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집들이. (4)
***
결국 이날이 왔나….
“…….”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눈앞에 존재를 과시하는 고급 오피스텔을 바라보았다. 나는 손 한쪽엔 두루마리 휴지. 다른 한쪽엔 반찬 통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서 그 건물 앞에서 비장하게 서 있었다.
‘정말 평생 인연이 없을 것 같은 곳이었는데….’
다른 세계에선 당연한 일이었고, 이 세계에서도 기대치 않던 일이었다. 누가 예상이라도 했을까. 평범하디평범한 서민인 내가 재벌 일짱의 집, 그것도 그 유명한 ‘반휘혈’의 집에 초대되는 것을. 불과 1년 전 그를 막 만났을 때만 해도 가히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었다.
“인연이란 게 참… 얄궂다, 얄궂어.”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삶이 이렇게 격변을 맞아도 되는 건지 참 의문이다. 인생은 참 알 수 없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비록 아침부터 동생 놈에게 반휘혈의 집에 혼자 간다는 것을 들켜 잠깐 동안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있었고, 그 잔소리를 벗어나고자 나와서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하긴 했지만… 괜찮겠지? 그냥 시간 맞춰 올라갈까 고민하다가 이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게 수상해 보일 것 같아 그냥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야…. 현관부터 화려하구만~.”
그리고 난 들어서자마자 감탄부터 내뱉었다. 차종에는 까막눈인 나조차도 보이는 차량들이 비싼 외제 차들이란 건 느낌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저거 흠집 하나 나면 몇 억을 물어 줘야 하는 걸까. 괜히 두려운 마음에 이미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어, 왜 이렇게 떨리지…?’
나 혹시… 긴장했니? 건물이 주는 압도감에 나는 연신 침을 삼켜 댔다. 겨우 호출을 누를 만한 곳에 섰으나, 입주민의 출입만을 위한 카드 키를 인식할 것 같은 곳과 초인종을 누르는 벨밖에 보이질 않았다. 당황스러움에 굳어 있길 잠시, 나는 조심스레 벨을 눌러 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그러자 건너편에서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무뚝뚝하고도 낯선 목소리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기, 어…. 여기 55층에 사는 집에 볼일이 이, 있는데요….”
역시 고급 오피스텔이라 그런가 층수도 남달랐다. 나는 말하면서도 연신 이게 맞나 싶어졌다. 반휘혈이 보내 준 주소는 혹시라도 틀리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확인했음에도 다르게 말했을까 다시 핸드폰을 들어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알려 준 주소대로 잘 말한 것 같았다.
[…55층이요?]
“네….”
무뚝뚝하던 목소리가 살짝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웬 평범한 여자애가 건물주의 집을 부르니 이상해 보일 만도 하겠지. 나는 쓰게 웃으며 눈을 데록 굴리고 있는데, 건너의 목소리가 신중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어, 서이나라고 합니다.”
긴장을 하고 대기하고 있어선지 즉각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런 자신의 태도가 왠지 민망해져 뒤늦게 볼이 달아올라 화끈해지는 것 같았다. 짐을 한 손에 모두 옮겨 잡고 손부채질을 하며 식히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확인했습니다.]
사무적이었던 아까완 다르게 확연히 상냥해진 목소리였다. 또 그와 동시에 문도 스르륵 열렸다.
‘…미리 말해 뒀나 보네.’
다행이었다. 혹시 실랑이를 벌일까 걱정했던 게 좋은 의미로 무색해졌다. 반휘혈의 형이 건물주인 덕분에 이런 기회도 누려 보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
“…….”
호수를 말하지 않고 층만 말해서 예상은 했다만.
‘진짜 한 층… 전체가 집이었구나.’
