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방황하는 마음. (2)
***
끼이익-. 두꺼운 철문의 낡은 경첩이 소음을 일으켰다. 문이 열리며 밖에서 새던 빛이 환하게 안을 비추었다.
“여어-.”
그러자 묵직하면서도 단조로운 인사가 마중이 나왔다. 그 진원지를 따라가자 안쪽에는 어두운 인영이 켜켜이 쌓인 목재에 걸터앉은 채 가벼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드디어 보는구만.”
빛이 드리워지자 그늘진 음영이 거둬지고 서서히 그 얼굴이 나타났다.
“백화 재단의 공주 나으리.”
씨익, 그가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백장미는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마주했다.
“이런 지저분한 곳에 잘도 초대했군요. 정태우.”
당돌한 그녀의 인사에도 정태우는 그저 빙글빙글 미소만 지었다. 백장미는 그런 그를 아랑곳 않고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여상히 말을 이었다.
“당신의 수준은 잘 알겠습니다.”
“하하, 고상한 아가씨에겐 너무 자극이 강하나?”
툭, 정태우가 주위에 시체같이 널브러진 사람 하나를 건드렸다. 그러자 그 사람이 짧게 신음을 흘리는 게 들려왔으나, 이 중 그 누구도 표정을 흐리는 이는 없었다.
“설마. 당신의 천박함에 탄식이 나올 뿐인걸요.”
오히려 백장미는 시종일관 재미없다는 얼굴로 감흥 없이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정태우는 저 배짱 두둑한 아가씨의 행태에 오히려 이 상황을 만든 자신이 경탄할 지경이었다.
“흠. 조금 놀려 볼까 했는데, 안 놀라네?”
사실 이 난잡한 상황은 다른 이유도 있긴 했으나, 그녀를 골려 줄 목적도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너무 재미가 없는 반응이었다. 그는 실망스러움에 눈을 가늘게 뜨며 뒤로 몸을 늘어트렸다.
“설마요. 저엉-말 놀랐는걸요.”
그러나 놀랐다고 하는 그녀의 말치고는 지나치게 성의 없는 표정이었다. 마치 옜다, 놀람. 받아라. 하고 선심 써 주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정태우는 실소가 다 나올 지경이었다.
“됐다, 마. 같잖은 짓 치아라.”
정태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을 대충 휘저었다. 저런 재미없는 여성을 상대해 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이었다. 자신의 주위로 재미없는 놈은 김율 하나면 족했다.
“그래서, 내한테 무슨 볼일인데.”
백장미는 그 말에 낯을 살짝 굳혔다.
“당신도 꽤나 성미가 급하군요.”
“당신도?”
정태우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어쩐지 묘하게 석연찮은 말이었다.
“그래요. 싸움질하는 인간들은 다 이러나…. 쯧.”
“…니 말 참 재밌게 한다?”
신경질적인 혀 울림에 정태우가 싸늘히 눈을 가라앉혔다. 누가 보아도 자신을 낮잡아 보는 어투였기에 그의 기분은 당연히 저조해졌다.
“도련님.”
그러자 김율이 조용히 그를 불러 막았다. 정태우는 김율을 힐끗 바라보곤 짜증스레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흩트렸다.
“아, 그래서 뭔데.”
빨리 온 김에 볼일이나 후딱 끝내고 가 버렸으면 좋겠다. 더 이상 얘기할 의욕은 그에게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안 그래도 거지 같은 싸움을 붙고 난 뒤라 그의 신경은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괜한 불똥이 저 가녀린 공주님에게 튀어 무슨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른다. 정태우는 자신의 인내심이 그리 좋지 않음을 알기에 지차용 자식의 조사고 뭐고 빨리 얘기를 끝낼 참이었다.
‘참 운도 억수로 좋은 공주님이 아이가.’
평소라면 저런 온실 속의 화초 같은 공주님. 조금은 가지고 놀았을 텐데, 아쉽군. 그는 뻐근한 뒷목을 대충 문질렀다.
