄마의 인사가 마중해 줬다. 나는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멍한 기운에 머리를 긁적이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엄마는 빨래를 개고 있던 모양인지 주변에 빨래 더미가 가득이었다.

“휘혈이는 돌아갔어?”

“어어.”

엄마는 오자마자 반휘혈의 행방을 물었다. 나는 그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엄마를 돌아봤다.

“아, 엄마. 혹시 집들이 선물 뭐가 좋을까?”

“집들이? 너 집들이 가니? 웬일이야?”

“으응. 그렇게 됐네.”

내가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간다는 게 꽤나 의외였던 모양인지 엄마가 놀란 기색으로 나를 보았다. 하긴 지금 생각해 보면 다른 세계에서도, 지금도 학교-체육관-집 이런 루틴으로만 산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엄마일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집순이에 속하는 편이었고, 나도 운동만 아니었으면 엄마와 같은 집순이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만큼 집이 편한 걸 어떡한가. 쉴 수 있을 땐 집에서 그냥 편히 쉬고 싶었다.

“흐음. 혜인이네도 놀러 간 적 없었지?”

“어. 혜인이는 왠지 집에 놀러 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이혜인을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은 있지만, 나는 그녀의 집에 가 본 적은 없었다. 한번은 우리 집에 왔을 때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도 가도 되는가 떠본 적 있었으나, 이혜인의 난처한 기색에 고이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손님을 쉽게 초청할 수 없는 집안이었던 모양이라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뭐, 상관없지만. 다들 각자만의 사정이 있지 않던가. 나는 손을 씻고 난 후, 엄마의 곁에 앉았다.

“그래? 아쉽겠네.”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래. 이나 네가 그렇다면야.”

엄마의 안색이 얼핏 안 좋아졌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저러는 걸까.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산 기분이라 나는 픽 웃으며 흐트러진 빨래를 하나 주웠다.

“뭔 걱정을 그리 하시나요, 여사님.”

“…걱정은 무슨. 네가 나 걱정시킬 일이 뭐가 있다고.”

“아닌데? 엄청 아닌데? 나 완전 불쌍히 봤는데? 내 교우 관계가 그렇게 걱정이 됐나?”

킥킥거리며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엄마는 입을 삐죽이는가 싶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나야, 나는 가끔 네가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돼.”

“…응?”

“넌 매번 나한테 괜찮다곤 하지만… 너도 아직 학생이잖니? 너무 무리하진 마.”

“…….”

나는 들고 있던 빨래를 잠시 놓았다. 고개를 들어 엄마의 얼굴을 보자 엄마는 진지하게 걱정의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나도 힘들면 힘들다고 하니까.”

물론 그걸 엄마 앞에서 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할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사실 다른 세계에서부터 이어지는 이 마음의 부채가 해결되기 전까진… 평생 엄마의 앞에선 투정 같은,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아마…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

“그러면 다행이지만.”

“에이, 걱정도 팔자다! 혹시 배고파서 그래? 오늘은 내가 저녁 차릴까?”

나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엄마는 그런 내 말에 잠시 쓰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맡겨 볼까?”

“맡겨만 주십쇼! 어머니!”

나는 가슴을 통통 두드리며 힘차게 대답했다. 이전 생에선 운동만 하다 보니 막 은퇴를 하고 나선 정말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되었다. 물론 엄마처럼 잘하는 건 아니긴 해도 음식을 태워 먹지 않고 어느 정도 간을 할 줄 알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 아닌가. 나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며 뿌듯이 빨래 하나를 대충 주워 들었다.

“……어.”

그러다 나는 집은 물건을 확인하고 몸을 굳혔다.

“응? 왜 그래? 이수 글러브에 무슨 문제 있어?”

내 작은 탄성을 들었는지 엄마가 의아하게 물어 왔다. 그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차려졌다. 눈을 몇 번 깜빡이길 잠시,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냥. 왠지 많이 헐었구나 싶어서.”

“그렇지. 그것도 꽤 오래 사용했지? 후후.”

“…그러게.”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서이수의 글러브는 사람의 손때가 오래도록 묻은 티가 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잠시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나야, 너도 아빠한테 하나 달라고 하지 그래?”

“응?”

“아니, 너도 체육관 다닌 지 꽤 됐잖니. 체육관 공용 글러브를 계속 쓰는 것보단 네 거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겠어?”

나는 그 말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엄마의 말대로 내가 쓰고 있는 글러브는 체육관에 배치된 공용 글러브였다. 그중에 당연하게도 내 것은 없었다.

“…아니.”

그리고 그것은,

“괜찮아.”

앞으로도… 필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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