나 여기 진짜 들어가도 될까? 집을 잘못 찾아온 기분이다. …아니, 반휘혈이라면 으레 이런 집에 살 것 같긴 하다만. 한도훈의 집도 꽤 으리으리했지만 그건 녀석과 같이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별 부담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내 발로 부자가 살 법한 집에 직접 오니 꽤나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초인종이 울리고 얼마 안 가 연결이 된 듯한 전자음이 짧게 울렸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시, 실례합니다아-.”
…너무 긴장한 티를 냈나? 하지만 이런 곳은 처음인 걸 어떡한가. 혹시라도 반휘혈의 형이 받았을까 싶어서 몸이 더 빳빳하게 굳어졌다. 첫인사는 어떻게 하지? 처음 뵙겠습니다, 휘혈이 아는 누나… 아니, 지인이라고 소개하는 게 나을까? 친한 지인? 친한 누나? 뭐, 뭐가 좋지? 왠지 눈이 팽글팽글 도는 기분이었다. 무슨 거창한 자리도 아니고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 달리 내 몸은 내 통제를 벗어나 발을 초조하게 굴리고 있었다.
[…잠시만.]
“아, 엇.”
…방금 그거, 반휘혈인가? 그렇지? 기계음에 섞여 제대로 분간이 힘들었지만, 느낌이 반휘혈이었다. 반휘혈이 문을 열어 줄 거란 생각이 들자, 갑자기 긴장이 싹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심신의 안도가 찾아온 나는 숨을 내쉬며 그를 기다렸다. 곧 단조로운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리었다.
그런데,
“아, 휘혈아, 안…….”
웬…
“일찍 왔네.”
신화에 나올 법한 반나체의 조각 미남이… 내 눈앞에 있는 걸까.
그것도 물기를 한껏 머금고서.
***
“짜잔~!! 친구님, 나 왔어~!!”
체육관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껏 텐션이 올라 있는 인사가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그 깜짝 손님의 정체는 고찬영이었다. 고찬영은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으나,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친구님?”
왜 안 보이지? 주말엔 보통 이 시간쯤에 체육관을 찾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고찬영은 그녀의 부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좀 늦게 오려나? 아니면 일찍 다녀갔나? 일부러 서프라이즈를 한 보람이 없어 그는 불만스레 입을 삐죽였다.
“오늘 누나 없어.”
그때 고찬영의 곁으로 다가온 한 인물이 있었다. 고찬영은 그를 발견하곤 재차 활짝 웃어 보였다.
“동생! 그동안 잘 지냈…, 음? 표정이 왜 그래?”
그러나 곧 고찬영은 아침…이 아니라 대낮부터 똥 씹은 얼굴인 서이수의 낯을 보곤 미소를 지우며 의아한 빛을 띠었다.
“아, 형. 그게요….”
“오, 우리 범생이도 있었네?”
“어, 네. 안녕하세요.”
이재현이 그에게 다가오자 고찬영은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재현도 그 환대에 말하다 말고 얼결에 저 또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리고 고찬영은 힐끗 어느 한쪽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저 싸가지는 아침부터 뭘 잘못 먹었나? 왜 저리 실실 웃고 있는 거야?”
“…….”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한도훈이 있는 곳이었다. 한도훈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주체 못 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좋아 죽고 있었다. 고찬영은 그런 그의 모습에 질색하며 으, 하고 몸서리를 쳤다.
“보고 싶던 친구님은 없고, 오자마자 쟤가 저렇게 소름 끼치게 웃는 걸 봐야 하다니…, 싫다, 싫어.”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던 고찬영은 이내 다시 활짝 웃으며 서이수에게 물었다.
“그래서 친구님은 언제 와? 아, 차라리 지금 불러 볼까?”
서프라이즈를 한답시고 연락을 안 한 제 잘못도 있기에 그는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서이수가 심술 맞게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안 와.”
“응?”
짜증 어린 그 목소리에 고찬영이 고개를 들어 서이수를 보았다. 서이수는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풀지 못한 채 머리를 세차게 헝클어트렸다.
“누나, 반휘혈 집에 놀러 가서 안 온다고.”
“…으으음????”
