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집들이. (8)
“…….”
저건… 무슨 뜻이지. 어쩐지 함축이 많이 된 것 같은 발언이었다. 그렇다고 그 내용을 자세히 파악하려다가 자칫 잘못해서 이 좋은 분위기를 망칠까 봐 걱정되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우선 대답부터 하고 보…!
“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이야.”
…려고 할 때, 반휘혈의 무심한 태클이 가차 없이 걸어졌다. 형님의 질문에 결연하게 대답하려고 다졌던 각오가 무색해졌으나, 입을 합 다물며 슬쩍 구석에 박혀 있기로 했다.
“무슨 상관?”
“그래.”
“…….”
휘이잉-. 어라, 웬 차가운 바람이…? 에, 에어컨 바람 때문이겠지? 문득 들어온 한기에 나는 오소소 팔에 닭살이 돋아났다.
‘하하, 아이스크림 너무 많이 먹었나 봐. 갑자기 추워지네….’
어쩐지 동공까지 떨리는 기분인걸?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소름이 돋은 팔을 슥슥 문질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앞에 직면한 현실은 내 시야를 붙잡으며 무시하게 놔두질 않았다.
“그리고 제멋대로인 건 형이겠지.”
“호오….”
“…….”
오 마이 갓. 온화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골이 되었다. 말 몇 마디 나눴다고 갑자기 분위기가 이런가. 우리 아까까진 좋았잖아. 대체 왜 이래. 어쩌면 두 사람은 그냥 일상적인 대화일지도 몰랐으나, 이 광경을 처음 마주하는 제삼자의 입장으로선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꽤나 불만이 많은가 본데. 반휘혈.”
“그렇게 느꼈으면 그럴 만한 행동을 한 거겠지.”
휘오오오-. 워, 미친. 여기서 온도가 더 떨어질 수도 있었다니. 나는 그 사실에 기함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건 지나가던 개도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랑 내 누나 관계 괜히 헤집지 마. 나랑 누나는 잘 만나고 있으니까.”
…엇. 잠깐. 내가 거기서 왜 나와. 그리고 그 내용은 또 뭐야…?! 나는 경악하며 반휘혈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있는 날 끼워 넣지 말아 주지 않겠니…? 너희들 형제 싸움에 등 터진 새우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나는 그 마음을 담아 간절히 반휘혈을 보았다. 누가 그 반휘혈과 그의 가족 아니랄까 봐, 잠깐 기분이 수틀린 것뿐인데도 공기가 영하로 뚝뚝 떨어진 게 여실히 느껴졌다. 이런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봤자 득될 게 무엇인가. 그에 내 본능적인 감이 외쳤다. 없으니까 그냥 조용히 있자! 그리고 나는 그 감에 찬성! 하며 적극 동의를 표했다.
“흠. 잘… 만나고 있다고?”
“그래.”
“아니, 잠깐만??”
그래 봤자 뭐 하나. 잠자코 있다간 이상한 오해 부추기기 쉬워지는데! 결국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형 일이나 잘 해.”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들어 먹지를 않는 반휘혈이라는 골칫덩이가 바로 그 문제였다. 그동안 잘 참는가 싶더니, 이렇게 가족 앞에서 대형 사고를 치는구나! 아니면 그간 참았던 게 폭주라도 하는 거니…? 왜 다시 이런 직설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는 건데?!
“반휘혈, 너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결국 내가 참다못해 그를 제지하자 반휘혈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러자 녀석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제야 깨달았는지 아차 싶은 표정은 지었다.
“…….”
그런데 반휘혈의 표정이 또 바뀌었다. 그는 입을 앙다물며 세모꼴로 삐죽이는가 싶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난 틀린 말 안 했어.”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졌다. 공기의 흐름이 바뀐 건 좋았으나, 이젠 내 입장이 난처해졌다. 특히 반휘혈과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형님의 시선 덕에 더더욱 말이다. 덕분에 내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새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 형님.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나는 그런 간곡한 마음을 담아 최대한 침착하게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아니, 그 뜻이 아니잖아.”
“…알아.”
음?
“그래도, …난 틀린 말 안 했어.”
…어라?
“휘혈아?”
뭔가 이상하다. 기민한 내 눈치가 지금 이 순간 민감하게 반응했다. 혹시 몰라 내가 반휘혈과 시선을 맞춰 보기 위해 몸을 살짝 빼 보았으나, 그는 고의적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역시 이상한데?’
평소의 반휘혈이라면 그냥 뻔뻔하게 밀어붙이든가, 무시를 했으면 했지, 이렇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진 않았다. 게다가 왠지 눈을 살짝 내리깐 그의 모습이 초조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대체 뭐지? 무슨 일이 있었나?
내 시야가 의문스럽게 좁혀졌다. 당장이라도 캐묻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힐끗 반휘혈의 형님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추측이 되질 않았다. 물론 나와 반휘혈의 사이야 청렴결백 그 자체였으나, 타인이 보기엔 수상쩍게 보인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내밀한 대화를 나누기가 더 조심스러웠다. 나는 잠시간 이걸 어째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와중,
“…슬슬 일어나 봐야겠군.”
돌연 형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형님은 시계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오후에 일정이 생겨서. 미안하지만 난 이만 자리를 비울까 해.”
“아….”
그 말을 듣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우리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한도훈에게서 그가 이 시간을 위해 오늘의 스케줄을 조정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러니 아마 저 말은 거짓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그런 그를 잠시 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볼게요.”
“그럴래? 왠지 미안하네.”
“아니에요.”
우리는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형님이 자연스럽게 반휘혈에게 말했다.
