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79화 (179/306)

180. 집들이. (7)

반휘혈의 형을 따라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집 안을 기웃기웃 구경했다. 어딜 봐도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각은 마치 모델 하우스를 연상시켰다. 사람의 손을 탄 건지 아닌 건지 애매할 정도로 지나치게 깔끔하단 인상에 위화감이 퍼지려는데, 문득 코끝에서 맛있는 내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주방에 들어선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워….”

어라, 나 어디 고급 뷔페 레스토랑이라도 온 건가? 라는 생각이 저절로 솟아날 정도로 눈앞엔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껏 한도훈의 초대로 여러 음식을 먹어 봐서 그리 낯선 광경은 아니긴 하다만, 그래도 이것을 한도훈이 아닌 반휘혈의 집에서 볼 줄이야. 아니, 그보단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같이 하는 게 더 대박인 거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군침이 도는 음식들을 보고 있자니, 아직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설렘이 날뛰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우선 여러 가지를 준비해 봤어요.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 라는 지극히 부자다운 말을 하다니. 역시 재벌 클래스는 남달랐다.

“아뇨, 전부 다 입맛에 맞을 것 같은…, 어?”

당장이라도 침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경거망동한 행동은 보일 수 없어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음식을 탐색했다. 그러다 불현듯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아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음식을 하나 발견했다.

뭐지, 저 익숙한 음식은.

아니, 뭔지는 안다. 불고기이지 않은가. 문제는 그게 아니라 저 비슷한 때깔을 지닌 불고기를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뭐, 불고기 색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할 수도 있기야 하지만, 저 반들반들하고 진한 색감은 우리 집에서 자주 보던 그 색인 것 같은데….

나는 흘긋 테이블 근처에 대기하고 계시는 고용인으로 추정되는 분을 바라보았다. 앞치마를 착용하신 복장이 딱 보아도 이 요리를 만드신 분 같아 보였다.

‘우연…이겠지?’

그렇겠지? 아무리 내가 오늘 선물용으로 가져왔고, 그 짧은 시간에 그 쇼핑백의 반찬 통을 발견한 반휘혈의 형님이 신경 써서 이렇게 정중앙에 떡하니 배치해 준다는 건… 너무 긍정적인 생각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납득하고 넘어가려는데, 불쑥 반휘혈이 입을 열었다.

“이거….”

그가 지목한 것은 방금까지 내가 눈여겨보던 불고기였다. 마치 무언가 아는 듯한 반응에 반사적으로 반휘혈을 보자, 반휘혈이 그의 형을 바라보았다. 반휘혈의 형은 상석에 앉으며 우리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하곤 여상히 대답하였다.

“있길래.”

형님…!! 말 자체는 무심하기 그지없었으나 그 안에 담긴 세심함에 나는 감동이 밀어닥쳐 입을 틀어막았다. 지극히 서민적인 우리 집 음식을 저 호화로운 공간에 끼워 준 것도 모자라 신경 써서 플레이팅까지 해 준 그의 배려에 그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고마움을 담아 인사를 하며 손짓해 준 자리에 앉았다.

“별말씀을. 저도 궁금했었거든요.”

그런데 그가 이어 대답해 준 말에 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분은 고요한 미소를 담은 채 반휘혈을 잠시 눈짓했다.

“누군가가 그토록 그리워한 불고기의 맛이 말이죠.”

“네?”

나는 어리벙벙하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 그의 말대로라면, 반휘혈이 우리 엄마의 불고기를 그리워했다는 건데…. 대체 언…,

“먹고 싶다고 해서 특별히 오더를 내렸는데 설마 한 입 대자마자 바로 퇴짜를 놓을 줄 몰랐었죠. 꽤 실력으로 이름난 셰프였는데 말이죠.”

‘아. 미국 얘기구나.’

형님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게 언제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작년에 그와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 반휘혈이 불고기가 먹고 싶다는 답신을 보내왔던 게 떠올랐다. …설마 일류 요리사가 해 준 불고기를 저버리고 엄마표 불고기에 손을 들어 줄 줄이야.

히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후훗. 역시 우리 엄마야. 놀라운 것과는 별개로 이런 재벌 집안 자식의 입맛을 사로잡은 엄마의 솜씨가 자랑스러운 마음에 어깨가 저절로 으쓱하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꼭 얘기해 줘야겠다.

“…어머님 음식은 다 맛있어.”

한창 콧대가 높아지던 중, 반휘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자연스레 그를 보자, 반휘혈은 불고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마치 좋아하는 걸 앞에 두고 먹기만을 기대한 아이의 모습, 딱 그 짝이었다.

‘엄청 좋아하는 거 맞구나….’

어쩐지 그 사실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우리 집 식탁에 불고기가 나올 때마다 집에 초대할 걸 그랬나, 라는 생각이 설핏 들 정도였다.

“……그래?”

다음부터 진지하게 고려를 하던 와중, 뒤늦은 호응이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형님분을 보았다. 그리고 목격했다.

“나도 기대되네.”

동생을 향해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형의 모습을.

***

식사를 하는 동안 많은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원래부터 말수가 부족한 타입인 듯싶었고, 나는 밥 먹을 땐 음식에만 집중하는 편이다 보니 식사 자리엔 거의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건 그렇고,

‘짱 맛있어!’

어떻게 집는 족족 다 맛있을 수가 있지! 나는 오랜만에 입안이 황홀해지는 것 같아 행복에 잠겼다.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에 있는 그릇들이 거의 다 내 쪽으로 쏠려져 있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 같긴 했지만, 나는 사양치 않고 보이는 것 전부를 열심히 해치웠다.

