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81화 (181/306)

182. 집들이. (9)

건물 밖으로 나서자, 훅 하고 더운 공기가 나를 덮쳤다. 시원한 곳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그 온도의 차이가 극명하게 다가왔다.

‘어, 너무 더운데.’

정말 다시 건물로 돌아서고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태양의 열기에 얼굴이 저절로 팍 찌그러졌다.

“…기분 나빴어?”

“엉?”

이번엔 또 얼마나 더우려나, 멍하니 생각하고 있던 와중, 뜬금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이게 뭔 소린가 싶어 그를 보자, 어째선지 반휘혈이 한풀 죽은 기색으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

뭐야. 이 녀석…. 왜 갑자기 내 눈치를 보는 거야? 당황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입이 벌어졌다.

“표정이 안 좋아서…. 기분 나쁘게 했다면, 미안.”

어? 설마 이거 방금 얘기의 연장선이었던 건가? …얘가 이렇게 선뜻 사과도 하고 진짜 웬일이지?

“그래도 형은 아냐.”

반휘혈은 사과를 하면서도 쓸데없는 뒷말을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럼 그렇지. 네가 순순히 사과만 할 리가 없지.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넘볼 생각도 없다니까. 욘석아.”

웃기는 녀석 같으니. 나는 녀석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말야. 너무 앞서가지 마, 이 바보야.”

정말이지. 반휘혈 이 녀석은 정상인처럼 굴다가도 가끔 사고의 포인트가 엇나갈 때가 있었다. 그래도 그게 이 녀석의 귀여운 구석 아니겠는가.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 버렸다.

“…….”

내 부정을 듣고 나서야 반휘혈도 안심이 됐는지 초조함이 깃들었던 낯이 풀리며 가벼이 숨을 내쉬었다.

어이구, 그렇게 형이랑 내가 이어질까 걱정됐냐? 정말이지 밉살맞았지만, 미워할 수 없어 고개만 내저으며 앞의 거리를 살폈다.

“휘혈아,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야 하는 거 맞지?”

집에 다시 돌아가는 길을 되짚기 위해 묻자, 반휘혈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힐끗 내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곤 내 팔을 슬며시 잡았다.

“응?”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그를 보자, 반휘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누나.”

“어, 어?”

그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긴 했으나 조금 당황스러웠다. 가, 갑자기 뭐지? 내 눈동자가 세차게 떨려 오는 걸 실시간으로 느껴지고 있던 와중, 앙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나랑,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그리고 그 내용은 꽤나 당돌했다.

“…엥?”

너무 당돌해서 내 뒤통수를 거세게 울릴 정도로 말이다.

“우리 단둘이 있는 거 오랜만이잖아. …나랑 좀 더 같이 있자.”

반휘혈의 손에 힘이 조금 더 실렸다. 그것이 어쩐지 간절함의 표현 같아 나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 다시 서서히 시선을 올려 반휘혈의 얼굴을 보았다. 반휘혈은 애처롭게 미간을 살풋 모으더니 내게 슬쩍 거리를 가까이 붙였다.

“안 될까?”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방도는 없었다. 어쩐지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떤 말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입만 벌렸다. 지금 내가 겨우 느낄 수 있는 건 태양이 뜨겁다는 것과 그 열기에 온몸이 익어 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응? 누나.”

나직한 물음이 다시 들려왔다. 그의 뜨거운 손이 내 팔을 타고 스르륵, 손바닥에 맞닿아 왔다.

“……!!”

뜨거웠다. 너무 뜨거웠다. 마치 불에 덴 것 같은 온기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내 행동에 나 스스로도 깜짝 놀라 버리고 말았다. 황급히 반휘혈을 보자, 그는 내 손을 놓친 자신의 손을 허망히 허공에 두며 멍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아니, 이건…! 그……!!”

나는 그에 바로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입은 곧 막히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나는 왜 이 상황에서 변명하려는 거지?’

무엇보다 내 반응이 가장 이상했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당혹스러워하는 건가. 반휘혈의 접촉이 낯설어서? 아니,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나는 그동안 반휘혈과 많은 접촉을 해 왔다. 하지만, 방금 그건….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머리를 헝클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 그, 당황해서 그만! 그, 근데 휘혈아. 굳이 손까지 안 잡아도 괜찮아!”

그래, 방금 그건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접촉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당황스러운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지금 바로잡아야만 했다.

“우린 그냥 누나 동생 사이잖아. 그치?”

“그렇…지만.”

반휘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쩐지 조금 굳어진 듯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무 일 아니라는 것처럼 툭, 던졌다.

“이러면 남들이 오해하니깐 앞으로 이런 거 금지야.”

“……뭐?”

아연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이상한 걸 들은 듯한 음성이었다. 왠지 마음이 콕콕 찔리는 게 어린아이한테 못된 짓을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어른으로서, 누나로서 제대로 가르쳐 줘야만 했다.

