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집들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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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혹스럽다. 심히, 매우 당혹스럽다. 반휘혈의 새까만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물방울은 그의 조각 같은 외모와 몸 이곳저곳에 맺혀 안 그래도 짙은 윤곽을 더 짙게 만들었다. 어디 물에 들어갔다 빠져나왔는지 몰라도 그의 몸 이곳저곳엔 물기가 자욱했다. 그 모습에 내 눈동자에선 격한 지진이 일어났다.
다시 말하지만, 굉장히 당혹스럽다…! 남자 몸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나는 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남자의 몸 따위 사물을 보듯 무미건조하게 바라봤을 텐데 어쩐지 지금은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자꾸만 뱅글뱅글 돌아갔다. 아무래도 장소가 체육관이 아니라서일까. 낯선 곳에서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쳐 놀랐는지 쿵쾅쿵쾅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그 영향으로 내 얼굴이 빨개진 건 안 봐도 훤했다.
“누나?”
“어, 어?”
반휘혈이 그런 날 의아하게 불렀다. 나는 그제야 겨우 가출했던 정신을 되돌렸다. 눈을 빠르게 몇 번 깜빡이며 시야를 다시 맞추자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모양인지 자그마한 열기가 돌고 있는 반휘혈의 얼굴이 보였다.
“어, 샤, 샤워하고 나온 거야?”
“응.”
반휘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훔치더니 자리를 살짝 비키며 말했다.
“들어와.”
“어어….”
뭐지, 이 기분은. 반휘혈을 보면 긴장이 더 풀릴 줄 알았는데… 어쩐지 묘하게 초조한 느낌이 들었다.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은 감각이었지만 나는 놀란 게 덜 가라앉은 상태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시, 실례하겠습니다아-.”
쭈뼛쭈뼛 인사를 하며 들어가는데 반휘혈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건…?”
“응? 아, 이거?”
난데없는 말에 반휘혈을 보자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내 손에 들린 두 개의 선물이었다. 그는 존재감을 여과 없이 발휘하고 있는 물체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들어 올리며 설명해 줬다.
“집들이 선물. 뭘 줘야 할지 몰라서 정석인 두루마리 휴지랑 엄마표 불고기! 엄마가 너 갖다 주래.”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에이, 그래도 첫 집들이인데 그럼 쓰나.”
나는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선물들을 그에게 내밀었다.
“자, 선물.”
“……고마워.”
참으로 작고도 어색한 인사말이었다. 반휘혈은 스스로도 낯선 모양인지 볼을 쓸며 뒷목을 문질렀다. 덕분에 내 미소가 더 깊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별말씀을. 아, 너 감기 걸리겠다. 어서 옷 입으러 가.”
일찍 온 탓에 준비가 덜 된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근방에서 시간 좀 축이고 오는 건데. 미안한 마음에 그의 등을 밀며 발걸음을 속히 재촉했다.
“우-와….”
그리고 나는 복도를 지나고 보이는 광경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쾌적하게 트인 커다란 유리창.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한강의 모습은 당연히 압도적이었으며, 채광이 잘 들어 집 안 곳곳을 환히 비추는 내부의 모습에 또 놀라고 말았다.
“여기 복층이었구나….”
고급 오피스텔 중에 복층 구조로 이루어진 집이 있다고 알긴 했지만, 이렇게 주택을 연상시킬 정도로 넓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인테리어도 꽤 심플하면서도 깔끔하게 배치가 잘 되어 있어 언뜻 사무실을 연상시키기 좋은 구조였다.
“대박-.”
몸을 한 바퀴 돌며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런 내게 반휘혈이 물었다.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고 자시고, 너무 좋은데? 진짜 짱이야!”
어휘가 부족해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나는 통탄스러운 심정으로 반휘혈을 보았다.
“어? 옷 입었네?”
