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집들이. (6)
***
“흐음.”
반휘석은 물끄러미 자신의 발 밑을 보았다. 현관에 놓인 한 켤레의 작은 운동화. 그것은 자신의 집에 있을 수 없는 사이즈의 신발이었다.
‘벌써 왔나 보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손님이 방문했나 보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이른 방문에 그는 눈썹이 살짝 휘었으나, 곧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
그런데 거실에 있을 거라 여겼던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주위를 휙, 둘러보다가 반휘석은 두루마리 휴지와 쇼핑백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이 손님이 가져온 선물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쇼핑백 안을 확인하자 반찬 통이 있었고, 그 안에는 불고기가 있었다.
“…아.”
이게 그건가. 반휘석은 미국에서 동생과 재회한 후 얼마 안 있어 그에게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타지에 온 것이다 보니 고향 음식이 그리웠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매사 무관심한 동생은 입맛도 무심하기 그지없었던 터라 이번에도 ‘아무거나.’라는 단답이 나올 거라 예상했었다.
‘…불고기.’
그러나 반휘혈이 답했다. 그것도 정확한 명칭을 대면서. 동생이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딱히 없었던 걸로 기억했던 반휘석은 이 사실이 놀랍기 짝이 없었으나, 이내 좋은 일이라 여기며 주방장을 불러 불고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음식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이게 아냐.’
그리고 그 음식이 퇴짜를 맞는 것도 일순이었다. 주방장은 곁에서 동생의 냉정한 평가를 듣더니 상처를 받은 것처럼 입을 틀어막으며 자리를 떠나 버리고 말았다. 반휘석은 주방장의 유약한 뒷모습을 흘긋 보다가 반휘혈이 먹은 불고기를 한 입 먹어 보았다.
괜찮은데. 반휘석은 불고기에 대한 맛 평가를 간단히 내렸다. 그의 전속 요리사는 프랑스인이긴 했으나, 세계 각 나라의 요리에 능숙하여 어느 나라 요리가 나와도 훌륭한 솜씨를 내왔다. 하나 반휘혈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따로 원하는 맛이 있는 거야?’
‘…아니, 됐어.’
어차피 여기서 못 먹어. 하면서 시큰둥히 말을 덧붙이더니 그는 젓가락을 느릿하게 재개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있으니 그냥 먹는다는 것처럼 보였다. 반휘석은 동생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자신도 밥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반휘석은 반찬 통에 담긴 이 불고기를 보고 나서야 그가 말한 그 불고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흐음.”
그는 그 반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겨 부엌으로 그것을 가져갔다.
“이것도 식탁에 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반휘석은 안에서 부지런하게 일하고 있던 고용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고용인은 빠르게 불고기를 데운 후, 큰 그릇에 옮겨 담았다. 달칵, 불고기가 담긴 그릇이 식탁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그 주위론 이미 준비되었던 음식들이 플레이팅이 된 채 상석에 자리한 불고기를 빛내 주었다. 반휘석은 깔끔하게 정돈된 그 만찬들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PM. 12 : 10
어느새 약속했던 시간이 지나 있었다. 준비한 음식이 다 식으면 곤란했다. 그는 슬슬 두 사람을 부르기 위해 움직였다. 아마 방 구경을 시켜 주고 있을 거라 여기며 반휘석은 2층으로 향했다.
똑똑.
반휘석을 들어가기 전, 가볍게 노크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
그런데 방 안에선 반응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두드리며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휘혈아.”
이번에도 묵묵부답. 반휘석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 방에 없는 걸까. 어쩌면 다른 방을 소개시켜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두 사람을 찾기 위해 다시 발을 떼려는데,
“으… 만…!”
불현듯 방 안쪽에서 억눌린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응한 반휘석의 발걸음이 멈추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
뭐야, 방에 있었나. 아무래도 방금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안쪽에 쪽방이 있으니 거기에라도 들어가 있었나 보다.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방 앞에 섰다. 그리고 다시 노크를 하며 그의 방문을 열었다.
“휘혈아, 이제 슬슬….”
반휘석은 여는 것과 동시에 보이는 광경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몸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것이…
“약한 소리 하지 마~. 금방 끝나니까 몇 초만 더 버텨 봐!”
“으, 그읏…!!”
“?????”
…웬 작은 여자애와 자신의 동생이 레슬링 같은 자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반휘석은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반휘혈은 제 동생의 위에서 목을 짓누르며 팔꿈치로 등 어딘가를 짓이기고 있던 여성의 눈이 문득 제 쪽으로 돌아갔다.
“…엥?”
아, 눈 마주쳤다. 여성의 눈이 부지불식간에 커지며 경악한 듯 입이 벌어졌다.
“…….”
“…….”
그리고 잠시 동안 깊은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나는 머리를 땅에 박을 듯 숙여 보였다. 얼굴은 이미 화끈하게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잠시간의 기나긴 침묵 끝에 반휘혈의 형님이 먼저 입을 여시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수치사 했을 게 자명했다.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내가 방해했나?”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나를 위로하고자 하는 이 말도 굉장히 쪽팔려 죽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나는 홧홧하게 열이 오른 얼굴로 그에게 다시 사과했다.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누가 온지도 몰랐다. 반휘혈이 일어나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수습해 주길 바랐지만 내 심혈을 기울인 마사지로 반휘혈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 넉다운이 되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하, 이 빌어먹을 재능 같으니.’
