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82화 (182/306)

183. 방황하는 마음. (1)

반휘혈의 입이 벌어졌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는 자꾸만 막힌 듯 입만 벙긋거리는 게 다였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것 봐.”

이것만으로 답은 충분했다.

“휘혈이, 네가 여자에게 그렇게 관심을 가진 건 처음이잖아.”

당연히 나는 그 대상에서 제외였다. 이 녀석은 날 여자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카테고리 속 누나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안에 내가 포함될 일은 없었다.

“휘혈아. 나는 말이야.”

하지만, 그렇기에….

“누나로서, 네가 정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누나로서, 그의 삶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나는 어깨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어느샌가 그의 손아귀엔 힘이 풀어져 있어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풀릴 것 같았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나는 힘 빠진 미소를 피식, 흘리며 나보다 훨씬 커다란 손등을 살포시 쥐었다.

“그게 좋은 아이를 만나는 거라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잡고 있는 그의 손을 꾹 누른 후, 힘을 풀며 슬며시 내 어깨에서 그 손을 치워 냈다. 커다란 손은 별다른 저항 없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떨어진 그 손끝을 보았다. 어쩐지 지금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겨우 시선을 올려 보아도 그의 어깨 너머를 배회하는 게 한계였다.

…왠지, 평소와 다른 의미로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것을 티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러니까! 이 누나가 네 연애 전선에 걸림돌이 안 되어 주기 위해 열심히 눈치를 굴려 주겠다, 이 말씀이지!”

부러 과장스럽게 어깨를 펴 보였다. 허세가 깃든 것이 티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으나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하하, 하고 흘리던 너털웃음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이내 우리들 사이로 찾아온 건 정적이었다.

나는 그 고요함 속에서 문득 질문을 던졌다.

남자 주인공의 행복은 여자 주인공과의 해피 엔딩이라면, 서브 남주는 무엇일까? 차라리 반휘혈이 남자 주인공이면 어떠하였을까. 지금이라도, …아니, 지금 이 흐름이면 최강혁이 아니라 반휘혈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삶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휘혈아.”

그것이 주연희를 만나는 게 조건이라면,

“넌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내가 그것을 막을 이유 따윈 필요치 않았다.

한 발자국 그에게서 멀어졌다. …집을 나설 때 그의 형님의 번호를 얻을 수 있어서, 이 근처가 바로 그의 집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아파 보이는 이 아이를 두고 떠난다는 선택지 따윈 할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나는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그를 향해 큰 미소를 덧그려 보였다.

“응원할게.”

반휘혈, 너의 삶에 커다란 행복이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지잉-.

“?”

반휘석은 가벼이 울리는 진동 소리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울린 핸드폰을 확인하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누구지.’

방금 울린 건 개인용 핸드폰이었다. 그 핸드폰의 번호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기에 그는 의아함이 들어 연락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서이나입니다.]

[혹시 휘혈이 좀 데리러 와 줄 수 있을까요? 집 근처예요.]

갑작스러운 문자였다. 혹시 몰라 헤어지기 전, 문 앞에서 번호를 교환했던 두 사람이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동생을 데려가라는 연락으로 말이다.

‘안 좋게 끝났나?’

…그럴 리가. 분명 그는 서이나가 떠나기 전 마주했던 그 강인한 눈빛을 기억했다. 그것은 타인의 기대를 쉽사리 저버릴 만한 눈빛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의밀까.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느릿하게 깜빡였다. 하지만 그 동작도 잠깐이었다. 연이어 도착한 메시지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가 지금 같이 있어 줄 수가 없어서... 휘혈이가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여요. 될 수 있다면 병원도 데려가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확인하기 무섭게 당장 밖을 향해 서둘러 발을 놀렸다.

밖으로 나오자 습하고 더운 공기가 그를 반겼다. 그는 서둘러 주위를 훑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집 주변이라고 했던가. 그는 뛰다시피 그 주변을 돌았다.

“아.”

그리고 반휘석은 동생을 발견했다. 다행히 그녀의 말대로 멀리 가지 않았기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휘혈아!”

그는 서둘러 동생에게로 뛰어갔다. 홀로 우두커니 길 한복판에 서 있는 반휘혈의 모습은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분명 반휘혈은 그토록 좋아하는 누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멀쩡히 잘 서 있는 걸 보면 그리 크게 아픈 건 아닐지도 몰랐다. 그는 조용히 안도하며 그에게 다가섰다.

“휘혈아.”

…그런데 반휘혈이 미동도 없었다.

“?”