‘아니, 이 새끼를 좀 더 이따 조질 걸 그랬나.’
그러면 저 뻔뻔한 낯짝을 좀 더 일그러트릴 수 있었을 텐데. 정태우는 아쉽게 혀를 차며 바닥에 깔린 남자를 가벼이 걷어찼다. 그러자 쿵, 하고 엎드러진 몸이 앞으로 돌려지며 그 얼굴이 드러났다.
‘조커랑 싸웠다길래 좀 기대했건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몇 합을 겨뤄 봤다는 소식에 조금이나마 기대를 품은 자신이 병신이었다. 이번에도 소문에 불과한 수준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조커에 대한 소문이 지나치게 과장된 건가.
자신과 겨뤄 볼 만한 유력 상대로 손꼽히는 상대라고 거론되는 인물이다. 날이 갈수록 소문은 부풀어져 갔고 그만큼 기대도 커졌다. 그래서일까, 그와 몇 번이나 싸워 봤다고 하는 놈과의 대결 결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흐음?”
그때, 우연찮게 그쪽을 보았던 백장미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눈이 까뒤집힌 남자, 강태석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씩 미소 지었다.
“…당신, 조커에 대해 흥미가 많군요.”
역시. 백장미는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이는 그녀가 조사한 정보대로였다. 저 쓰러진 남자는 분명 강태석이었다. 서이나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면서 그녀와 유독 많이 싸웠던 상대를 몰라볼 일은 없었다.
“그렇다믄 우짤 긴데?”
그런 백장미의 속을 모르는 정태우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는 대충 이 무의미하고 재미없는 대화를 한시 바삐 마무리하고 싶었다.
‘차라리 율이 점마랑 가볍게 몸이나 푸는 게 가장 나을지도 모르겠네.’
그가 후, 하고 손톱의 때를 불며 대놓고 딴짓을 하고 있자, 백장미의 머리에 빠직, 하고 혈관 터지는 소리가 잠깐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자신의 페이스로 돌이키며 산뜻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그 정보, 제공해 드리죠.”
“…뭐?”
정태우는 대충 목재에 몸을 기대다 말고 애매하게 몸을 들어 올렸다. 방금 자신이 뭘 들었나, 하는 의문이 담긴 얼굴이었다. 백장미는 그에 여유로운 자세를 잊지 않고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당신께 조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니 뭔 생각이고?”
정태우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누가 보아도 수상쩍기 짝이 없는 언동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길래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홀랑 제공해 주려 하는 건가. 그의 경계가 세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유흥이라고 해 두죠.”
“유흥?”
그러나 백장미가 내놓은 답변은 가관이었다. 정태우의 시선이 좁혀졌다. 백장미는 그에 개의치 않고 대답을 이어 갔다.
“왜 그리 이상하게 보죠? 당신이 싸우는 걸 즐기는 것처럼… 저 또한 이 상황을 그저 즐기는 것뿐이랍니다.”
싱긋, 그녀가 아름다운 미소를 덧그렸다. 화사하게 피어난 장미와도 같은 그 웃음에 정태우는 실소를 머금었다.
‘…점잖긴 개뿔.’
누가 저 미친놈을 예의 바른 요… 요절? 숙녀인가, 뭔가라 칭했는가. 분명 미친 또라이가 틀림없었다.
“니가 뿌리는 정보 따위를 어뜨케 믿고.”
“후후.”
그러자 백장미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재밌는 걸 들었다는 것처럼 입을 가리며 작게 웃더니, 곧 입을 가리지 않은 다른 손으로 우아하게 손짓했다. 그러자 곁에 공기처럼 서 있던 김 비서가 움직였다. 김 비서는 품에 안고 있던 서류 봉투를 백장미의 손에 들려 주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백장미는 그것을 움켜쥔 후, 정태우를 향해 가벼이 던졌다.
