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85화 (185/306)

186. 방황하는 마음. (4)

계획이 정해졌으니 이젠 실행만이 남았다. 나는 기합을 넣기 위해 얼굴을 찰싹 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밖에 나가기 위해 상의를 훌쩍 탈의했다.

대충 편한 반팔을 집어 입으려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 거의 다 나았네.”

나는 상의를 입다 말고 내려 두며 거울 쪽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그리고 살짝 푸르스름한 기가 있는 어깨를 짚으며 그것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역시 젊은 게 좋긴 하네.”

몸이 젊어서 그런가, 확실히 다친 게 금방 나았다. 나는 어깨를 휙휙 돌리며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힘 한번 더럽게 세네, 그 자식.”

사실 이 어깨의 멍은 반휘혈에 의해 생긴 상처였다. 어쩐지 엄청 아프다 싶더라니. 반휘혈과 실랑이가 있었던 그날 밤, 나는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양쪽 어깨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시퍼런 멍을 마주했다.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설마 내게 이런 상처가 생길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덕분에 남자에게 손목이 붙잡혀 멍이 들었던 그 수많은 여주들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어휴, 나니까 괜찮은 거지. 연희였어 봐라. 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라니까?’

물론 나라고 해서 진심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나는 당하면 그 이상으로 돌려줄 자신이 있기에 나오는 여유일 뿐이었다.

“음. 역시 그래도 언제 한번 진지하게 이런 부분은 짚고 넘어가긴 해야겠는데.”

나는 어깨에 든 희미한 멍을 뚫어져라 보며 턱을 쓸었다. 반휘혈은 어릴 때부터 폭력에 쉬이 노출된 것도 모자라 그것을 지적해 줄 어른이 없던 녀석이었다 보니 폭력적인 행위에 둔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폭력인지 사회적으로 덜 예민한 시기이다 보니 팔을 잡아끌고 간다거나, 강압적인 태도, 또 위협적인 태도의 경계선이 애매한 것 같았다. 반휘혈도 그중 한 명일 게 뻔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반휘혈은 그렇게 막 나가는 놈이 아니란 점이었다. 말귀가 통하는 놈이고, 틀린 걸 수용할 줄 아는 녀석이니 말한다면 고치기 위해 노력해 줄 게 분명했다.

‘…이러니까 내가 더 가만히 둘 수 없는 거지만.’

정말이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녀석의 입장에선 겨우 한 살 차이 나는 누나일 뿐인데 내 말을 잘 따라 주는 거 자체가 참 기특했다. 그렇게 과묵하고 마이웨이인 녀석이 누나, 누나 하면서 따라 주는데 어떻게 가만히 놔둘 수 있겠는가.

‘아, 떠오르니까 진짜 보고 싶네.’

그 귀여운 녀석이 무뚝뚝한 얼굴로 졸졸졸 따라다니는 걸 못 본 게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갔다. 그런 걸 자각하고 있자니 갑자기 금단 증상까지 올 것 같았다. 에잇. 괜히 생각했어. 어서 빨리 사과를 하든 해야지, 원…. 나는 툴툴거리며 옷을 훌쩍 입었다. 그러곤 책상 위에 올려 둔 마스크와 모자까지 완벽히 갖춰 입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완벽하군.”

옷매무새의 정리를 마친 나는 곧장 집을 나섰다.

“으, 더워.”

그리고 나는 나오자마자 인상을 확 찌푸렸다. 이렇게 날도 더운데 왜 이리 무장을 했느냐. 이건 다 이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퍽, 퍼벅-!

“야, 이 새끼, 족쳐!!”

쨍그랑-! 쾅!!

“꺼져, 병신아!!!”

“악, 씨바!!”

…이런 현장에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음~. 여긴 여전히 활발하구만~.’

나는 변함없이 서열 전쟁인가 서열 싸움인가 뭔가 하는 개싸움을 벌이는 일진 놈들의 향연에 흐린 눈을 장착하며 고개를 성의 없이 끄덕였다. 어째서 나는 이곳에 온 것인가. 그 이유는 단순했다.

“에이, 없네.”

