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방황하는 마음. (3)
“그게 나랑 무슨… 아?”
짜증스레 되묻던 정태우의 목소리 끝이 순간 갈라졌다. 그는 불현듯 김율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포착하진 못했다.
다른 학교. 체육 대회.
…뭔가 거슬린다. 대체 뭐지?
뭐, 바로 떠오르질 않는 걸 보면 그리 중요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를 대충 흩트리다가 방금 김율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때면 타 학교에서도 많은 학생이 몰려들 거라고 추측됩니다.’
타 학교, 많은 학생, 학생, 학생…. 아.
“아- 그렇군. 그런 거였나.”
빡-! 정태우가 김율의 어깨를 시원스레 내려쳤다. 김율의 몸이 잠시 휘청였지만, 정태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김율이 하고픈 말을 눈치채곤 입가에 시원한 미소를 덧그렸다.
“웬일로 쓸 만한 생각을 했데.”
큭큭. 정태우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즐거워 보이시는군.’
간만에 받은 칭찬이 얼얼하기 짝이 없었지만, 도련님이 즐거워 보이니 됐다고 김율은 생각했다.
“아.”
그런데 정태우가 불쑥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이어 짓궂은 미소를 씩, 달더니 그의 곁에 선 김율을 불렀다.
“야, 율아.”
“네.”
“점마, 그 공주님 학교 말이다. 거이랑 가깝나?”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멀지도 않죠.”
“그라믄 그 학교 학생들도 찾아가겠네?”
“네, 그럴 겁니다.”
그 대답을 다 듣고 나자, 정태우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마치 수상한 흉계를 꾸미는 듯한 낯에 김율의 시선이 조금 좁혀졌다. 그러나 뒤이어진 정태우의 말에 김율의 눈은 삽시간에 커졌다.
“금마네 교복으로 하나 장만해 놔라.”
내 사이즈 알제? 알아서 준비해 온나.
정태우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건…,”
“이대로 가기엔 동네방네 나 간다고 소문내는 꼴 아니겠나. 이럴 땐 그, 풀떼기를 숨기기엔… 숲이 좋다고 했든가? 아무튼 그런 기다.”
그냥 그대로 가는 것도 꽤나 강렬한 인상을 줄 터였다. 전국에 떨친 정태우의 위명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태우는 자신이 고안해 낸 생각이 마음에 들었던지 꽤나 흥겨워 보였다. 평소라면 김율 그도 그런 그를 말리지 않을 터였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그는 급히 입을 열었다.
“풀이 아니라 나무입니다. 그보다, 도련님. 그건…,”
“마, 엥엥 시끄럽다. 풀이나 나무나 숲에 숨기면 다 안 보인다, 아이가!”
“그렇긴 합니다만….”
김율의 낯에 곤혹이 깃들었다. 흔치 않게 드러난 감정이었으나, 귀를 막고 돌아선 정태우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도련님, 역시 한 번 더 재고하심이….”
“재고? 그기 뭔데.”
“다시 생각해 달라는 뜻입니다.”
“와. 머가 문젠데.”
“그것이….”
“아, 잠깐. 잠깐. 잠깐만.”
김율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은 정태우의 제지에 의해 다시 막히고 말았다.
“내 아까부터 뭔가 거슬린다 싶더니….”
…혹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챈 걸까? 김율은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너 이노무 시키…. 너, 조커가 누군지 알고 있었제? 아님 학교 이름이나 체육 대회 하는 걸 와 알고 있는 긴데??”
“…….”
아니었군. 김율은 잔뜩 살벌해진 그의 도련님의 얼굴을 보며 그럼 그렇지, 싶어졌다.
“그렇네요. 심증뿐이었지만,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몰라 그와 관련된 정보를 계속 모으고 있기도 하였다.
“와 그걸 보고를 안 하냐고…!!!”
뽜악-!!!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타격음이 그의 등에서 들려왔다. 김율은 잠시 뼈가 부러질 것 같은 아찔한 통증에 시야가 점멸됐지만, 이내 눈을 몇 번 깜빡이는 걸로 시야를 다시 확보하곤 말했다.
“…확실해질 때까지 하지 말라 하신 건 도련님이었습니다만.”
“니 진짜 죽고 싶나.”
정태우의 얼굴이 더 살벌해졌다. 진짜 저 입을 찢어 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그의 눈에 강하게 깃들기 시작했다.
‘이런. 더 얻어맞겠군.’
아무래도 오늘은 편히 자기 힘들 거라 여기며 그는 생각했다.
‘…교복은, 다 뜻이 있는 거겠지.’
그는 다가오는 주먹을 보며 말없이 눈을 감았다.
***
위화감을 느낀 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확신했다.
반휘혈이 나를 피한다.
‘왜…?’
나는 심각하게 팔꿈치를 책상에 댄 채 두 손을 모아 입가에 대었다.
지난 주말, 반휘혈과 헤어진 후 나는 그에 대해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무책임하게도 아파 보였던 그를 뒤로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역시 형이 올 때까지는 같이 있어 줘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어째서 나는 그 아이에게서 도망치듯 떠나온 건가. 어른스럽지 못했던 행동에 짙은 후회로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결국 나는 월요일에 학교에서 마주치면 그에게 사과하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심기일전으로 등교했건만….
‘아, 휘혈….’
휙.
어라. 나는 인사하려고 들었던 손을 멋쩍게 내려놓았다. 처음엔 아무래도 나를 못 본 모양이라 여기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런데,
다음 쉬는 시간 복도에서도.
‘휘혈…!’
휙.
다음 날 식당에서도.
‘엇.’
휙.
그리고 다다음 날 운동장에서도!
‘야…!!’
휙.