“이런 건 좋아하는 사람한테 하면 돼.”

“……!”

반휘혈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한 발자국을 벌려 떨어졌다. 그래. 이렇게 손을 잡는 건 어릴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그가 관심을 가진 여성이 생긴 지금은 해선 안 될 행위였다. 그러니 내가 직접 선을 긋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지?”

싱긋, 미소 지었다. 제대로 웃어 줬는지 모르겠다. 왠지 묘하게 입꼬리가 굳은 기분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런데 반휘혈이 납득 못 한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운을 뗐다.

“난 누나 좋아해.”

“알아.”

충분히 알고말고.

“그런데 왜….”

“그건 너도 말했다시피 ‘누나’로서잖아?”

“…….”

“넌 똑똑한 아이니까 무슨 의민지 알잖아, 그치?”

그의 입이 무겁게 다물어졌다. 내 말을 납득하기 어려운 듯 보이지만,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려 주는 반증이었다. 그러나 내 말대로 순응하긴 싫었는지 끝끝내 입을 열진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엔 좀 강수를 둬 볼까? 나는 말하기 앞서 잠시 주먹을 꾹 쥐었다가 각오를 다진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휘혈아, 너 연희한테 관심 있지?”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두 사람이 함께 주방에 있을 때부터… 고백을 했다는 걸 들었던 당시에도, 그가 주연희를 도와주는 걸 직접 목격했을 때부터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을 직접 보니 어쩐지 입안에 씁쓸한 맛이 감도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참 욕생쟁이네.’

그래도 슬슬 떠나보내긴 해야겠지. 반휘혈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 건….”

“그러니까 이젠 정말 이러면 안 돼.”

반휘혈의 입이 달싹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입을 열었던 나는 그 뒷말을 듣지 못했다. 그게 무언지 모르겠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은 내 할 말을 마치는 것만으로 크게 벅찼으니… 말이다.

“…….”

“음! 아무튼 그런 거야!”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대충 얼버무리며 끝을 냈다. 멋쩍게 웃어 주며 머리를 긁적이는데, 어딘가 꽤나 충격을 먹은 것 같은 반휘혈이 보였다.

‘…손 안 잡아 주는 게 그렇게 충격인가?’

그래도 우리 사이가 변하는 건 아닌데. 엄청 거리를 벌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킨십을 덜어 내는 정도일 뿐이었다. 혹시 이걸 말하는데 내가 너무 심각하게 말했었나? 나름 평범하게 말하려고 애썼는데… 참 애석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를 좀 안심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휘혈아, 그렇다고 우리 사이를 끝내자는 뜻이 아니라….”

“…아니야.”

돌연 반휘혈이 내 말을 자르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 게, …아니야.”

“어?”

그의 낯이 창백하게 질리면서 고개가 서서히 저어졌다.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좋, 아하는 건….”

“휘혈아!”

갑자기 그가 크게 휘청였다. 깜짝 놀란 내가 그의 몸을 부축하기 위해 달려들자 반휘혈이 내 위로 엎어졌다.

‘뭐, 뭐야, 이거 무슨 일이야?!’

이 난데없는 돌발 상황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가까이서 본 그의 낯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혈색까지 사라지니 정말 죽은 사람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지?! 아, 병원, 병원을 가야 해…!

“휘혈아, 괜찮아?! 설 수 있겠어?? 아, 아니다. 나한테 업히자. 우리 병원 가자, 병원.”

빠르게 등을 내보이며 그를 업으려 했다. 하지만, 반휘혈은 고개를 저으며 내게서 떨어졌다.

“…아니야.”

반휘혈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 버거운 걸 토해 내는 것 같아 보였다. 그 모습이 정말 심각해 보였다. 그래서 내 표정도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지금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병원부터 가야 된다니까?”

“아니라고-!!!”

어우씨, 깜짝아. 갑작스러운 고함 소리에 화들짝 놀란 어깨가 튀었다. 어리벙벙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자, 반휘혈이 덥석 내 어깨를 잡았다. 꽉, 하고 어깨를 누르는 힘은 아픈 사람답지 않게 강하기 그지없었다. 즉, 더럽게 아팠다는 소리다. 그러나 뒤이어진 반휘혈의 말에 관심이 돌려져 아픈 티도 내질 못했다.

“누나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어?”

이건 또 뭔 소리야? 황당한 마음에 얼굴을 찌푸리자 반휘혈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 그 녀석 안 좋아한다고.”

그 말에 내 눈이 커졌다. 그러나 금방 정신을 차린 나는 인상을 살풋 찡그렸다.

“그러면 네가 연희한테 고백을 했다는 건?”

“고백한 적 없어.”

반휘혈이 정색했다. 그는 이젠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이 눈에 걸렸다. 마음 같아선 땀이라도 닦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좋은 시기가 아닌 듯싶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관심은?”

“!”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떴다. 그러자 어딘가 곤혹스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다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걔한테 조금이라도…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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