바로 반휘혈을 찾기 위함이었다. 어째서 반휘혈을 여기서 찾는가. 그야 인소 속 남자 캐릭터… 특히, 일진이라면 출몰하는 곳이 이런 곳 아니면 어디겠는가. 더군다나 기분이 저조한 남자 주연은 꼭 싸움판에 휩쓸려 있던 게 자주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요즘 반휘혈이 잘 안 싸우긴 하더라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던가. 요 이틀간 잠적했으니, 오늘까지 집에만 박혀 있기 싫었던 반휘혈이 밖에 설렁설렁 숨통 좀 트이러 나왔다가 시비가 걸려 싸움이 벌어졌을지 누가 알겠는가. …정말 내가 생각해도 대책 없는 계획이었지만, 여기는 인소 세계관이라 모든 개연성을 만들어 주니 괜찮…, 괜찮겠지…?

어쨌든 간에 내가 대낮 여름에 이리 꽁꽁 싸맨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잘못해서 이 개싸움에 휩쓸리면 어떡하나. 정체를 드러낸 채 싸우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백장미에게 정체를 들킨 뒤여서 그런지 더 조심스러워진 것도 있고 말이다.

‘흠흠. 어, 어쨌든 여기는 없나 보네.’

쩝. 역시 첫술에 배부르긴 글렀나.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개판이 벌어진 공터를 벗어나 다음 후보지인 외진 골목으로 향했다.

***

“아, 도대체 어딨는 건데!”

나는 털썩, 카페 의자에 주저앉으며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고, 눈은 눈대로 버리고…. 에잇….”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저절로 단 게 당겨 와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초콜릿 음료를 시킬 정도였다. 벌써 유명한 싸움 스폿에 들른 곳도 다섯 군데였다. 그런데 만나고 싶은 놈은 안 보이고 듣도 보도 못한 놈들만 수두룩했다.

물론 내가 일진에 관해 무관심해 잘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 개중엔 유명한 놈들도 있겠지, 있기야 하겠다만….

‘그래도 이렇다 할 만한 놈은 없었단 말이지?’

그 서열 전쟁인가 싸움인가 뭔가 하는 개싸움이 처음엔 재밌기야 했다. 그런데 점점 갈수록 지루해지다 못해 보는 내가 다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그래, 원래는 그게 맞지…. 그게 맞는 거지….’

본래라면 오늘 본 싸움 내용이 일반적인 게 맞았다. 그냥 평범한 일반인들이 무쌍을 찍는다면 또 얼마나 찍겠는가. 방금 보았던 싸움들처럼 그냥 기교도 없이 주먹만 막 나가든가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며 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래도 나름 기대했는데…. 쩝.”

역시 세상은 불공평한 게 맞았다. 주연 또는 조연과 엑스트라의 차이가 이렇게 극명하다니.

‘이수야, 너도 꽤 괜찮은 녀석이었구나….’

나름 이런 싸움판에 익숙하다 여겼건만…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서이수 잡으러 돌아다녔을 땐 몰랐는데 알고 보니 서이수도 꽤 실력이 괜찮은 녀석이었다. 말이 약골이라고 놀리긴 했으나, 아니 물론 내 기준에선 영 시원찮긴 했지만…. 아, 아무튼 지극히 내 주관적인 기준인 거고. 객관적으로 보면 그 녀석이 실력이 없는 건 또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놈들이 싸우는 것 직접 보니 내 동생 놈은 일진이라고 불리는 놈들 사이에선 꽤 강한 놈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이 될 정도였다.

설마 이렇게 내 동생 놈의 평판이 올라갈 줄이야, 적어도 오늘 본 싸움들처럼 내용이 유치한 적은 없었다. 내가 괜히 극장을 관람하는 것처럼 즐긴 게 아니었다. 물론 썩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꽤 흥미진진했으니 선방한 게 아닌가.

‘하, 이 기특한 짜식…. 역시 우리 집안 핏줄은 어디 가는 게 아니었구만?’

갑자기 서이수가 자랑스러워졌다. 흐뭇함에 방금까지 기분 나빴던 게 좀 가시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확실히 애들이 다르긴 다르네~.”