툭, 가벼운 무게를 자랑하는 서류 봉투는 멀리 가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
그것을 보며 정태우의 미간이 살풋 찡그러졌다. 그는 서늘히 눈을 가라앉히며 백장미를 보았다. 백장미는 그런 그에게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전 볼일이 끝났으니 가 보도록 하죠.”
백장미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돌아섰다. 꽃향기를 흩트리며 떠나는 것 같은 모양새는 가히 오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 만했지만, 그중에 정태우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그 모양의 생김새보단 그 안에 품고 있는 가시에 싸늘히 얼굴을 굳혔다.
“아, 진짜….”
죽이고 싶네.
정태우는 철문 너머로 떠나는 백장미를 보며 스산히 중얼거렸다.
“잘 참으셨습니다. 도련님.”
두 사람의 대화를 줄곧 지켜보던 김율은 그의 인내심을 칭찬했다.
“날이 갈수록 사리 분별이 일취월장하시는군요. 대단하십니다.”
“…니는 지금 내를 칭찬하는 기가, 욕하는 기가?”
“칭찬입니다.”
김율은 진지했다. 그의 주인답지 않게 훌륭한 인내심에 속으로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주인의 오해는 익숙하지만 지금만큼은 이런 자신의 뜻이 곡해되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
“…마, 됐다. 저거나 주워 와라.”
정태우가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이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 성의 없는 몸짓에 김율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조용히 서류 봉투를 주워 그 안을 열었다.
“…이건.”
“뭐가 들어 있나.”
별 기대가 담기지 않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안을 살핀 김율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김율이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정태우는 사뭇 진지해진 김율의 태도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언가 심상찮았다. 그는 김율을 바라보며 건네 오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
이건…!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한 정태우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종이에 그려진 인물을 빠르게 한 장, 한 장 살펴보았다.
“큭….”
그리고 모든 사진을 다 본 그의 입가엔 큰 미소가 걸리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숨죽이듯 웃음을 토해 내더니, 이내 이마를 붙잡으며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커다란 웃음소리가 창고 내부를 가득 채웠다. 한참을 호탕하게 웃던 그는 점차 웃음을 뚝, 그치며 날카로운 웃음만을 덧그렸다,
“율아.”
“네.”
“가자.”
정태우는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척척 문을 향해 다가갔다. 목적지를 향한 발걸음은 시원스럽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찾았다.’
드디어, 명확한 증거가 나타났다. 이젠 더 이상 그를 말릴 장해물은 없었다. HD 그룹이 그렇게 제시하라던 증거가 손에 떨어졌다. 그러니 그는 싸움을 걸 명목이 바로 세워졌다. 그의 안에서 그녀가 자신과의 결투를 거절할 거란 선택지는 없었다. 있어도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자-. 우리 숙적 나리를 어떤 식으로 만나면 좋으려나-.”
그가 히죽, 웃음을 지었다. 실로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만나야 좋을까. 어떻게 마주해야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까. 그런 쓸데없는 고민마저 들 정도로 그는 들떠 있었다.
“…인상을 새기고 싶으신 겁니까?”
그러자 잠자코 있던 김율이 그의 사색을 방해했다. 정태우의 시선이 짜증스레 가늘어졌다. 방해를 받은 게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한 대 맞을 것 같았으나, 어차피 한 대 가지곤 죽지도 않는다. 이왕 방해한 거 김율은 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렇다면 체육 대회는 어떠신가요.”
“…체육 대회?”
멈칫,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게 뭔 뜬금없는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그의 눈이 살벌히 좁혀지는 걸 지켜보며 김율은 입을 재차 열었다.
“다음 주… 오늘이 일요일이니, 정확히 달력상으로 다음 주 중에 도방고등학교에서 체육 대회가 있다고 하더군요.”
“도방?”
“조커가 다니는 학교입니다.”
“아, 그래?”
근데 그기 와? 정태우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리고 그것에 무너지진 않는 건 김율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면 타 학교에서도 많은 학생이 몰려들 거라고 추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