무시를 하는 것같이 보이진 않았다. 그보단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아예 못 들은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반휘석은 그 모습에 짙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의 낯이 살짝 굳어졌다. 곧장 반휘혈의 어깨를 붙잡아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돌려세웠다.

“휘혈아, 무슨…. 휘혈아?”

그러나 반휘석의 굳은 낯은 동생의 몸을 돌린 순간 드러난 얼굴로 인해 한순간에 아연해졌다. 또 그는 당황했다.

“왜…, 울, 고…?”

그도 그럴 게, 그의 동생이 눈물을 흘리며 넋을 빼놓은 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트려서인지 말도 끊겨 나올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만든 건 그저 울고 있는 동생을 발견한 탓만은 아니었다. 물론 길 한복판에서 이러고 있는 것도 놀랍기 그지없는 건 맞았다. 그러나 말이 통하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는 운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동생이었다. 어느 정도 머리가 커서도 그가 제대로 우는 걸 본 건 자신이 군대로 떠났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돌아다니는 길목에서 이러고 있다니, 정말 이런 적은 그가 알기론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휘혈아, 무슨 일이야.”

하지만 지금은 마냥 당황스러워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심란한 마음을 다잡으며 반휘혈의 멍한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휘혈아.”

도대체 겨우 30분 내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당연하게도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누나랑 무슨 일 있었어?”

움찔. 질문과 동시에 반휘혈의 몸이 튀었다.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던 공허한 눈의 초점이 얼핏 맞춰지기 시작했다. 반휘석은 그 덕에 자신이 내뱉은 말이 정답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연이어 드는 가정을 떠올리곤 낯을 굳혔다.

“둘이 싸우기라도 했어?”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듯 울 리가 없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서 웃기는 소리긴 하나, 동생인 반휘혈에게 그의 형인 자신보다도 더 영향력을 선사하는 게 바로 서이나였다. 그러니 반휘석의 추측이 맞다면, 자신의 동생은 서이나를 바래다주는 이 길목에서 그녀와 마찰이 빚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아니, 그래도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자리를 만들어 줘선 안 되었던 건가? 대체 어떤 대화를 나눴기에 그의 동생이 이렇게 망가졌는지 이젠 호기심마저 차오를 지경이었다. 동생인 반휘혈도 자신만큼이나 감정 동요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짙은 의구심만 생겨 버렸다.

“…형.”

한참 복잡하게 동생을 보고 있던 반휘석의 귀에 잔뜩 긁힌 음성이 들려왔다. 반휘석은 하던 생각을 즉각 정리하며 반휘혈을 보았다. 반휘혈은 여전히 어딘가 멍한 상태였다. 그는 어딘지 모를 곳에 흔들리는 시야를 두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반휘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휘혈은 개의치 않고 저 혼자 말을 이어 갔다.

“난… 모르겠어.”

반휘혈은 묻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 자신은, 대체 무엇을 해야 되는 건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틀린 게 아니야. 분명… 틀린 게 아닌데, 틀린 거 같아.”

서이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반박지 못했다. …하나, 자신의 본능이 자꾸만 그것을 부정했다. 그것은 틀리다고. 누나가 틀렸다고, 그렇게 말이다.

“잡고 싶었는데,”

그래도 당장이라도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그는 쇠사슬에 얽매인 것 같은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손가락은 녹슨 고철을 움직이는 것처럼 쉽사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잡고 싶었다.

또 무슨 말을 듣는다면, 당장이라도 그 입을 막아 버릴 생각이었다.

자신의 손을 또 치워 낸다면, 그 쳐 낸 손의 뼈를 부술지언정 붙잡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서 멀어지려 한다면, 그 다리를 짓뭉개 버려 떠나는 발을 잡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었어.”

그러나 그는 그리할 수 없었다.

눈물이 잔뜩 젖은 그의 얼굴이 떨리는 두 손으로 가득 덮어졌다.

“누나가 웃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충동으로 야기된 모든 계획은 무산되었다.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그 웃는 얼굴이, 머리를 표백시키고 자신을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었다.

“이젠… 모르겠어.”

더 이상, 자신에 대해서도, 그녀에 대해서도 모든 걸 알 수가 없어졌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돼?”

그녀가, 서이나가, 그의 누나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잡을 수도 없었다. 한순간에 이정표가 사라진 길목에 선 미아가 되어 버렸다. 한 치 앞도 모를 길에 안온한 빛을 품던 등불이 사라졌다.

“누나를, 어떻게 봐야 하는 거야…?”

가냘프게 떨리는 음성이 허공에 산산이 흩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앞을 바라보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득하고도 깜깜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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