나는 빨대를 질겅질겅 씹으며 반휘혈과 다른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 녀석들이 그 싸움판에 끼어들면 개그물에서 무쌍물로 바뀔 정도로 확연히 판도가 달라졌다. 특히, 반휘혈. 그 녀석의 개입에 따라 분위기가 상이하게 달라졌다. 그는 마치 무대 위에 선 주인공 같았다. 아무리 실력 없는 잡놈들만 끼어 있어도 반휘혈이 그 안에 섞여 있게 되면 그를 돋보여 주는 무대 장치로 변해 그 쓸모를 다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평소라면 눈길도 안 줬을 텐데 반휘혈 그 자체로 독보적인 존재라 그런지 확 시선이 끌리면서 그 싸움판은 급격히 흥미진진해진다.

“흐음. 역시 반휘혈은 반휘혈인가~.”

너무 친근해져서 그동안 망각했다만, 반휘혈이란 이름이 어떤 이름이었는지 새삼 생각나는 것 같았다.

‘이야-, 갑자기 옛날 생각나네.’

그래, 맞다. 반휘혈 하면 역시 싸움짱이지. 위명에 걸맞은 행보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야 뭐 내가 지적할 부분이 없었고, 기술 쪽은 할 말이 좀 있었으나 조금만 다듬으면 챔피언을 노려봐도 될 만한 재능이었다. 정말 생각할수록 아까운 재능이었으나, 그는 딱히 이쪽으로 진로를 정할 것 같진 않았다.

그나마 진지하게 고려해 볼 만한 건 김시원인데…. 김시원의 실력은 확실했지만, 그것이 이 세계에서도 먹힐지는 미지수였다. 다른 세계였다면 진지하게 월드 챔피언 타이틀 따보자고 설득해 보았을 텐데 이 세계는 너무 변수가 많았다. 과연 그 정도의 실력이 이 세계에도 통할까? 하는 의문이 참 많이 들었었다.

‘뭐, 그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작 가장 중요한 김시원이 프로 쪽으론 진출할 마음이 없단 것도 문제였다. 덕분에 아빠가 얼마나 아쉬워하던지…. 오죽했으면 나에게 김시원 좀 설득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을 정도였다.

‘흐음. 아빠가 이런 걸 보면 가능성이 넘치는 건 맞는 것 같단 말이지?’

인재에 목마른 데다 선수를 보는 눈이 극히 까다로운 분이 그럴 정도면 그 가능성이 차고 넘칠 게 분명했다. 물론 나도 아까운 마음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입장도 내 입장이다 보니… 적극적으로 설득하긴 힘들어 결국 단념했지만 말이다.

“쓰읍. 그럼 반휘혈은 대체 뭐지?”

애들 중에 가장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놈이 바로 그놈인데…. 와, 이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아깝네? 아, 아니, 그보다…,

“진짜 싸워 보면 안 되나? 한번 말해 봐??”

오랜만에 싸움판을 보고 나서인지, 몸이 좀 근질근질했다. 특히 그 말 같지도 않던 개판을 보니 얼마나 답답하던지. 성질을 못 참고 그 개싸움에 안 끼어든 게 용했다. 덕분에 그동안 잠재워 놨던 격투가로서의 본능이 일깨워질 지경이었다.

“…에이, 그래 봤자 뭐 해. 만나야 뭘 하든 말든 하지.”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만나고 싶어도 연락을 개무시하는데 링 위에서 붙어 보자 하면 얼씨구나 하고 붙어 주겠다. 물론 만나서 내가 시비를 걸면 싸워 볼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감정적으로 싸우고 싶은 게 아니라 순수한 실력 겨루기를 하고픈 거라 더더욱 이 현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결국 혀를 가볍게 차며 털썩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이번엔 또 어디로 가 볼까….’

이 근방에 또 어디가 있지? 다리 밑은 가 봤고, 학교 근방 공터도 가 봤고, 또…. 곰곰이 가 본 곳을 짚어 보고 있는데, 불쑥 남학생 두 명이 내 곁을 지나갔다.

“어, 씨발. 대박 사건.”

“왜, 어떻게 돼 가는데.”

“완전 개 털렸다는데? 지금도 실시간으로 밟히는 중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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