고찬영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라졌다. 그는 생각도 못 한 소식을 들은 것처럼 눈을 깜빡이다 되물었다.
“친구님이 반휘혈 집에… 혼자서?”
반휘혈 그룹에 속해 있는 세 사람이 여기에 다 있는 걸 보면 그럴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하지만 어쩐지 쉬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아는 친구님은 꽤나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몰라! 나도 간다니까 반휘혈이 싫다고 해서 안 된대!”
서이수는 아침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나도 갈 거야!’
‘휘혈이가 싫다더라. 우리 다음 기회에 가자….’
‘누나, 미쳤어?! 거길 왜 혼자 가! 아무리 걔가 동생 같아도 그렇지, 이건 아니잖아!!’
‘괜찮아. 나도 걔도 서로 그럴 건덕지가 없으니까.’
‘이익…!! 그 소리가 아니잖아!!!’
아오! 다시 생각해도 열이 뻗쳤다. 결국 서이나는 서이수의 말을 전부 무시하고 그대로 가 버렸다. 게다가 엄마도 누나의 편이었던 모양인지 반휘혈에게 전해 달라며 불고기가 담긴 반찬 통까지 싸 주었다.
“정말이지, 그런 놈이 뭐가 예쁘다고…!”
“음? 동생은 반휘혈 그 녀석 좋게 보지 않았었나?”
“아니거든!”
성질이 바짝 오른 서이수를 물끄러미 보던 고찬영이 이상하단 듯 지적했다. 그러자 서이수가 얼굴을 확 찌푸리며 대번에 부정했다. 이제 그따위 자식 동경하나 봐라! 감히 자신의 누나를 가지고 놀다니,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흐으음.”
고찬영은 그런 서이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양새에 이재현이 고개를 의문스레 기울였다.
“왜 그러세요?”
“음? 아냐, 아냐. 벌거 아니니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보다는 말이지. 고찬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느긋이 입을 열었다.
“친구님은 역시 반휘혈, 그 녀석한테 꽤 약한 것 같단 말이지~?”
“그렇죠.”
“그치?”
끄덕, 고찬영과 이재현이 서로 마주 보며 동시에 고개를 움직였다.
“진짜 그런 녀석 뭐가 예쁘다고!!”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서이수의 심기가 더 불편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발을 굴리더니 자신의 성질을 못 이기고 결국 사무실로 휙 들어가 버렸다.
“어, 들어갔네.”
“…이수가 요즘 휘혈이 일로 화가 많이 났거든요.”
“그건 그럴 만도 하지.”
사실 고찬영도 짐작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서이수의 화를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최근 들어 반휘혈이 오해되는 행동은 자주 하지 않았던가. 저 또한 반휘혈이 서이나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요즘 그의 근황은 불쾌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고찬영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그는 얼마 안 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러곤 눈앞에 있는 이재현에게 하나의 질문을 건넸다.
“재현아, 너는 이수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같으면 어떻게 할래?”
“네?”
난데없는 물음에 이재현은 당황했다. 그러나 고찬영의 시선은 한없이 진지했기에 이재현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야… 응원하겠죠?”
“길이 좀 험난해 보여도?”
대답하니 더 난해한 질문이 잇따랐다. 이재현은 이게 무슨 문답인가 싶었으나, 성실한 그는 이미 대답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이수가 정말 좋아한다면 열심히 응원해 줘야죠.”
“친구니까?”
“네. 친구니까요.”
“흐으음.”
역시 그런가~. 고찬영이 혼잣말하듯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근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이재현은 그런 고찬영이 의아해 묻자, 고찬영은 시선을 내려 이재현을 보았다. 그러곤 싱긋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후후. 비. 밀.”
별이 튀는 듯한 그 상큼한 미소에 이재현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누나는, 왜 이런 사람만 꼬이는 걸까?’
어쩐지… 비밀이 많아 보이는 고찬영의 모습을 보며 이재현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