다 외면당했다. 말을 걸어 보려고 다가설라치면 그는 잽싸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처음엔 그저 못 봤겠거니 하며 여겼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은 더해 갔다. 그는 나를 완벽하게 피하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며 모은 두 손에 얼굴을 맞닿았다. 삐졌을지도 모른다는 건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번엔 정도가 심했다. 마치 이건 작년 이맘때와 같지 않은가.
물론 이번에도 내 잘못도 있었다. 아픈 그를 덩그러니 두고 떠나질 않았던가. 아무래도 그는 그 사실에 대해 꽤나 서운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내가 바로 사과까지 하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가 나를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뭐긴 뭐야.’
답은 하나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젠 정면 승부다-!!!!’
딱 기다려라, 반휘혈. 이번엔 절대 도망 못 간다.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나는 즉각 우리 반을 나섰다. 그리고 당도한 문을 힘차게 여는데,
“어, 오늘 휘혈이 학교 안 왔어요.”
“뭣.”
반휘혈은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는 놈이었다. 정면 돌파로 강행하려 했더니, 아예 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급격히 허탈한 심정이 밀려왔다. 나는 열었던 반휘혈네 반의 문에 무너지듯 기대었다.
“어째서어어….”
“글쎄요? 오늘 웬일로 안 왔다 생각하고 있긴 했어요. 요즘엔 되게 착실히 다녔는데… 누나, 지난주에 휘혈이랑 무슨 문제라도… 어, 누나? 누나???”
더 이상 이 반에 볼일이 없던 나는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었다. 한도훈이 내게 뭐라 말한 것 같긴 했지만 충격을 받은 내 귀엔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떠나기 전, 설렁설렁 손을 흔들어 한도훈에게 인사를 해 주었다. 내 등 뒤로 한도훈이 나를 한 번 더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으나… 애석하게도 허탈함에 기력이 모두 소진되어 버려 대충 흘려들으며 다시 우리 반으로 돌아왔다.
“이럴 수가아아….”
나는 책상 위로 철푸덕 엎어졌다. 각오를 다졌던 게 이렇게 무색해지다니.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무력함이었다.
“반휘혈, 너 이 짜식…. 나 보는 게 그리도 싫디….”
나는 불쑥 찾아든 서운함에 힘없이 책상을 두드렸다. 나쁜 놈. 아무리 내가 그렇게 떠났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피하는 게 어딨어.
물론 그가 오늘 안 나오는 데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저 우연에 불과하여 벌어진 일일지도 모르지만… 지난 며칠간 나를 대놓고 피해 왔기에 내 의심은 이미 무럭무럭 자라나 열매를 잔뜩 피어 낼 지경이었다.
아니, 그보다 이렇게까지 피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평소라면 이미 얼굴 한번은 부딪혀서 다투기라도 했을 텐데, 이렇게까지 진전 없이 질질 끄는 건 또 처음이었다. 만약 내가 싫어졌다면 그의 성격상 대놓고 경멸을 보이든가 없는 사람을 취급해 줬을 텐데, 그건 또 아니었다. 그냥 반휘혈은 날 고의적으로 피하는 것뿐이었다.
“손 안 잡아 주는 게 그렇게 충격이었냐고오오….”
그나마 반휘혈이 더 삐질 일이 있다고 한다면 이거였다. 그 뒤로 한 말이라곤 그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밖에 기억이 없었다. 행복을 빌어 준다는데 이걸로 속이 뒤틀릴 일은 없지 않겠는가.
“끄응. 집 찾아가는 건 또 그렇고.”
문자로 얼굴 한번 보자 닦달을 해 보았는데도 답이 없는 그였다. 그런 상태에서 집에 난입해서 뭐 하는가. 무엇보다 그 철통같은 보안 시스템이 퍽이나 나를 쉽게 들여보내 주겠다. 게다가 그 오피스텔의 주인인 형님에게 아픈 동생을 내팽개치고 떠난 누나로 보이지 않았을까 염려도 돼 차마 혹여라도 얼굴 마주하기 힘들었다. 여러모로 참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나는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그가 내게서 도망치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만일 내가 그렇게 인정머리 없이 떠난 것에 상처를 받았다면 그만큼 난 더더욱 그에게 사과를 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내일은 오겠지?”
설마 이틀 연속 무단결석을 하겠어? 나는 그리 생각하며 찝찝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안일했던 생각이었다.
***
반휘혈은 그다음 날에도 학교에 출석하지 않았다.
“허…. 좋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나는 심각하게 얼굴을 가라앉히며 스산히 중얼거렸다.
최종 유예 기간은 금요일이었던 어제까지였다. 또 이틀 연속으로 무단결석을 하는 반휘혈을 마주하니,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반휘혈이 이전에는 상습적으로 학교생활을 불성실히 다니는 불량아였음을. 겨우 출석 따위에 연연하는 타입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그동안 반휘혈이 너무 성실히 학교를 다녀서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부터 할 일은 하나였다.
“기필코 만나고 말겠어.”
2년간 서이수 쫓아다니던 짬밥을 무시하지 마라. 내가 어떻게 나를 보며 학을 떼던 서이수의 멱살을 부여잡고 지금에까지 이르렀겠는가. 바로 한번 작정하면 포기하지 않고 덤벼드는 집착 같은 승부욕 아니겠는가. 또 작년에 행방불명되었던 반휘혈도 그런 식으로 찾았던 만큼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노릇이었다.
비록 반휘혈이 내 예상 범주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의 집념으로 그 예측을 웃돌게 만들어 주리라.
“후후…. 이거 참. 오랜만에 몸 좀 풀겠는데.”
음산한 웃음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하나 나는 개의치 않고 스산히 눈을 가라앉혔다.
‘그래. 술래잡기, 한번 즐겨 보자고.’
약 1년 만에 새로이 시작된 술래잡기의 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