음식에 정신이 팔린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그 많던 음식의 2/3가 거덜이 나 있었다. 어라, 그 많던 음식 어디 갔지. …내 배에 거지가 들었나? 요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았다 보니 맛있는 음식이 입에 닿자 아주 정신 줄을 놓아 버린 듯했다.

‘…선수 안 해서 다행이다.’

이 순간 스스로의 현실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선수였다면, 아빠의 불호령과 함께 피눈물을 삼키며 식단 조절을 감행했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찔해졌다. …뭐 이렇게 말해도 이 몸뚱어리는 그동안 식단을 선수용으로 맞춘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탄산음료도 이 세계에 와서 처음 접해 봤다고 하면 믿겠는가. 처음엔 너무 달아서 놀랐지만 지금은 치킨과 피자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조합이었다. 정말이지 이전 세계에서 은퇴를 하고서도 미련스러울 만치 안 마셔 본 게 좀 후회가 될 정도였다.

‘아.’

선수였던 이전 세계의 삶을 떠올려서일까, 불쑥 어제 만난 백장미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곧장 그 모습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내쫓았다.

‘흥이다, 흥.’

난 선수 같은 거 이제 안 할 거다! 그런 힘든 일 뭐가 득이 되어서 한다고…. 체중 감량도 감량이지만, 체급 맞춘다고 증량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나는 속으로 들리지 않게 투덜거렸다.

“입맛엔 맞았나요?”

“아, 네. 엄청 맛있었어요!”

어느 정도 양이 차자 눈에 띄게 손이 느려졌다. 그리고 그걸 기민하게 파악했는지 형님분이 내게 말을 걸었다. 방심하고 있던 차 들려온 물음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쑥 찾아온 민망함에 뺨을 긁적였다.

“제가 말도 안 하고 너무 먹기만 했네요. 말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요. 진짜 맛있어서 그만….”

“그건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 괜찮아요.”

사과를 하려는데 형님분이 부드러운 미소를 걸치며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유한 인상이 된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식사 내내 나와 반휘혈을 살피고 있었다. 정확히는 반휘혈 쪽으로 빈도가 훨씬 많았지만. 아무래도 밥 잘 먹는, 정확히는 우리 엄마의 불고기를 잘 먹고 있는 모습이 꽤나 기꺼웠던 것 같았다.

‘알지, 알지. 그 마음 잘 알지.’

나도 반휘혈에게서 무언가 좋아하는 게 생겼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나는 알게 된 지 불과 1년밖에 안 됐으나 그는 반휘혈이 어릴 때부터 줄곧 지켜봤을 터였다. 모든 것에 호불호를 지니지 않은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좋아하는 게 생겼다고 한다. 그걸 직접 목격하니 얼마나 감동이겠는가.

‘역시 좋은 형이 맞는 것 같아.’

잠깐이나마 지켜본 결과, 그가 보여 준 태도에서 동생에 대한 사랑이 충분히 느껴졌다. 한때는 사랑한다는 동생을 두고 어째서 도망을 선택하였는지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에게도 어떠한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도 다행이야.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

식사가 다 끝나고 즐거운 디저트 타임이 찾아왔다.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며 우리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아, 진짜요?”

“그래.”

어느새 형님과 나는 편히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원인은 대화 중간부터 말을 낮춰도 된다는 내 요청에서부터였다. 경칭을 주고받는 것도 좋긴 하나, 객관적으로 보면 꽤 나이 차가 나는 관계다 보니 이쪽이 더 낫기도 했고, 또 지극히 내 개인적인 기준으론 존댓말은 왠지 거리가 지나치게 멀어 보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래 친해질 생각은 없었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그는 인간적으로 꽤 매력적인 이였다. 덕분에 얘기는 수월하게 진행되기도 했고, 또 앞으로 반휘혈의 의누나로서 반휘혈의 문제로 한두 번 볼 사이도 아닐 것 같아 꺼내 본 말이었다. 다행히도 형님은 거부감 없이 흔쾌히 내 말을 받아 주었다.

“와, 공항에서 진짜 그랬다고요??”

“정말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

그리고 지금은 한창 흥미진진한 얘기가 오가던 중이었다.

“아니, 그래도 몇 년 만에 보는 거 아니었나요?”

“그렇지. 한… 5년 됐었나.”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와 반휘혈의 재회의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와, 5년….”

그 기간이라면 요즘 시대엔 이미 강산이 바뀌고도 충분할 시간이었다. 분명 사랑하는 가족을 그 시간 동안 보지 못했다면, 이전에 어떤 애증이 서려 있든 간에 으레 애틋하고 반가워서 만나자마자 부둥켜안아서 회포를 푸는 것도 모자랄 판이었으나…

“나도 만나자마자 때릴 줄은 몰랐지.”

반휘혈은 언제나 상상 이상이었다. 그의 성격상 극적이게 반응하진 않을 거라 예상은 했다만… 설마 재회하자마자 냅다 주먹을 갈길 줄이야. 그동안 형에게 참아 왔던 울분은 대체 얼마나 컸던 건가. 분명 반갑긴 반가웠을 터였지만… 보자마자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을 정도였나.

“한 대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

“그래도 장소는 가렸어야지. 그때 경찰에게 해명한다고 꽤 힘들었었어.”

“흥.”

하지만 반휘혈은 뉘우치는 기색 없이 뻔뻔한 낯으로 대꾸했다. 형님은 그런 그의 반응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지 피식 웃더니 날 보며 말했다.

“이런 녀석인데 괜찮겠어?”

“예?”

갑작스럽게 튄 불똥에 화들짝 놀라 버렸다. 휘둥그레 눈을 뜨고 있자, 형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살풋 지어 보였다.

“이렇게 제멋대로인데… 감당할 수 있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