그런데 대체 언제 입었는지 반휘혈은 검정 무지 티를 걸친 뒤였다. 반휘혈이 재빨랐던 건지 아니면 내가 그만큼 멍청하게 집 안을 구경하는 시간이 길었던 건지…. 나는 슬쩍 후자의 경우를 무시했다. 아무튼 옷을 입으니까 좀 낫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제야 편히 반휘혈을 보았다. 그러자 물기를 머금은 그의 머리가 보였다.
“머리는 안 말려?”
끄덕. 내 물음에 무심한 동작이 따라왔다. 나는 그 대답에 못마땅히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두피에 안 좋아. 말리고 와.”
그러자 반휘혈이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변하지 않은 걸 보니 괜찮다는 뜻으로 말한 것 같긴 하다만, 내 마음이 안 괜찮았다.
“그러지 말고. 넌 머리 짧으니까 금방 끝날 거 아냐.”
그러나 이번에도 반휘혈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정말 고집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사실 서이수도 나도 집에선 머리를 말리지 않은 채로 방치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보니 익숙하긴 하다만. 그래도 대충 살아도 되는 우리들과는 달리 반휘혈의 머릿결은 소중하지 않은가. …왠지 그의 머리를 꼭 말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읏-차. 봐 봐. 완전 젖었잖아. …너 수건으로 털긴 한 거야? 이러다 옷까지 흠뻑 젖겠다.”
나는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그의 머리칼 몇 가닥을 집었다. 머리끝을 만졌음에도 불구하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정말 계속 방치해 놨다간 감기 걸리게 생겼다. 나는 그것을 비비듯 만지다가 세우고 있던 발끝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뒷목을 문질렀다.
“안 되겠다. 정 귀찮으면 내가 말려 줄 테니까 방으로 가자.”
“……방?”
“응. 어디가 네 방이야?”
휙휙 고개를 돌리며 둘러보았지만, 딱 봐도 방이 한두 개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내 멋대로 돌아다니며 방을 뒤질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반휘혈의 팔을 잡아끌며 그를 재촉했다. 그러자 눈을 크게 뜨며 당황스러워 보이던 반휘혈이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 그는 발을 움직여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형님분이 안 보이시네. 일하러 가신 거야?”
기업의 대표이니만큼 공사가 다망하단 건 알지만, 어제 한도훈의 말해 준 바에 따르면 이 집들이가 성사되는 데 오래 걸린 건 형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어젯밤 한도훈의 요청대로 반휘혈과 헤어진 후 방에 들어가 곧장 연락해 닦달해 얻은 정보였다. 분명 자신이 있을 때 아니면 데려오지 말라고 했던가….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이었기에 꽤나 흡족해했던 어제였다. 물론 막상 만나려니 긴장이 올라오긴 했다만, 그래도 역시 반휘혈이 좋아하고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인 만큼 한 번쯤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잠깐 나갔어.”
“잠깐?”
“응.”
아하. 잠시 볼일 보러 나갔나 보다. 나는 그 타이밍에 찾아온 거고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럼 금방 오시겠네?”
“…안 와도 되지만.”
“응…?”
아니, 그 무슨 야박한 말인가. 생뚱맞은 말에 반휘혈을 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무심한 낯이었다.
‘친한 거… 맞지?’
왠지 그에게서 냉기가 풀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잡고 있는 그의 팔은 따뜻해서 그 대조가 참 신기하게 와닿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형에 대해 물어봤자 기분만 나빠 보일 것 같아 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2층으로 향하던 그는 어느 방문 하나를 열었다.
“오.”
그리고 보이는 광경은 딱 반휘혈의 방이라는 느낌을 연상시킬 정도로 무채색으로 배치되어 모던하고 심플했다.
‘여기가 반휘혈의 방!’
왠지 유명 연예인의 방에 온 기분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구경하고 있는데 반휘혈이 방 안쪽에 있던 문을 열었다. 따라가 보니 그곳은 욕실과 이어지는 화장대가 있는 공간이었다. 반휘혈은 그 앞에 서더니 서랍 하나를 열어 드라이기를 꺼냈다.