몸을 사용하는 건 대부분 잘하는 편이긴 하다만, 어떻게 마사지 하나도 끝내주게 잘해서 사람을 저렇게 녹진녹진하게 만들 수가! 역시 그 반휘혈도 피해 갈 수 없는 엄청난 마사지였는지 형님 몰래 그를 툭툭 두드려도 꿈쩍도 하질 않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글렀다. 이 수치로 미칠 것 같은 상황은 내 자력으로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는 듯싶었다. 나는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힘차게! …가 아니라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정말 못 볼 꼴을 보여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휘혈이 괴롭히고 있던 건 아니구요. 그냥 마사지 좀 해 주고 있었어요….”
형님이 어떻게 봤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동생이 괴롭힘당한 듯 보였으면 어떡하지? 혹시 몰라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며 연신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자,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그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아니, 괜찮아요. 덕분에 재밌는 구경했어요. 그러니까… 서이나 학생?”
“아, 넵. 서이나라고 합니…다아…?”
생각보다 온화한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어 반응했다. 어, 좀 별로 신경 안 쓰나? 반색하며 대답하는데… 내 말끝은 점점 흐려지는 것도 몰라 음절이 올라갔다.
“어, 휘, 휘혈, 이…?”
그도 그럴 게, 왜 반휘혈이 눈앞에 또 있는 것인가. 나는 눈을 벅벅 비빈 후에 뒤에 엎드려진 반휘혈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앞에 있는 존재를 또 보았다. 그러나 앞에서 제 존재를 과시하는 독보적인 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음?”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를 달며 내 말에 반응하더니, 곧 무언가 눈치챈 듯 입을 열었다.
“아, 닮았죠?”
“어, 네, 네….”
놀랍게도 반휘혈과 그의 형은 꽤나 판박이였다. 쌍둥이인가 의심이 될 정도였지만, 자세히 보면 선이 더 굵고 눈매가 더 날카로운 쪽은 눈앞에 있는 형 쪽이었다. 마치 미래의 반휘혈이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야-. 역시 미래가 창창하구나, 휘혈아!’
방금은 경황이 없어서 그의 얼굴을 잘 살피지 못했지만 이렇게 가까워진 지금은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오히려 방금까지 못 알아보고 있었던 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의 창창한 미래가 괜히 뿌듯해졌다. 그래선지 흡족한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참는 것이 고역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잘생겼지만 미래엔 더 끝내주는 미남이 되겠군! 눈앞에 있는 그의 형이 바로 그 증거나 다름없었다.
“이, 이렇게 닮은 형제는 처음 봐서 저도 모르게 넋 놓고 봐 버렸네요. 저랑 제 동생은 하나도 안 닮아서… 그,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던 게 문득 마음에 걸렸다. 뒤늦게 사과를 담자 그가 싱긋, 하고 다정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그런 소리 많이 들어서 익숙해요.”
……와우, 이건 좀 색다르다. 반휘혈의… 아니, 반휘혈이랑 닮은 얼굴로 이런 웃음이라니. 게다가 어른미가 더해진 미남을 본 건 이 세계에 와서 처음이다 보니 조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남에 대해 면역력이 없었다면, 그냥 혼을 쏙 빼놓고 굳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왠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깊은 시선이 내게 닿아 오자 뭔가 가슴 속이 간질거려 괜히 주먹을 쥐어 보고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아, 이 설레는 기분. 굉장히 오랜만인걸. 역시 어린애들만 보다가 어른을 보니 감회가 색달랐다. 헤실헤실 풀어지려는 입꼬리를 다잡기 위해 노력하려는 그때,
“억.”
외마디 작은 비명과 함께 쑥, 하고 내 몸이 뒤로 빠졌다. 방심하고 있던 내 몸뚱어리가 맥없이 침대 위로 나자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 하러 온 거야.”
범인은 반휘혈이었다. 나는 잠시 상황의 갈피를 못 잡고 어리벙벙하게 있다가 뒤늦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반휘혈은 대체 언제 일어났는지 나와 그의 형의 틈을 비집고 서 있었다.
“…훗.”
그 모습에 반휘혈의 형이 자그맣게 웃음을 흘렸다. 마치 재밌는 걸 본 듯한 태도에 나는 떨떠름하게 얼굴을 굳혔다.
‘불길하다…. 엄청 불길해.’
이 익숙한 상황. 저 타인을 향한 반휘혈의 경계 어린 몸짓. 왠지 오해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심하게 들었다.
“뭐 하러 오긴. 이제 식사하자고 내려오라고 하려 했지.”
한창 불안한 심장이 내 초조함을 부추길 즈음, 반휘혈의 형이 입을 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곧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
‘…어라, 딱히 별다른 의심 안 하네?’
생각 이상으로 무덤덤한 반응에 역시 반휘혈의 형이구나~, 하는 순간이었다.
“아니면, 둘이 더 할 얘기… 있나?”
불쑥 들려온 그 말과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그와 함께 등골에 섬찟한 한기가 느껴졌다. 마치 그 눈빛에서 사고 칠 생각 말고 조용히 내려오라는 압박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하나 이런 내 바람과는 상이하게도 불길한 기운은 틀릴 일 없이 꼭 들어맞았다.
“없습니다. 내려가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더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얌전히 수긍해야지. 나는 피눈물을 흘리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