“휘혈아, 배웅해 주고 와.”
역시.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게 본 목적이었음을 바로 눈치챘다. 반휘혈의 형님은 아무래도 우리들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다만 그건 집 안에서는 권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라는 뜻이었다. 정말 상식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권유에 쓴웃음을 짓고 있자, 불현듯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 형님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가벼이 지으며 눈짓했다. 나는 그에 픽, 하고 실소를 작게 머금고 말았다.
“…알았어.”
형님의 말에 반휘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묘하게 기분이 나빠 보였다. 얘는 또 왜 이래…. 의문이 들었지만 형님이 나를 현관까지 배웅해 주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마음속으로만 담아 두었다.
“아, 맞아.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 나는 그에게 초대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전하자 형님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야말로 선뜻 와 줘서 고마워. 남자들만 사는 집에 혼자 오기 망설여졌을 텐데.”
역시 그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 맞나 보다. 요즘 내 주위에서 느낄 수 없었던 배려 있는 말에 감동이 차오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난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휘혈이랑 휘혈이 형 집이잖아요. 저도 형님 한번 뵙고 싶었고요.”
무엇보다 무슨 일이 생기면 때려눕힐 자신도 있었고 말이다.
“그거 영광인걸?”
후후. 형님이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오늘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지만, 목소리가 좋아서인지 꽤나 듣기가 좋았다.
“또 놀러 와.”
“저야 좋죠. 그럼 안녕히 계세요.”
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
그런데 돌연 어깨가 붙잡혔다.
“우리 휘혈이, 잘 부탁할게.”
동시에 내 귓가로 나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놀란 마음에 나를 붙잡은 이를 확인하자 그곳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형님이 있었다.
“엇.”
얼마나 눈을 마주하고 있었을까, 누군가 거친 손놀림으로 나와 형님의 사이를 떨어트려 놨다. 깜짝 놀라 확인해 보니 그 정체는 반휘혈이었다. 그는 자신의 형을 살벌히 노려보며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뇌까렸다.
“뭐 하는 짓이야.”
그는 굉장히 불쾌해 보였다. 내 어깨를 붙잡은 두 손은 나와 형님의 사이를 잔뜩 벌려 놓았다. 형님은 그런 반휘혈을 보며 피식, 미소 짓다 내게 눈짓했다.
‘아.’
그리고 나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곧장 파악했다. 방금 했던 말에 대한 답을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그와 같이 웃으며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형님. 제가 휘혈이 잘 돌보겠습니다!’
강하게 눈을 빛내며 힘찬 긍정을 내비치자 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하아….”
다행이다.
반휘혈의 형님인 반휘석이란 사람은 무뚝뚝하긴 해도 참 좋은 사람이란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요즘은 반휘혈이 잘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긴 했으나, 이렇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참 다행이었다. 그동안 반휘혈이 형에 대해 투정은 부릴지언정 그의 성정에 대해 욕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일이 있었던 집안이다 보니 워낙 불안했어야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도 이렇게 현실로 직접 마주하고서야 겨우 안도감이 찾아들어 왔다.
“휘혈아, 너네 형 좋은 사람이다.”
히죽 웃으며 그의 형을 칭찬하자 반휘혈이 슬며시 눈을 가늘게 떴다.
“…여섯 살 차이.”
“엥?”
웬 뜬금없는 소리지? 나는 난데없는 말에 휘둥그레 눈을 뜨자 반휘혈이 정색하며 말했다.
“여섯 살 차이니까 꿈 깨.”
“…….”
…잠깐. 얘가 지금 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람.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지금… 내가 형한테 호감 가질까 봐 걱정한 거야?”
“…….”
반휘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즉, 맞다는 소리였다. 그 대답에 내 어이는 단숨에 탈출해 버렸다.
“야, 이…! 내 나이가 몇인데! 니네 형을 넘봐!”
아무리 현재 그가 현재 사회적으로 어른이고 고급 오피스텔 건물이 딸린 데다 기업을 꾸려 가는 대표여도… 어, 이거 솔깃한가? …는 아무튼 이게 아니고! 어찌 됐든 난 정신만은 서른이 넘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그리 크게 나이 차는 나는 편이 아니긴 했으나, 그래도 20대 중반이면 너무 어리지 않은가. 그 나이면 한창때인데 말이다. 아, 물론 30대가 그렇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게다가 퍽이나 네 형님이 날 용케도 여자로 봐 주겠다.”
또 가장 중요한 건 이 몸뚱어리는 창창한 10대 소녀! 감히 넘보다가 형님을 범죄자 만들 일 있나…. 무엇보다 그가 나같이 평범한 애를 보며 용케 눈이 차겠다.
“아무튼 그럴 일 없으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넣어.”
단호히 말해 주자 조금 뾰로통해 있던 반휘혈의 얼굴이 슬며시 풀렸다. 어쩐지 내 말에 안도한 듯한 모양새였으나, 왜 이렇게 그 모습이 고까운지 모르겠다.
‘설마 형을 나한테 주기 아까웠던 거냐….’
갑자기 배신감이 들었다. 방금까지 형에게 냉랭한 기운을 쏘아 가며 틱틱거린 놈 대체 어딜 갔나. 역시 가재는 게 편이 맞는 게 틀림없었다. 왠지 내 볼이 퉁퉁 부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흥이다, 흥. 나도 내 동생 있다, 뭐.’
너만 형제 있냐? 나도 형제 있다. 물론 아침에 실랑이가 좀 있었으나, 내게도 귀여운 동생은 하나 있다, 이 말씀이야!
나는 속으로 한껏 툴툴거리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