꺼내진 드라이기는 곧장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들자 반휘혈이 어딘가로 척척 걸어갔다. 그곳은 책상 앞이었고, 그는 의자를 빼 앉았다. 그 재빠른 행동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는데, 반휘혈이 몸을 돌리며 왜 안 오냐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아, 갈게, 가.”
…저 녀석. 아까는 그렇게 시큰둥하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기분에 헛웃음을 흘리며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콘센트를 찾아 드라이기를 꽂은 후, 잠시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혹시 불편하거나 뜨거우면 말해.”
누구 머리 말려 주는 건 처음이다 보니 많이 서툰 게 티가 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혹시 몰라 경고해 주자 반휘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다-.”
위이이잉-. 묵직한 소리가 울리며 드라이기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열기가 집중되지 않게 하기 위해 가볍게 흔들며 반휘혈의 머리를 매만졌다.
‘음.’
머리가 굉장히 부드럽군. 말리면 말릴수록 좋은 감촉이 느껴지니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게다가 샴푸 향도 꽤 좋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동물을 키우는 기분인걸.’
한 번도 키워 본 적은 없지만 무언가 커다란 대형동물을 키우는 감각에 마음이 몽글몽글 퍼져 갔다. 게다가 반휘혈도 얌전하니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간만에 느끼는 심신의 안정감에 기분이 자꾸만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후후. 손님.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하다 보니까 어쩐지 장난기가 발동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 시간을 보내는 게 아까워졌다. 언제 이런 날이 또 오겠는가. 나는 씩 웃으며 그의 머리를 마사지하듯 살살 매만졌다.
“…없어.”
내 말에 나를 힐끗 본 반휘혈이 미미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무래도 내 미소에 반휘혈이 불길함을 느꼈나 보다. 그는 슬쩍 내 손에서 거리를 벌리었으나, 나는 멀어지는 그 어깨를 꽉 붙들었다.
“에헤이, 그럴 리가. 여기 이렇게 뭉친 어깨가 느껴지는데.”
“읏…!”
정확히 뭉친 부분을 짚어 내 꽉 눌러 주자, 기습당한 반휘혈이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사냥감의 약점을 포착한 감각에 사악히 미소를 그렸다. 어차피 머리는 다 말린 뒤였다. 그래서 드라이기의 전원을 가볍게 끄며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손님, 오늘 하루 특별 서비스로 모셔 드리지요.”
“아니, 안 해도….”
“어허. 사양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의 어깨를 잡지 않은 한 손의 관절을 오므렸다 펴자, 뚜둑, 뚜둑. 요란한 뼈 소리가 울렸다.
“제가 이래 봬도 우리 체육관 특급 마사지사 아니겠습니까~.”
어허. 이게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기회인 줄 아나. 이거 아무나 해 주는 거 아니다? 나는 벗어나려는 듯 몸을 살짝 뒤트는 몸을 붙들기 위해 그 어깨를 친절히 꽉 붙잡았다.
“필요 없,”
“특별히 도방 무에타이 체육관 특. 제. 마사지법으로 모시겠습니다.”
오, 마침 저기에 침대가? 반휘혈이 뭔가 말하던 것 같았지만, 싹 무시하며 나는 그의 몸을 휙, 일으키고 채 정신을 차리기 전에 침대에 내던지듯 던졌다. 그리고 빠르게 그 몸 위에 올라 발버둥 치지 못하게 사지를 압박한 채 급소를 꾹 눌러 버렸다.
“읏…?!”
그러자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게 당혹스러웠는지 반휘혈에게서 당황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가 왜 이렇게 즐거운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대로 진행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나는 반휘혈에게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아프실까 걱정이신가요? 하하, 괜찮아요. 고통은 짧으니까요.”
“…잠깐.”
방금, 뭐라고? 반휘혈이 믿을 수 없단 시선으로 내게 깔린 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향해 씨익, 미소 지었다.
“자, 그럼 시작할까?”
즐거운 마사지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